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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 한 이불 아래서 (14/121)

014. 한 이불 아래서2020.10.20.

레이얼이 활을 구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클로이는 펜을 들어 남작에게 편지를 썼다. ‘데이번 남작. 당일 약속을 취소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다급한 사정이 생겨 이렇게 서신을 보내오.’ 편지를 써내리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이런 류의 편지를 쓰는 건 클로이에게 일도 아니었다. 사실 ‘공녀’로 편지를 쓸 때는 이보다 더 귀찮았다. 오늘 날씨부터 시작해서 온갖 미사여구를 다 끌어다 써야 했기에 정말 머리를 쥐어짜 내야 했다. 하지만 ‘레이디’가 쓰는 편지는 거의 메모 수준이라 오히려 편하다고 해야 하나. 클로이는 턱을 괴고선 슬슬 펜을 놀렸다.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꽤 듣기 좋다. 중간중간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리는 것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공기는 따끈했고, 사방은 고요하고도 평화롭다.

“하아암.”

편지를 쓰는 클로이의 자세가 조금씩 늘어지며 눈꺼풀이 게으르게 끔뻑인다. ‘……해서, 방문을 열흘 뒤로 미루고자 하오. 부디 만날 날까지…….’ 툭. 펜을 놀리는 손이 느려지나 싶더니 느슨하게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펜대가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감긴 눈은 뜨이지 않았다. * * *

“로이, 일단 숏보우로 가져왔는…….”

비밀통로를 빠져나오던 레이얼의 눈이 홉뜨였다. 조금 전까지 재잘거리던 로이가 탁자에 쓰러져 있었다. 탁자 위로 힘없이 늘어진 가는 팔, 모로 꺾인 고개. 레이얼은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로이……?”

활도 집어 던지고 레이얼은 한달음에 로이에게 달려갔다.

“이게 무슨! 로이? 로이!”

쓰러진 로이를 황급히 일으키던 레이얼은 흠칫했다. 덜렁 들리는 몸이, 성인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그의 팔에 안겨 고개를 꺾은 로이는 무척 가냘프고, 몹시 무방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언제나 눈을 빛내며 개구지게 웃던 로이만 알던 레이얼에게 이런 로이는 무척 낯설었다.

“……로이?”

탁탁. 뺨을 가볍게 두드려보았으나 여전히 로이는 반응이 없었다. 레이얼은 재빠르게 로이의 호흡과 맥박을 확인했다. 호흡도 일정하고 맥박과 체온도 정상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놓친 것은 없는지, 다시 한번 천천히 로이를 살피던 그때였다. 새액. 희미하지만 길게 늘어지는 숨소리가 그의 귀에 잡혔다.

“……로이?”

새액.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길게 끄는 숨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몹시 평온하고, 달게 울리는 소리가 무척 평화롭다.

“설마 잠들었다고?”

레이얼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로이를 다시 한번 살폈다. 조금 전엔 당황해서 무심히 넘겼던 것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처음 만났던 날보다 버석해진 피부, 바짝 도드라진 턱선. 감긴 두 눈 아래 짙게 드리워진 푸른 그림자.

‘본업이 바빠서.’

“아…….”

얼마 전, 해쓱하게 질린 낯으로 중얼거리던 로이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다치고 피곤해하며 왔다. 대체 넌 낮 동안 무얼 하는 거지? 기절하듯 곯아떨어진 로이를 보고 있자니, 장난스럽게 ‘위협’할 때나 들먹였던 호기심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로이.”

역시 미동도 없다. 뭘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 진짜 이름은 무언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알아내지 않겠다고 약속도 했다. 하지만, 자꾸 궁금해진다.

“로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얼굴만이라도. 누군가가 못되게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살짝만. 잠깐만. 마치 홀린 듯 손을 뻗어 막, 복면을 벗겨내려던 순간이었다.

‘나도 신뢰를 얻어내도록 전력을 다하마.’

로이에게 했던 맹세가 떠올라, 레이얼은 황급히 손을 거둬들였다. 알량한 호기심에 로이가 경멸해마지않는 비열한 시오도르가 될 뻔했다. 맙소사! 이 무슨 저열한 짓이지. 충격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가 정신을 차린 건 자정을 알리는 괘종시계 덕이었다.

“이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로이, 로이?”

레이얼은 기절하듯 잠든 로이를 살살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로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럴 수가 있나……? 한참 후, 레이얼은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길게 탄식했다.

“일루미넴!”

뺨을 두드리고 흔들어도 로이는 모를 테니 그녀를 깨우는 건 불가능하리라. 낭패였다.

  이미 자정을 넘어 으슥해진 새벽. 챙그랑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데이번 남작의 집무실 벽에 화살 한 대가 박혔다.

“레, 레, 레이디다!”

혼비백산한 남작이 화살을 가리키며 소리를 꽥 지르자, 호위기사들이 그를 감싸듯 촘촘히 둘러섰다.

“어디냐! 어디로 들어왔어?”

레이디가 지목한 것은 데이번 남작이 반년 전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푸른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지금은 그 가격이 경매 때보다도 정확히 다섯 배가 올랐다. 차마 헤아릴 수도 없는 값어치가 된 이 귀한 것을 빼앗길 수는 없다. 데이번 남작은 반지를 품고선 씩씩거렸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 빼앗기지 않을 테다!

“빨리 찾아봐! 어디야!”

한껏 긴장해 사방으로 호령을 하는 그에게 기사가 편지를 한 통 들고 왔다.

“남작님, 편지가 왔습니다.”

“뭐? 갑자기 무슨 편지야?”

“화살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때아닌 편지에 어리둥절해 하던 것도 잠시, 봉투에 레이디라고 쓰인 것을 발견한 남작의 표정을 이내 무섭게 굳었다.

