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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 신경 쓰이는 레이디 (16/121)

016. 신경 쓰이는 레이디2020.10.27.

고막을 뭉근하게 녹이는 것 같은 달착지근한 목소리. 내쉬는 제 어머니지만, 저 목소리가 어릴 적부터 좋지 않았다. 듣고 있다 보면 머릿속까지 끈적거리는 기분이었다.

“내쉬, 내쉬.”

걸어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조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미간이 확, 접힐 뻔했지만 내쉬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이거 원. 내쉬만 봤다 하면 그대는 내가 눈에도 보이지 않나 봅니다.”

이 자리엔 황후만 있는 게 아니었다.

“폐하. 설마 아들에게 질투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더 신경 써주시려나?”

내쉬는 거침없이 모후의 허리를 감아 당기는 황제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 무척 애를 썼다.

“지금보다 더, 폐하께 신경을 쏟았다간 전 백치가 되고 말 거예요.”

“하시는 말씀마다 어쩌면 이렇게 예쁘신지.”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내쉬구나.”

의례적인 인사와 형식적인 환대. 황제와 내쉬의 관계는 딱 그 정도였다.

“아이, 참. 둘 다 서먹하게.”

그것을 못 견뎌 하는 건 캐서린뿐이었다.

“남도 아니고. 응?”

그의 손을 더듬어 쥐는 희고 고운 손은 뼈마디도 없는 듯 보드랍기만 했다. 하지만 내쉬는 캐서린이 이렇게 손을 쥐어 끌어 당길 때마다 있지도 않은 목줄을 차고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폐하께서 정말 어렵게 시간을 내주셨단다. 내쉬.”

“감사합니다. 폐하.”

“요즘, 골치 아픈 문제가 있어서 여간 바쁘신 게 아니야.”

내쉬의 감사 인사가 성에 차지 않았던지, 캐서린이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줘 꽉 잡았다. 어렵게 마련한 자리이니 어떻게든 황제의 환심을 샀으면 하는 바람이 그의 손을 저릿하게 한다. 캐서린에게 잡혀 하얗게 변한 제 손끝을 바라보던 내쉬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쥐새끼 한 마리가 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정말 그 녀석이 유명하긴 한가 보군? 레이디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듯 황제는 유쾌한 음성으로 웃음을 터트렸으나, 그의 눈동자에 어린 것은 확연한 짜증이었다. 그 모습에 놀란 캐서린이 그를 달래보기라도 할 듯 서둘러 손을 뻗어 황제를 붙들었다. 내쉬에게 하듯 고운 손이 황제의 손을 감아쥐는 것과 동시에 상체가 자연스럽게 밀착한다.

“폐하. 이제 그만, 식사를 내오라고 할까요?”

“귀엽긴.”

“폐하.”

“내쉬.”

조금 전까지 황제에게 어떻게든 말 한마디라도 더 붙여보라고 채근하던 캐서린이, 내쉬의 말을 잘랐다. 황제에겐 보이지 않게 살짝 고개를 틀어 굳은 얼굴로 경고를 하는 것까지 완벽했다. 하지만, 내쉬는 그런 캐서린을 향해 제 어미가 잘하는 다디단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다른 ‘레이디’에게 관심을 쏟으시면, 어머니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허어?”

“내쉬!”

전에 없이 능글맞은 소리에, 황제와 황후에게서 각기 다른 반응이 나왔다. 황제는 내쉬가 갑자기 살갑게 구는 꼴이 의아했고 캐서린은 자칫 황제에게 밉보일까 봐 펄쩍 뛸 만큼 놀라버린 것이다. 황제는 캐서린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제 아름다운 황후가 단지 다른 이의 입에 오르는 것조차도 질투했다. 실로 놀라운 집착이었다. 아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캐서린은 황제의 눈치를 살피느라 내쉬를 낳아놓고 제대로 안아본 적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런데, 감히 황제의 앞에서 그녀를 들먹이다니. 캐서린은 얼음물을 뒤집어 쓴 듯 차게 얼어버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를 슬프게 하지 말아주세요. 폐하.”

