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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예민한 남자 (17/121)

017. 예민한 남자2020.10.30.

이만하면 신경 쓰일 만하죠. 레이얼은 키릭슨의 말에 하루 내내 체증 같던 고민이 쑥 씻겨 내려감을 느꼈다. 자신이 유별난 게 아니었다. 누가 봐도 레이디가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하단다. 깔끔하게 결론이 나자, 내내 한 자도 읽히지 않던 서류도 쑥쑥 잘 넘어간다.

“아침도 점심도 다 거르셨던데, 뭐라도 좀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굶고 고민한다고…… 네?”

“그러겠다고. 안 그래도 출출하니 뭐라도 좀 챙겨와 봐.”

“아, 예예. 그러겠습니다. 일단, 차라도 드시며 기다리세요.”

키릭슨은 레이얼이 이렇게 순순히 응할 줄 몰랐던지 허둥거리며 집무실을 나섰다. 그는 시종을 부르면 된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키릭슨이 자리를 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류를 하나 끝낸 레이얼은 펜을 내려놓고 찻잔을 들었다. 찰랑이는 찻물을 따라 물큰 피어오른 상큼한 향에 기다렸다는 듯 로이가 떠오른다. 이불 안을 가득 메우던 향이 꽤 상큼하고 청량했다. 사실 레이얼은 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로이의 것은 옅고 은근해 제법 괜찮았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달콤하지 않아서였다. 귀족가의 여성들이 뿌리는 향수는 대체로 다디단 꽃향이었다. 황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나 캐서린 황후의 향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고 진해 두통이 일 정도였다. 덕분에 그는 언제부턴가 ‘향’에 꽤 민감해지고 말았다. 말하자면 두통을 피하려는 자기방어였을까. 설탕으로 빚은 듯, 눈웃음이 일품인 캐서린 황후가 떠오르자 비강 안까지 달큼하게 절여지는 기분이었다.

“하.”

맡아질 리도 없는데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옅게 두통이 치민다. 레이얼은 상상의 향을 몰아내기라도 하듯 들고 있던 찻잔을 기울여 연거푸 마셨다. 오늘 키릭슨이 내온 것은 가향차인지 그 향이 유독 산뜻하다. 덕분에 두통도 한결 수월해졌다.

“…….”

기분 탓일까. 어쩐지 마시는 차향이, 간밤 이불 안을 가득 메웠던 향과도 같은 것 같다.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망상을 하라는 건 아니었을 텐데? 레이얼이 자조하듯 중얼거리던 때, 마침 키릭슨이 들어왔다.

“티푸드를 조금 챙겨와 봤습니다. 곧 저녁 식사하셔야죠.”

조금이라더니 그가 내려놓는 접시엔 담백한 맛의 쿠기가 가득이었다. 보기만 해도 절로 목이 메는 광경이었다.

“차 한잔 더 부탁하지.”

“아, 네.”

쪼르르륵. 비었던 찻잔이 이내 화려한 붉은 색으로 가득 채워지며 상큼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이 차 이름이 뭐지?”

“블랙잉그리드입니다.”

“블랙잉그리드.”

나직이 차 이름을 읊조린 레이얼이 붉은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역시, 꽤 마음에 드는 향이다.

  아침이 되자 열이 좀 떨어지는 것 같더니, 클로이는 점심께부터 열이 다시 무섭게 오르기 시작했다. 발갛게 달아올라 쌕쌕거리는 클로이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아스라하고 연약한 모습이었다.

“몸살이라면서요.”

로지는 클로이를 진찰하는 의사에게 볼멘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몸살이에요.”

“우리 아가씨가 몸살 정도에 이렇게 열이 날 리가 없는데, 진짜 몸살 맞아요?”

“보통 몸살엔 종종 고열이 동반된답니다.”

“글쎄 우리 아가씨는 그런 적이 없다니까요.”

“그럼, 이번에 그러려나 보죠.”

청진기를 귀에서 빼며 몸을 일으킨 의사가 허리에 손을 척 올리며 로지를 흘겼다. 키가 작고 볼에 살집이 많아 전혀 무서워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초리만은 제법이었다.

“아, 왜요.”

“로지 양. 지금 날 못 믿는 거야?”

