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이 나쁜 놈아!2020.10.23.
“뭐 하는 짓이야!”
깜짝 놀란 레이얼이 제게 날아든 클로이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커다란 손아귀에 잡히자, 아무리 힘을 써도 클로이는 손을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이 나쁜 놈이!”
“로이! 나다. 정신차려라!”
“이 나쁜 놈아 감히!”
“정신 차려! 달이 졌어.”
“달이 진 게 나랑 무슨 상관…… 달이 졌다고?”
변태 녀석을 혼내주겠다는 생각이 단번에 기화했다. 기시감 드는 상황에 클로이는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머, 멀쩡한 달이 왜?”
“……잠들었잖나.”
“내가?”
레이얼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의 침묵은 긍정임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왜, 왜 안 깨웠어.”
“노력했다. 일루미넴을 먹고 잠들어서 그런지 깨우기가 정말 힘들더군.”
“부르면 되잖아!”
“맘껏 소리지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불을 손가락으로 툭 치며 웃는 레이얼의 모습에 클로이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뒤집어쓴 이불, 귓바퀴를 스칠 만큼 바짝 붙어 있던 그의 입술은 잠을 깨우기 위해서였던 거다! 클로이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아아, 미안해. 전하. 하지만 나도 놀랐……!”
목덜미까지 화끈 달아오른 로이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더니 나직이 부르짖었다.
“데이번 남작가!”
“데이번을 찾는 걸 보니 이제 정말 잠이 다 깼나 본데?”
“나 간다!”
“잠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로이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려 했으나, 그녀를 붙드는 레이얼이 한 발 빨랐다. 턱, 소리와 함께 손목이 잡히면서 반동에 몸이 휘청였다.
“놔! 빨리 가지 않으면!”
“서신은 보내놨어. 진정해.”
신경질적으로 손을 탈탈 털어대던 로이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보냈다고?”
“보냈어.”
어쩔 줄 몰라하던 모습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힘이 들어가 뻣뻣하던 손목이 부드럽게 늘어지고, 크게 뜨였던 눈이 제모습을 되찾는다.
“아, 진짜 놀랐다.”
말 끝에 생긋 웃는 로이의 모습을 보던 레이얼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같고, 뜨끔한 것도 같았다.
“전하?”
갑작스레 안색을 굳힌 모습에 놀란 듯 클로이가 한발 다가섰으나 레이얼은 오히려 쥐고 있던 손을 놓으며 그녀를 밀었다.
“오라는 뜻은 아니었다.”
“뭐?”
“어서 가거라. 곧 해가 뜬다.”
레이얼은 다가오는 그녀를 저지하듯 손을 뻗었다.
“허?”
곧게 뻗은 손에서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긴 클로이가 씰룩, 입술을 비틀었다.
“뭐 그렇게 질색한담. 무안하게. 간다 가! 열흘 뒤에 보자고 전하.”
“일주일 후에.”
“……네네. 그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로이는 훌쩍 사라졌으나, 레이얼은 해가 뜨도록 굳은 채였다. 어째서인지 울렁거림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두 번째여서일까. 자신의 웃는 얼굴을 보고 질색하는 레이얼을 보고도 기분이 그렇게 더럽지 않다.
“나원 참, 적응할 게 없어서 이런 거에 익숙해진담?”
날 듯이 달리던 와중에 클로이가 이제는 훌쩍 멀어진 황궁을 향해 눈을 흘겼다.
“잘 지내라 빌어먹을 시오도르!”
희붐한 새벽 공기를 가르고 달리던 클로이의 가운뎃손가락이 꼿꼿하게 일어섰다. 하지만 씩씩거리던 것도 잠시, 클로이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필사적으로 달렸다. 동이 트고 있었다! 로지는 자신이 당연히 자고 있을 줄 알 테니, 한시바삐 돌아가야 했다. 자다 일어나서일까, 정신이 맑지 못하다.
“가지가지한다. 진짜.”
혀를 쯧, 하고 찬 클로이가 땅을 박차며 뛰기 시작했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타운 하우스의 거리를 울리는 달음박질 소리가 요란했다. . . .
“헉, 헉. 진짜.”
클로이는 제 방 테라스로 기어들며 숨을 헐떡였다.
“나만큼 기구한 공녀가 있나. 허억.”
