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오늘은 가지 마라2020.10.16.
이거 곤란한데. 자고 일어난 사이, 발목이 족히 두 배는 되게 부어버렸다. 클로이는 확연하게 차이나는 발을 바라보다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곤란하다 곤란해. 오늘은 지오넬 남작가를 털겠다고 예고까지 해두었는데.
“읏!”
혹시나 하고 기대를 품고 슬쩍 발목을 돌리자 진땀이 확 쏟아질 만큼 고통이 치민다.
“아, 이거 어쩌지.”
“……이런 식으로 꾀부리시는 거예요?”
있는 줄도 몰랐던 로지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더니 퉁퉁 부어오른 발목을 살피기 시작했다.
“발목, 돌려보세요.”
“뼈가 부러진 것 같진 않아.”
“해보세요.”
등골이 푹 젖을 만큼 아팠기에 움직이고 싶진 않았는데 로지의 표정이 꽤 단호했다. 클로이는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발을 돌려 보였다. 분명 이를 악무는 것 봤을 텐데도 로지는 충분히 만족할 만큼 지켜본 후에야 물러났다.
“다행히 뼈가 상한 건 아니네요.”
“내가 그렇다고 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괜찮다는 건 아니에요.”
로지는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내더니 능숙한 손길로 매주었다.
“적어도 일주일은 움직이면 안 되겠어요.”
“뭐?”
로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클로이에게 몹시 상냥하게 속삭여주었다.
“어차피 이정도면 아파서 걷지도 못할 테지만요.”
“어어, 잠깐만 그건 곤란한데?”
“걱정 마세요. 서류는 이쪽으로 옮겨다 드릴게요.”
“아니아니. 잠깐만 나 아프잖아?”
“손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지 뭐예요.”
심란해하는 클로이를 놀리듯, 로지는 보란 듯이 깡총거리는 걸음으로 침실을 나섰다.
“에반! 집무실로 사람 좀 보내주세요! 책상을 좀 날라야겠어요!”
심지어 목소리까지 통통 튀었다.
“아. 진짜 어쩌지.”
괴로운 건 남겨진 클로이뿐이었다. * * * 회의실은 적막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뿐. 평소라면 길롯 백작이 회의실을 헤집어 가며 목청을 돋웠겠지만, 그도 의제를 받아들고 얼굴만 구길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오늘의 의제는 귀족가 연쇄 털이범 레이디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레이디라는 괴상한 이름의 도둑을 알게 된 건 보름 전, 클랜트 남작저가 털리면서였다. 그때만 해도 다들 클랜트 남작저의 호위가 엉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레이디라는 이름을 쓰는 이 도둑은 클랜트 남작가를 시작으로 귀족가를 가리지 않고 털었다. 심지어 ‘그녀’는 예고도 했건만, 잡기는커녕 매번 뻔히 두 눈 뜨고 그녀가 전리품을 자랑하는 꼴을 보아야만 했다. 그뿐인가. 레이디는 도둑질을 하고 나면 그들을 놀리듯 빈민가에 금화며 보석을 뿌려댔다. 그 모습에 누군가는 그랬다. 최근 제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덩달아 흥분한 녀석이 ‘의적’ 흉내를 내며 날뛴다고 말이다. 괘씸했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아무리 사병을 늘리고 덫을 놓아도 레이디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어젯밤에는 여섯 번째로 지목당한 앙트레 백작 역시 ‘플레이엄’을 빼앗겼다는 소식이 수도에 파다하게 퍼졌다.
“…….”
앙트레 백작이 엉엉 울었다는 소리를 이 수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낱 도둑이라고 치부하기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제아무리 운이 좋다 한들 화살이며 날아드는 검을 모조리 피할 수 있는 게 말이 되나? 소리소문없이 잠입하는 게 운으로만 되는 것이었나? ‘운이 좋아서’라고 눈을 가리던 억지가 뚝 떨어지자,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확실한 겁니까?”
“여자를 여자라고 하지, 뭐라고 합니까?”
버럭 짜증을 내며 대꾸한 건 샤일로트 후작이었다. 레이디가 네 번째로 방문한 곳이었다.