“레이디?”

그의 한마디에 사방에서 다급히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요란했다. 찌익, 봉투를 찢어 황급히 편지를 읽던 남작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지금 날 더러 열흘이나 마음 졸이라 이거야?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남작은 길길이 날뛰었다. 보다 못한 기사단장이 그를 힘으로 끌어다 의자에 앉히도록, 남작은 어린아이처럼 발을 구르고 팔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었다.

“진정하십시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열흘이라니요?”

남작은 기사단장의 말에 넝마가 된 편지를 던지듯 넘겨주었다. 기사단장은 제 손에 들어온 꾸깃꾸깃한 종이를 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난 그의 표정은 미묘했다.

“일단, 오늘은 이만 주무십시오.”

“자라니? 레이디가 언제 올 줄 알고 잠을 자?”

“열흘 뒤 오겠다고 했으니, 그때 오겠지요. 그날을 위해 오늘은 쉬셔야 합니다.”

기사단장은 씩씩거리는 남작을 달래듯 좋은 목소리를 내주었다.

“속임수가 아니라고?”

“레이디가 단 한 번이라도 예고장을 어긴 적이 있었습니까?”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던 미약한 의심이, 확고한 한마디에 사라진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아 씩씩거리긴 했으나 남작은 기사단장이 권하는 대로 순순히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제까짓 게 일이 있으면 뭐 얼마나 있다고, 약속을 미뤄? 뭐, 미안해?”

가는 내내 툴툴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펄펄 뛰던 남작이 사라지자 부단장이, 기사단장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레이디가 바쁜 일이 있어 약속을 열흘 뒤로 미루겠다는군.”

“아아. 아?”

부단장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지금, 미룬다고 연락해왔다고요?”

“밤새 기다릴까 봐 연락한다고 써놨더군.”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부단장의 말에 기사단장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옅게 미간을 찌푸렸을 뿐. * * *

“……후.”

침실로 들어선 레이얼은 거친 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황궁에서 데이번 남작가까지 도합 왕복 한 시간을 달렸더니 호흡이 달리다 못해,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쌕쌕, 다급하게 터지는 숨 끝이 뜨겁고 비렸다.

“후, 후우.”

뚝. 오만하게 솟은 콧날을 타고 굵은 땀방울이 떨어진다. 대충 소매로 문질러 닦은 레이얼은 창밖을 힐긋 살폈다. 오면서도 한껏 기울었던 달은 이제 잠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말은 로이를 이제 어떻게 해서든 깨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산 넘어 산 이랬던가.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막막해진다.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데이번 남작의 일이야, 그가 대신 활을 날리는 것으로 수습할 수 있었지만 이건 도무지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이 밤 그가 직접 움직였던 것도 로이를 깨우지 못해서가 아니었나.

“후우…….”

밭은 숨을 고르며 레이얼은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로이는 그가 눕혀놓은 그대로였다. 작게 입술을 벌린 채 쌕쌕거리며 잠든 모습이 천진해 마음이 노곤하게 풀리던 것도 잠시였다. 레이얼은 로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몹시 난감했다. 곧 해가 뜨면 시종들이 몰려온다. 어디 숨겨놓을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구조상 불가능했다. 옷방도 침실도 누군가가 숨을 공간은 없었다. ‘암살’을 대비하기 위해 애초에 그렇게 지어진 공간이 아니던가. 그 말은 어떻게든 해가 뜨기 전 로이를 내보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절로 골치가 아파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그때.

“으응…….”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던 로이가 뒤척이기 시작했다.

“로이!”

레이얼은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로이! 로이! 일어나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알지만, 그는 계속 로이의 뺨을 두드리고 어깨를 흔들었다.

“로이!”

그렇게 얼마나 불렀을까. 뒤척이던 그대로 로이가 다시 잠든 듯 숨소리가 고요해졌다. 그러나 레이얼은 이대로 포기 할 수가 없었다. 두드려서 모르면, 불러서 깨워야지. 반드시 깨워야 한다. 레이얼은 이불을 끌어다 그대로 자신과 클로이를 감쌌다. 보기엔 이상할지 몰라도 소리가 새나가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 레이얼은 클로이의 귀에 대고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로이! 일어나라!”

“…….”

제 목소리가 밖에 들릴까 봐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데 로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일루미넴이 청각도 마비시켰나……? 그건 그냥 클로이의 잠귀가 어두워서였을 뿐이나, 사정을 알지 못하는 레이얼은 심각했다.

“일어나라!”

레이얼은 조금 더 바짝 붙어 소리를 질렀다.

“로이!”

불룩 솟았던 이불이 숙이는 그의 고개를 따라 점점 내려앉기 시작했다. 기어이 레이얼의 입술이 귓바퀴에 닿을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로이!”

궁지에 몰린 남자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불렀을 때, 클로이의 눈이 반짝 뜨였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이불을 두른 채 제 귓가에 숨을 몰아쉬는 레이얼을 봐버리고 말았다.

“이, 이 무슨!”

잠이 덜 깬 목소리가 경악으로 파르르 떨렸다.

“로이!”

레이얼은 클로이를 보며 몹시 달게 웃었으나, 클로이는 그럴 수 없었다. 조금 전 그가 자신을 부르며 귓바퀴를 입술로 쓰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나른한 날숨이 한껏 달아올라 지금도 목덜미를 달구고 있지 않나? 이, 이거 뭐야?

“전하.”

“그래 로이.”

클로이는 자신을 바라보며 달게 웃는 레이얼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변태 같은 놈이! 네가 지금 웃을 때야? 주먹이 야무지게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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