“그럴 리가요. 그냥 아가씨가 한번도 이런 적이 없으셨잖아요. 이상하니까 그렇죠.”

“어째서 평소와 같아야 하지?”

“예?”

“공작님과 소공작께서 그렇게 되셨는데 어떻게 평소와 비교를 하느냐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의사의 질책에 로지의 입이 꾹 다물렸다.

“공녀님께서 울기라도 해야 까맣게 탄 속을 알아줄 건가?”

“…….”

“너무 몰아세우지 마.”

의사의 말에 로지는 가만히 주먹을 폈다 쥘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루 두 번, 약을 먹여야 하니까 저녁엔 반드시 깨우고. 알겠어?”

“예.”

“……그렇다고 자네더러 날뛰라는 소리는 아니야 로지 양.”

“누가, 날뛴다고요.”

“난 또. 금방이라도 황궁으로 뛰어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에. 암튼 고생해.”

“살펴 가세요.”

다소 무례하게 들리는 배웅에도 의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한번 흔들었을 뿐. 의사가 나가고 단둘이 남게 되자 로지는 한차례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손길에 얼굴이 험하게 쓸려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로지는 마치 남 일인 양 덤덤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덤덤한 듯한 표정 아래, 살기가 번뜩이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있다.

“아가씨.”

클로이가 ‘스승의 얼굴’이라며 질색하던 것보다 훨씬 차고, 무감한 표정으로 로지는 앓는 클로이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감싸 쥐었다.

“힘드세요?”

한층 나직해진 목소리.

“못 견디시겠어요?”

제 손아귀 안에서 힘을 잃고 늘어진 가는 손가락을 로지는 단단히 움켜쥐었다.

“공녀님. 언젠가 말씀하신 대로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아마 클로이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있을 테다. 그러나 로지는 더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만약, 일이 생긴다면 그땐 제가 은쟁반에 배신자의 수급을 올려 바칠 테니.”

이렇게 앓지 마세요. 잔혹해서 너무도 상냥한 뒷말은 로지의 입안에서 사그라들었다. 파르르. 마치 기다렸다는 듯 클로이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눈을 떴던 것이다.

“아가씨.”

“……로, 지.”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희미한 목소리였다.

“대충 주무셨으면 좀 일어나세요. 배도 안 고프세요?”

쥐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놓고 일어선 로지가 준비해둔 물을 가져다 클로이의 입을 축여주며 핀잔했다. 조금 전까지 잔뜩 독이 올라 복수를 맹세하던 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쉬라고 했다고 너무 늘어져 쉬시는 것 같아요. 아파도 할 일은 하셔야죠.”

“그게, 뭔……데?”

“환자가 할 일이 뭐겠어요? 잘 먹고 약도 잘 먹고 잘 자는 거죠.”

툴툴거리면서도 로지는 재빠르고 노련하게 움직여가며 클로이를 살폈다. 늘어진 클로이를 슬쩍 일으켜 앉히고, 등 뒤에 베개를 넣어 기대게 한다. 그러나 그게 한계였던 듯, 기어이 로지는 사정하듯 클로이를 달랬다.

“내키지 않아도 좀 드셔야 해요.”

“으응…….”

“얼른 떨치고 일어나셔야죠.”

“그래.”

“누구가 서류 보다 죽어간다고 꼭 좀 전해 달랬거든요.”

“그래그래.”

순순한 클로이의 모습에 왈칵 겁이 나는 듯, 로지의 얼굴이 순간 흐려졌다 돌아왔다.

“지혜열 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응 그래.”

주는 대로 수프를 삼키고, 물을 마시고 약을 삼킨다. 영 맥을 못 추는 클로이의 모습에 몇 번이고 이를 질끈 깨물었지만, 로지는 클로이가 약 기운에 다시 까무룩 잠이 들 때까지 꿋꿋하게 곁을 지켰다. 그리고 사방이 적막해지고 나서야 자리를 비웠다. 오늘도 밤새 곁을 지켜야 하니, 그녀도 뭔가 먹고 와야 했다. 그렇게 로지가 침실을 나서고 침실 안에 언제나 같은 고요가 드리워진 순간, 잠든 줄 알았던 클로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열에 실핏줄이 터져 엉망이 된 눈은, 빈말로도 예쁘진 않았으나 형형한 눈빛만은 일품이었다.

