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호기심보다 더한 집착2020.10.13.
“도둑이다!!!”
“잡아랏!”
“활을 쏴! 사살해도 좋다!”
“절대 놓쳐선 안 된다! 놈이 플레이엄을 가져갔다! 반드시 잡아야 해!”
“지붕에 있습니다!”
클로이는 왁자지껄한 발아래를 보며, 작게 코웃음을 쳤다.
“사살 같은 소리 하네.”
그녀가 앙트레 백작 저에 잠입해 살아있는 불꽃이라 불리는 보석 ‘플레이엄’이 박힌 10캐럿짜리 목걸이를 챙겨 나오도록 아무도 몰랐다. 이렇게 모여 떠드는 것도, 그녀가 5층 지붕에서 소리 질러 모두를 불러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레이디,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앙트레 백작, 그대의 원대한 포부는 잘 들었소. 귀공의 건투를 빌지.”
기사를 네 겹으로 두르고 뻑뻑 소리 지르는 살집 좋은 중년 남자에게 클로이는 모자를 벗는 시늉을 하며 과장되게 허리를 굽혔다. 클로이의 동작은 절도 있고 우아했지만, 그것이 조롱임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쏴라. 쏴!! 당장 저 도둑놈을 잡아!! 쏴 버려!”
앙트레 백작은 클로이의 인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도 앙트레 백작은 기사들의 뒤에 숨은 채였다. 비겁한 백작의 모습에 클로이의 한여름을 닮은 푸르고 맑은 눈동자에 옅은 혐오가 떠오르던 것도 잠시. 공기를 가르는 날 선 소리에 그녀의 시선이 돌아갔다. 피잉. 화살이었다. 첫발을 시작으로 그야말로 화살 비가 쏟아졌다. 그러나 클로이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백작의 명대로 그녀를 과녁 삼아 활을 당기기 시작했으나, 태반이 그녀의 발치도 스치지 못하고 떨어졌다. 클로이는 가까스로 지붕 끝을 스치고 떨어지는 화살을 바라보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멍청하긴, 목표점보다 더 높이 쏴야지.”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을 확인한 클로이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달이 기울었다. 쇼는 끝났고,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달칵, 달칵. 가벼운 발걸음에 지붕에 올려진 얄팍한 기왓장이 서로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달칵거리던 소리는 어느새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에 탁탁, 거리는 소리로 바뀌었고. 어느샌가 클로이는 까마득한 지붕 위를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레이디가 도망친다! 놓치지 마라! 쏘란 말이야!”
“서쪽 끝이다!”
“이 멍청이들아 빨리 잡아! 칼이라도 던져!”
악에 받친 앙트레 백작의 말에 경쾌하던 클로이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백작의 목소리를 듣자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었다.
“앙트레 백작.”
“왜 이 도둑놈아!”
클로이는 품에 넣어둔 ‘플레이엄’을 꺼내 부드럽게 흔들었다.
“선물은 고맙게 받아가오.”
“뒈져버려라!! 이 나쁜 놈아! 벼락 맞아라!”
허공에서 붉게 타오르는 광채에 앙트레 백작은 결국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럼, 다시 뵙길 고대하겠소!”
“죽어버려라!! 죽어! 죽어버려!!”
악에 받친 소리에 깔깔거리는 낭랑한 웃음소리가 뒤섞이는 것과 동시에 지붕 끝에서 클로이의 신형이 훅, 꺼지듯 사라졌다.
“죽어버려라! 레이디!”
언제나 그렇듯 ‘레이디’는 예고대로 플레이엄을 가지고 가버렸고 앙트레 백작저엔 ‘플레이엄’을 도둑맞은 백작의 울음소리만이 남았다. 레이디의 여섯 번째 나들이였다.
“허윽. 발목 부러지는 줄 알았네.”
앙트레 백작을 놀리는 재미에 정신이 팔려 착지가 흔들리며 발목이 제대로 꺾였다. 그 상태로 빈민가에 들러 금화도 뿌리고 왔으니 발목이 아프다 못해 부러질 것 같았다.
“후.”
더는 걷을 수도 없어 클로이는 시큰거리는 발목을 감싸 쥐고 재빨리 품을 뒤졌다. 절로 이가 악물리는 고통에 복면 아래 얼굴은 식은땀에 푹 젖어 있었다. 클로이는 품에서 꺼낸 검고 긴 붕대로 제 발목을 감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 발목은 단단히 고정되었다. 평소만큼은 아니지만 움직이기엔 충분했다.
“‘레이디’ 체면이 있지. 겨우 이런 거에 절절맬까 보냐.”
마치 허세를 부리듯 아픈 발로 탕, 소리가 나도록 땅을 박찬 클로이가 제 키보다 높은 화려한 황궁 담을 훌쩍 넘었다. 어둠에 숨어 벽을 타고, 숨을 죽이고 나무까지 타고나서야 클로이는 3층 발코니에 설 수 있었다. 똑똑. 유리문을 두드리자 오래지 않아 소리 없이 문이 열렸으나 클로이는 들어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사방을 집요하게 살피고 난 뒤에야 움직였다. 요즘 레이디는 요주의 인물이라 어디서 누가 지켜볼지 모르니 조심에 조심을 더해도 부족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은 거지?”