황제는 내쉬의 말에 이렇다 할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턱 끝을 문질렀다.

“그럼 손 놓고 있으란 말이냐?”

“폐하께서 굳이 직접 나서야 할 필요는 없으시지요.”

“그럼……?”

“형님은 유능하고 충직한 사람이지요.”

“내쉬, 내쉬.”

캐서린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레이디’가 제아무리 화려하게 이목을 끌었다지만 평생을 저렇게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을 린 없다. 그녀도 언젠간 붙잡힌다는 뜻이었다.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세상에 나오기만 한다면야, 기어이 잡힐 것이다. 이건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 싸움의 개념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위명이 쟁쟁한 것을 다른 이도 아닌 ‘레이얼’에게 주라니? 레이얼이 레이디를 잡아들이고 나면, 그의 지지도가 얼마나 견고해질 것인가. 어쩜 이렇게 머저리 같은 제안을 할 수가 있나! 캐서린은 내쉬의 말에 절로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이건, 막아야 해!

“폐하, 내쉬가 어미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나쳐 그만 헛소…….”

“나쁘지 않은 생각이구나. 고려해보지.”

아아……. 황제의 허락에 캐서린에게선 소리 없는 신음이 터졌다. 지금 제가 뭔 짓을 한 줄도 모르고 그저 어여쁘게 웃는 내쉬를 보자니, 캐서린은 정말로 크게 울고 싶었다.

“내쉬가 이제 제법 영리해지는군요.”

“그, 렇지요? 다 폐하를 닮아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런. 그럼 예쁜 소리만 골라 하는 것은 그럼, 황후를 닮아서인가요?”

예쁜 소리라니! 황제의 말에 캐서린은 눈에서 불이 튈 것 같았지만 최선을 다해 참으며 웃었다.

“이제 정말로 식사를 들이라 해야겠어요. 폐하께 올리려고 준비한 음식이 식으면 안 되잖아요.”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캐서린은 너무도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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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표정은 뭐지?”

“와……. 클로이 아가씨. 정말…….”

에반은 침대에 누워 있는 클로이에게 다가오다 흠칫하더니, 괜히 멀쩡한 모노클을 수습했다.

“뭐야. 왜.”

밤사이 끙끙 앓아 클로이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정말이지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에반도 잘 아는 눈치였다.

“정말 아파 보이시네요…….”

눈밑이 새카매서 달려온 꼴이, 살만 해 보이면 서류작업을 들이밀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던 걸까. 하얀 장갑을 낀 그의 손엔 정체불명의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아파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아파.”

목소린 이제 쉬다 못해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제가 들어도 쉿쉿거리는 소리였건만 신기하게도 에반은 용케 알아들었다. 덕분에 기묘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왜, 왔어?”

“그냥. 뭐. 문병이지요.”

“퍽이나.”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목이 좀 괜찮으시면 곧, 과로사할 제게 위로라도 한 말씀?”

“힘내. 에반.”

“확실히 아가씨께서 아프시니까 재미가 없네요.”

저벅. 순순한 모습에 말 그대로 재미가 떨어진 듯 에반은 클로이를 놀리는 대신 침대 맡으로 다가와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내리깐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에반은 좀 오랜만이다. 클로이가 아주 어릴 적, 막 공작가에 들어왔을 때 그는 잠깐 저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공작이 에반을 ‘집사’라고 클로이를 불러 소개하던 날 이후론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집사가 된 그는 어린 클로이에게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고 공손히 말했고, 실수로라도 내려다보는 일은 만들지 않았다.

“공녀님.”

“응.”

“힘드세요?”

아, 우는 소리가 아니잖아. 클로이는 이번에야말로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는 집사가 된 후로 언제나 선량하고 온건한 태도로 클로이를 대했다. 적어도 클로이에겐 말이다. 그러나 힘드냐 묻는 지금 에반의 표정은 무척 냉엄하고 무감하기 짝이 없었다. 저건 제 오빠나 아버지와 이야기할 때나 보여주던 표정이다. ‘짐’을 지고 있는 아르네에게만 내보이던 바로 그, 날선 표정. 그러니 에반이 갑자기 클로이를 아가씨가 아닌 아르네로 대한다면 당연히 긴장되는 게 맞다. 클로이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며 입을 열었다.