클로이는 제국의 하나뿐인 공녀로 캐서린 황후 다음으로 이 제국에서 고귀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매일 밤 뛰고, 구르다니? 심지어 도둑질도 한다. 잠깐이지만 ‘대체 어쩌다 내가 이 지경이 된 걸까?’ 의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충격은 충격이고, 급한 건 급한 거였다. 클로이는 허덕거리는 와중에도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씻어 땀냄새를 지웠다. 침대에 기어 들어가 눕자 그제야 안도감에 한숨이 터진다.
“살았다…….”
보드라운 이불을 끌어안고 중얼거리는 클로이는 잔뜩 지쳐 있었다. 감각은 여전히 멀었으나, 몸이 가라앉는 기분이 여실했다. 아마도 긴장이 풀리는 것이리라. 클로이는 희붐하게 밝아오는 창밖을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굉장한 밤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 그럴 테지. 곧, 아침 시중을 들러 로지가 오겠지……? 모로 누워 밝아오는 창을 보는 클로이의 눈이 조금 전보다 몽롱하게 풀렸다.
“하암…….”
작은 하품이 울리길 서너 번. 클로이가 눈이 감긴다고 생각할 때쯤 로지가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응?”
한 번에 눈떴는데 로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제대로 미간을 구긴 모습에 클로이는 뜨끔하고 말았다. 설마, 어젯밤에 나갔다 온 거 들켰나? 사냥복도 잘 챙겨두고, 땀 냄새도 지웠는데!
“……세요?”
클로이의 생각은 로지의 말에 뚝, 잘렸다.
“어? 뭐?”
그런데 목소리가 이상하다. 잠깐 사이 푹 잠겨 잔뜩 쉰 소리가 난다. 막,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자버린 건가? 매우 합당한 의심을 하며 클로이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로지가 다가와 어깨를 누르는 게 먼저였다.
“어어?”
“일어나지 마세요.”
“다친 건 발목이고 내 허린 멀쩡해.”
“무슨 말씀이세요.”
“서류 누워서 못 본다는 소리야.”
“……진짜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갑자기 로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클로이는 로지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열이 펄펄 끓는데 서류는 무슨 서류예요!”
“내가?”
“열이 나면 헛소리 좀 할 수 있겠지만, 너무 반듯해서 기가 차네요.”
열이라니……? 고개를 갸웃거리던 클로이는 문득, 제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떠올렸다. 일루미넴! 아직 약효가 반나절이 남았다. 도통 감각이 없으니 제 상태가 어떤지 알 수가 있나. 그제야 클로이는 푹 잠기다 못해 쇳소리를 내는 목소리를 이해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지?”
“갑자기 왜 이러긴요. 너무 한 번에 몸을 푸니까 무리 갔나 보죠.”
팩팩거리는 말투지만, 이불을 다독이고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주는 로지는 몹시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절로 가슴이 철렁해지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클로이는 부러 목청을 높였다.
“로지. 제1사냥꾼인 나를 뭐로 보고? 겨우 몸 푸는 정도에.”
“그럼 뭐예요? 매일 밤 나들이 때문인가요?”
“아니지, 지혜열 아니겠어? 내가 어제 얼마나 열심히 서류를 봤는지 알잖아.”
말하다 보니 그럴싸하다.
“지혜열이요?”
“그렇지 지혜열. 아아. 그러고 보니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픈 것 같아. 의사를 불러줘. 로지.”
클로이는 아프지도 않은 머리를 움켜쥐고 앓는 소리였다.
“콜록, 콜록. 아, 나 아파. 엄청 아파.”
억지 기침도 잊지 않았다.
“그래요. 지혜열 나는 우리 아가씨. 의사 불러올 테니 그때까지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결국, 로지는 걱정하던 것도 잊고 혀를 쯧쯧차며 자리를 비웠다. 그런데 아프다 소리를 들어서였을까. 괜히 눈뜨기도 버겁고 몸이 축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아……. 이거 밤이 두려운데.”
일루미넴 효과가 똑 떨어지면 지옥문이 벌컥 열린다든가 하는 건 아니겠지? 중얼거리다 보니, 진짜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 가슴이 철렁한다. 하지만 심각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후회는 과거에 매여 있었고, 걱정은 오지 않는 미래와 함께였다. 그래서 클로이는 항상 ‘지금’을 충실히 살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몰라. 뭐 많이 아프면 이따 밤에 또 먹지 뭐.”