“정말 단신이던가요?”
샤일로트 후작이 입을 열자 테이블 끝에 있던 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신이었습니다.”
“……혹시 체구가 비슷한 사람을 여럿 풀어둔 건 아니고요?”
마치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듯, 다시 질문이 울렸으나 샤일로트 후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아무렴 수십의 기사가 그것을 모를까 봐서요?”
오십의 기사가 도둑 하나를 못 잡았기에 샤일로트 후작가는 그 일로 한동안 조롱거리가 되었었다. 도둑 하나도 못 잡는 기사단이라며 샤일로트 후작가 기사단은 손가락질당했고, 샤일로트 후작은 제대로 된 기사도 하나 없다며 비웃음을 샀었다. 그날의 치욕에 샤일로트 후작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선 이를 아득바득 갈아댔다.
“단신이에요. 몸이 가볍고 키가 큰 편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귀족 예법에 밝습니다.”
“…….”
“대체 누가 가르친 건진 모르겠지만, 아주 제대로 가르쳤더군요.”
으득.
‘샤일로트 후작. 귀경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가오.’
꼿꼿하게 세워진 허리를 부드럽게 굽혀 건네던 인사. 그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감탄이 나올 법한 우아한 자태였다. 생각하니 괘씸해 절로 콧김이 거칠어진다.
“저……. 갑자기 든 생각입니다만.”
테이블 끝에서 손이 하나 올라왔다. 아까부터 누가 이러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일곱 번째 지목을 받은 데이번 자작이었다.
“예법 선생들을 일단 뒤져보면 어떨까요? 일단, 귀족가의 예법은 ‘배우기’ 전엔 제대로 알 수 없는 거니까. 반드시 어디선가 배웠을 겁니다.”
“그렇군요!”
내내 쥐죽은 듯 조용하던 길롯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수선을 떨었다.
“예법 선생이라고 해봐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모두 불러서 확인해보면 빠르겠습니다. 이들 중 누가 평민을 가르쳤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내내 적막하던 회의장이 웅성거리며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히려 함정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정도의 실력을 갖춘 이라면 길드에서도 은밀하게 키워냈을지도 모르죠.”
“그러다 놓치면 누가 책임 질겁니까?”
“책임이라니요!”
“자자, 진정들 하세요.”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고 눈치만 보던 사람들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떠들어댔다. 그중 가장 목청을 돋운 건 길롯 백작이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레이디가 다녀간 곳은 죄다 은밀히 길롯에게 줄을 대던 곳이었다. 클랜트만도 뼈가 아팠는데, 연이어 여섯을 털리고 나니 길롯은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상태였다.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실핏줄이 돋아 벌게진 눈으로 길롯이 버럭대며 목청을 높이던 순간이었다. 탁탁,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진정들 하시고.”
그들을 부른 건 내내 말이 없던 황태자였다.
“전하. 진정이라니요? 지금 그런 태평한 말씀 하실 때가 아닙니다.”
길롯은 레이얼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훈계조로 말을 꺼냈다.
“진정하게 백작.”
“전하! 지금-.”
“조용히 하라고 했네. 백작. 지금 그대가 내게 명령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길롯의 시선이 비어 있는 황제의 자리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제 편을 들어줄 황제의 부재가 몹시 못마땅한 듯 눈초리가 아주 사나웠다. 레이얼은 너무 뻔하게 읽히는 길롯의 속내에 코웃음을 쳤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그의 표정은 매끈하기만 했다.
“폐하께서도 이 일로 근심이 깊으시지. 하니, 황실에서 명령을 내리지. 지금 당장 수도의 ‘예법 선생’들을 모셔오게 말일세.”
“오! 황실에서 명령서를 내려주신다면야!”
레이얼의 한마디에 기껏 진정되는 것 같던 회의실 분위기가 다시 한껏 고조되었다. 앞다투어 소환해야 한다고 목에 핏대는 세웠으나 귀족가의 예법 선생을 할 정도면 콧대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들을 어떻게 불러들여야 하나 걱정했는데, 황가가 나서준다니.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중 유독 목청을 높이는 건 레이디가 다녀갔던 이들, 그리고 레이디가 곧 찾아가겠다고 지목한 이였다. 그들을 바라보는 레이얼의 눈초리가 잠깐, 서늘하게 빛을 뿌렸다.