“금방 나을 거야. 며칠이면 돼.”

“원하신다면, 제가-.”

“며칠이라고.”

들으면 안 된다. 알아들은 척도 안 된다. 본능이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고작 말 몇 마디에 힘에 부쳐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으나, 클로이는 최선을 다해 버텼다. 이건 그러니까 ‘얼씨구나’인 모양이었다. 한계에 다다른 집사가 눈이 돌아간 걸까. 이런 건 곤란하다. 물론 마음 같아서야 클로이도 에반의 말에 눈 딱 감고 그가 바라는 대답을,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르네’였다. 긍지와 자부심으로 사는 아르네. 제아무리 시오도르가 한심해도, 절대 먼저 손을 놔선 안 되는 아르네. 그리고 가주가 돌아올 때까지 ‘아르네’를 지켜야 하는 아르네. 그러니 지금 저 말은 자신은 알아듣지 못했고, 설명하도록 두지도 않을 셈이었다.

“너무 억울해하지마 에반.”

“…….”

“로지가 빨리 나으라고 밤낮없이 얼마나 약을 퍼먹이는지 몰라.”

“아가씬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몸이 단단해지려면 한번 호되게 앓기도 하는 법이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말 끝에 클로이는 웃어 보였다. 덕분에 바짝 마른 입술이 툭, 소리를 내며 터지긴 했지만 클로이는 만족했다. 잘 벼린 칼날처럼 무섭게 번뜩이던 에반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가셨다.

“그렇군요.”

“그렇지.”

“그럼, 부디 이 며칠의 유예를 마음껏 즐기세요. 아가씨.”

흑흑. 그동안 이 가련한 에반은 죽어가겠지만요. 덧붙이는 말은 혼잣말인 듯 처량하기 짝이 없었으나 클로이는 크게 웃어주었다. 우는 척 하는 그의 눈은 평상시처럼 부드럽게 처져 있었고 입은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으니까. 언제나 같은, 그러나 예전과는 조금은 다른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짹짹. 창밖에서 울리는 작은 새소리며,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풍경까지 모든 것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정작 그 풍경을 두른 레이얼의 표정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주름이 선명히 잡힌 미간. 희다 못해 창백해 보이는 안색. 굳이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지 않아도 그의 상태는 퍽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디 안 좋으세요?”

그의 보좌관 키릭슨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슬쩍 차를 한잔 내려놓았다. 오전 회의에서 돌아온 후 종일 레이얼은 이런 식이었다. 늘 과로하고 있었으나 오늘같이 피곤한 기색은 처음이었다.

“의사를 불러올까요?”

“아니야.”

“안색이 몹시 나쁩니다.”

“괜찮아.”

키릭슨의 시선이 레이얼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예법선생의 명단과 그녀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인가 내주어야 할 서류며, 수도 경비대에서 올라온 보고서 및 데르반 남작이 받았던 ‘레이디’의 친필 서신. 책상 위에 모든 종이는 하나같이 ‘레이디’와 관련된 것이었다. 며칠 전, 증세안과 민란에 관한 서류로만 가득하여 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하긴 이 정도면 골머리가 아플 만도 하지.

“아아, 레이디 때문이시군요?”

“……뭐?”

화들짝 놀라는 레이얼의 모습에 키릭슨까지 덩달아 놀라고 말았다.

“하긴 이 정도면 신경 안 쓰이는 게 이상하겠습니다.”

“신경 쓰일 만하다고?”

“그럼요. 이 서류 좀 보십시오. 어후.”

키릭슨의 말에 굳었던 레이얼의 얼굴 위로 파란이 스친다. 얄팍한 살얼음이 산산이 깨지고 푸른 호수가 드러나듯 조각 같기만 하던 얼굴에 생기가 훅 끼쳐 아름답게 반짝인다.

“그래. 맞아. 정말 신경 쓰이는군, 레이디.”

레이디를 입에 올리는 레이얼은 어딘지 후련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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