이불을 끌어다 덮으며 눈을 끔벅이던 클로이는 로지를 기다리다 그대로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밤이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팠다. 너무 아파 일루미넴을 가지러 갈 힘도 없어 클로이는 누운 채로 눈물만 줄줄 흘렸다. 열이 너무 올라 절로 터지는 생리적인 눈물이었다.
“아가씨 어쩌죠? 안 좋은 소식이에요.”
“뭔데?”
오전보다 훨씬 나빠진 목소리는 쇳조각을 긁는 것처럼 끔찍했다.
“미안하지만, 지혜열이 아니래요.”
이마에 올린 물수건을 갈아주며 건네는 로지의 말이 퍽, 장난스러웠다. 눈앞이 어룽어룽해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말과 달리 또 한껏 걱정하는 표정이겠지.
“발목이 잘못됐나 봐요. 그날 바로 의원을 불렀어야 했는데. 제 잘못이에요.”
“그게, 왜 로지 잘못이야.”
“제 잘못이죠.”
“덜렁거린 내…… 잘못이지.”
입안이 바싹 말라 자꾸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며칠 쉬면 괜찮아.”
“그럼요. 며칠 쉬고 나면 금방 자리 털고 일어나실 거예요.”
“으응. 그런데 서류는 어떻게 하지?”
“급한 대로 에반이 처리하고 있어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세요.”
“그……래? 그래.”
클로이는 로지의 말에 활짝 웃어주었다. 사실 제대로 웃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쁜 건 진심이었다.
‘서류는 안녕이구나!’
정말이지 완벽한 진심이었다. 그랬기에 고열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클로이는 웃었다. 에반이 죽어 나가겠지만 알 바 아니었다.
앓아누운 클로이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나 수도는 ‘레이디’의 일로 난리 아닌 난리가 나 있었다.
“바쁜 일이라니?”
“그러게, 하루가 멀다고 귀족가를 털어대던 녀석이 바쁘다고 말할 정도면, 진짜 무슨 큰일을 꾸미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큰일이라면……?”
사람들이 둘 이상만 모이면 수군거리기 바빴다. 황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 정례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던 이들이 또, 수군거리는 모습에 내쉬의 입매가 비틀렸다.
“흥. 겁먹은 개도 아니고. 눈만 마주치면 낑낑거리는 꼬락서니라니.”
“황자님.”
옆에 선 시종이 사방으로 눈치를 살피며 그를 불렀으나 내쉬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목청을 높였다.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네가 봐도 그렇잖아?”
쨍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단박에 사방에서 이목이 쏠렸다. 그러나 내쉬는 고개를 돌리거나 얼버무리는 대신 느릿하게 시선을 굴려 사람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었다.
“모여서 낑낑낑.”
빈정거림과 달리 고개를 슬쩍 기울여 웃는 그는 몹시 달콤한 표정이었다. 마치 그들이 착각이라도 했을 법한 얼굴에 일순,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새소리도 딱 멎어버리고 사방이 멈춰버린 것 같은 숨 막히는 고요에 휩싸였다.
“내쉬 황자님.”
보다 못한 시종이 쥐어 짜낸 용기로 그를 부르는 것으로 숨 막히는 침묵이 깨졌다.
“크흠!”
누군가는 헛기침하며 몸을 돌렸고, 누군가는 얼굴이 벌게져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중 누구도 내쉬에게 자신을 ‘개’라 부른 무례에 대해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내쉬 시오도르는 황제가 사랑해 마지 않는 캐서린 황후가 낳은 황자이자 곧 차기 황태자 감으로 점쳐지는 인사였으니까. 이를테면, 황제 다음으로 눈치를 살펴야 할 귀한 분이셨다.
“꼬리를 마는 것까지 완벽하지 않아?”
“화, 황자님!”
키들거리며 쏟아내는 독한 빈정거림에 얼굴이 까맣게 죽어버린 시종이 벌벌 떨었다.
“왜 이렇게 불러대? 그러고 보니 넌 어머니를 닮았어. 내쉬, 내쉬. 황자님, 황자님. 정말 지겹도록 사람을 불러댄다니깐.”
“제발, 황자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후를 들먹이다니, 가여운 시종은 얼굴이 푸르게 질리게 말았다.
“그만 불러. 너 아니라도 숨넘어가게 부르는 사람 있으니까.”
어깨를 으쓱이는 내쉬가 향한 곳은 황후궁. 한걸음 내딛자마자 황후가 목청을 높였다.
“내쉬! 내쉬! 우리 황자님 오셨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