“…….”

은쟁반에 배신자의 수급을……. 의사가 진찰을 마칠 때쯤 클로이는 반쯤 정신이 들어있었다. 마치 마음의 병인 양 하던 의사의 말에 부끄럽다 못해 수치심이 일어 눈을 뜰 수 없었을 뿐이었다. 마음의 병은 무슨. 낮엔 로지가 부리고 밤엔 레이얼이 부리는 이 생활이 얼마나 극한인데 마음의 병같은 한가한 소리를 한담! 이건 누가 봐도 몸살이지! 이 돌팔이 같으니라고. 클로이는 로지가 오기 전에 다시 잠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약기운이 슬슬 돌아서인지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기만 했다. 덕분에 혼자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벌어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클로이는 이번 일로 제 처지를 보다 명확하게 깨달았다. 에반에 이어 로지까지. 그녀는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됐다. 대외적으로는 아르네를 위해서, 대내적으로는 가신들의 반역를 막기 위해서. 아버지가, 아르네 공작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아르네로 버텨야만 했다.

“그러니까 자자.”

클로이는 열 오른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푹 자고 얼른 일어나자고. 아르네를 지키려면, 앞으론 두 번 다시 이런 약한 꼴을 보여선 안 되니까. 무엇보다 그, 시오도르가 이런 식의 유예를 또 허락할 리 없다. ……생각해보니 이거 몸살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밤마다 팔자에도 없는 도둑놈이 되어 온 수도를 뛰어다녀야 했다고! 제국의 하나뿐인 공녀인 내가!

“아아…….”

이거 그냥 열이 아니라 열불이 솟는 거였나. 몸을 모로 뉘며 클로이가 이를 북북 갈았다. * * * 아슬아슬한 평화는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깨졌다.

“아버지, 룻거 진영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전령이?”

“네,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어디 있지?”

“간이막사로 일단 보내놨습니다.”

“가보지.”

아르네 공작은 전령이 왔다는 소리에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건 물어보지 않으십니까?”

“뭐 하러. 가서 들으면 되는 것을.”

공작은 엘리오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무슨 일로 왔을지 너나 나나 뻔히 아는 바가 아니더냐.”

엘리오는 공작의 말에 부인하지 않았다. 사흘을 예상했던 것에 비하면, 민란군은 꽤 오래 버텼다.

“마무리 짓는 대로 먼저 귀환할까요?”

“그게 좋겠지. 아무래도 클로이를 너무 오래 혼자 뒀어.”

“에반에게선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아하니, 무탈한 모양입니다.”

“당연히 무탈해야지. 공작저를 지키는 것이 아르네 기사단인데.”

“뭐…….”

“그리고, 클로이에게 일이 생기도록 에반과 로지가 가만두고 보지도 않을 테고.”

엘리오도 공작도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뒷머리가 당기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이 떨쳐지지가 않는다. 엘리오가 서둘러 먼저 귀택하려는 것도 그래서였다.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다면 차라리 클로이를 데려올 걸 그랬나 봐요.”

“…….”

실없는 소리라고 한마디 들을 줄 알았건만, 공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날이 지날수록 기묘한 불안이 더욱 커지는지라, 엘리오의 말에 슬쩍 회가 동했던 탓이었다.

“황궁 기사단에서 이탈자는 없고?”

“네. 산책하러 다니긴 하는데, 경계 너머로 함부로 진입하는 녀석은 없었습니다.”

“교전은 절대 안 돼. 자칫 황가가 제국민을 짓밟았다는 소리가 나올지도 몰라. 그랬다간 돌이킬 수 없어진다.”

“걱정 마세요. 수시로 확인하고 있으니까요.”

길지 않은 이야기였건만 그들은 어느샌가 간이막사 앞이었다.

“들어가시죠.”

엘리오가 손수 막사 천을 걷고, 아르네 공작이 들어섰다. 아르네 공작이 자리를 잡고 앉자 전령이 한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단정한 인사에 엘리오는 문득 입술을 길게 늘여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룻거 대장.”

담력이 아주 쓸만해 절로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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