일루미넴을 아껴둔 건 이럴 때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클로이는 한숨과 함께 일루미넴 세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하루 종일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도 발목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그나마 로지가 뜨거운 찜질을 해주어서 붓기는 제법 빠졌으나, 발을 디디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스민다. 능숙하게 ‘로이’의 복장을 챙겨입은 클로이는 약효가 돌길 기다리며 잠깐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손끝이 저릿해지는 느낌과 함께 발목의 고통 역시 희미해졌다.
“…….”
발목을 돌렸으나 아무런 느낌도 없다. 역시 굉장한 약이었다. 그러나 이건 치료제가 아니다. 몸을 이런 식으로 썼다간, 반드시 망가지고 만다. 시오도르에게 아쉬운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오늘 일이 끝나면 레이얼에게 며칠간 유예를 청해야 할 모양이었다.
“아, 모양 빠지게.”
어깨가 들썩이도록 한숨을 쉬던 것도 잠시, 클로이는 완벽하게 감각이 사라지자마자 황궁으로 움직였다. . . .
“전하, 나 한 열흘만 쉬어도 될까?”
“왜?”
클로이는 레이얼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그녀의 밤은 언제나 바빴기에 노닥거리며 말을 빙빙 돌릴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대뜸 바짓단을 걷어 올리는 모습에 레이얼이 기겁해 고개를 돌렸으나, 클로이는 그가 도망가게 두지 않았다.
“나 다쳤어.”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아니, 봐야지. 엄살 아니고 진짜라고 지금 확인시켜주는 거잖아.”
“말로 해도 충분하니 그만하렴.”
“제대로 좀 봐.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나 발목 엄청나게 부었단 말이야.”
“너…….”
먼 곳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하얀 발목에 떨어지나 싶더니 금방 떨어진다.
“봤어?”
레이얼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이 다리로…….”
“응?”
“어제 다친 건가?”
“아, 응.”
“어쩌다가.”
“앙트레 백작 놀리다가, 발을 좀 헛디뎠어.”
말을 하다 보니 어제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울던 앙트레 백작이 생각나, 클로이는 작게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백작의 우는 얼굴이 정말 웃겼거든.”
“…….”
“전하도 봤어야 했는데. 기사들 뒤에서 소리 지르다가 내가 ‘고맙게 받아가지!’라고 플레이엄을 보여주니까 펑펑 울더라고.”
쏘아보는 것 같은 시선에 멋쩍어진 클로이가 ‘진짜 웃겼는데.’라고 작게 웅얼거렸다.
“여기는 어떻게 온 거지? 걷기도 벅차 보이는데?”
“저번에 일루미넴 남은 거.”
“남았다고?”
“그때. 두어 번 약을 줄여 먹었잖아. 그때 남긴 거 오늘 썼어.”
“오늘은 가지 마라.”
클로이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오늘 예고도 해놨는데 어떻게 안 가?”
“못 가겠다고 연락해.”
“……나랑 그 댁이랑 서신을 주고받는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연락을 해?”
“서신이라니……. 암살자다운 방법은 없겠어?”
어이가 없는 건 클로이였는데, 어째서 레이얼이 눈총을 쏘는 걸까. 기가 막혔으나, 오늘 레이얼은 기분이 정말 안 좋아 보였다. 클로이는 평소처럼 따지는 대신 입을 꾹 다물고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암살자답게라……. 그 순간 로지가 투덜거리던 게 떠올랐다.
‘클로브스 독이 든 병을 집어 던지더라고요.’
“전하, 혹시 활 같은 거 있어?”
“활은 왜?”
“남작에게 서신을 보내려고. 난 그저 그런 암살자가 아니라 ‘레이디’니까.”
클로이는 손을 척, 내밀며 웃었다.
“빨리 줘.”
까딱까딱 하얀 손가락이 잔망스럽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