“흐익!”
온신경을 밖에 쏟고 있던 클로이는 깜짝 놀라 푸드덕거리며 떨었다. 그 탓에 접질린 발목이 뜨끔해 몸이 휘청였다. 레이얼이 부축을 해주려는 듯 손을 내밀었으나 클로이는 살짝 몸을 비틀어 그의 손을 피했다.
“아! 좀! 놀랐잖아.”
“놀라긴, 문도 내가 열어줬는데.”
허공에 내밀어진 그의 손이, 느릿하게 거둬들여졌다.
“그래도 갑자기 그러면 놀란다……고!”
부루퉁해져서 따지던 클로이는 레이얼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살짝 이맛살을 구겼다. 거의 보름째, 매일 봐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의 미모만큼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렇게 예고 없이 지척에서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가슴이 콩콩거린다. 꼭 설렌 것처럼. 그건 절대 곤란하지. 시오도르에게 홀리다니 그 무슨 무서운 소리란 말이야. 클로이는 슬쩍 한 발짝 물러섰다.
“무슨 일이 있었어? 오늘 왜 이렇게 날이 서 있지?”
가까스로 거리를 벌렸나 했더니 이번엔 그윽한 저음이 기습적으로 고막을 헤집었다. 듣기 좋은 울림에 반사적으로 손끝이 찌르르하게 울린다. 클로이는 저린 손을 버릇처럼 가볍게 털었다.
“날을 세우긴. 내가 좀 늦었기로서니 다짜고짜 구박부터 하니까 그런 거 아니야. 걱정을 해보라고 걱정을!”
레이얼은 클로이의 앙탈에 짧게 웃었다.
“로이, 너야말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천하무적인 부하 씨를 왜 걱정해? 지금쯤이면 앓아누웠을 앙트레 백작을 염려해야 하지 않겠어?”
“매정하셔라.”
재미없긴. 흥, 들리게 콧방귀를 낀 클로이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여기, 플레이엄.”
조심스럽게 천을 풀어헤친 클로이는 목걸이를 두 손에 받쳐 들었다. 불빛 아래 자태를 드러낸 플레이엄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일렁이는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둑한 지붕 위에서 잠깐 보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도 황홀한 빛이었다. 그간 내로라하는 보석이며 귀물을 봐온 클로이조차 압도적인 화려함에 잠깐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일렁이는 빛무리에 클로이의 푸른 눈동자가 저도 모르게 메이던 순간.
“이런.”
나직이 웃음을 터트린 레이얼이 플레이엄을 클로이 쪽으로 밀어주었다.
“네게서 그런 표정을 보게 될 줄이야. 로이, 탐나면 가지렴.”
부드러운 미소만큼이나 달콤한 속삭임이었으나, 클로이는 단박에 거절했다.
“됐어.”
“왜?”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전하께 뼈저리게 배웠거든.”
“오랜만에 인심 쓰려 했더니?”
“전하, 우리 서로 다 아는 처지에 적당히 합시다.”
인심이라니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사기를 쳐. 들리게 중얼거린 클로이는 들고 있던 플레이엄을 그의 손에 올려주었다. 혹시라도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봐, 그의 손가락을 친절하게 굽혀 야무지게 쥐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난 줬어. 어? 줬다고.”
“후회하지 않겠어?”
유혹하듯 플레임의 슬쩍 흔들어 보이는 레이얼의 목소리는 한층 더 은근해져 있었다. 그러나, 클로이는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듯 뒤로 풀쩍 물러서다 비틀거렸다.
“후회는 무슨!”
두 손을 홰홰 내젓는 그녀는 진심이었다. 앙트레 백작이 광산 하나를 넘기고 구한 플레이엄이었다. 가격이 사악하다 못해 끔찍할 텐데, 그런 걸 거저 주겠다고? 그럴 리가 있나! 생글거리는 얼굴로 뼈가 삭을 정도로 그녀를 부리는 게 레이얼이었다. 플레이엄 같은 걸 받았다간 뼈가 삭는 정도가 아니라 영혼까지 털릴지도 모른다. 클로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플레이엄을 슬슬 흔들며 녹아내릴 듯 달콤한 미소를 짓는 레이얼은 그러니까, 악마쯤 되려나. 꿀꺽. 마른침을 삼킨 클로이가 재빠르게 레이얼과 거리를 조금 더 벌렸다.
“로이?”
“나 갑니다. 전하.”
“벌써? 아직 앙트레 백작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잖아?”
“날이 밝아오잖아.”
클로이는 조금 전보다 확실히 밝아진 밖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말도 안 돼. 신출귀몰하기로 소문난 ‘레이디’가 지금 몸을 사리는 거야?”
“네. 레이디는 소중하니까요.”
욱신거리는 발목에 단단히 힘을 준 클로이가 빠르게 발코니로 나갔다.
“매정하셔라.”
그녀를 흉내 내는 레이얼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클로이는 가볍게 콧방귀를 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탓. 단단한 대리석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클로이가 어두운 밤하늘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 * * 클로이가 떠나고 홀로 남은 레이얼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달리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들어올 때 클로이의 발목이 흔들렸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근처에 섰을 때 후끈하게 돋았던 열기도, 작게 헐떡이던 숨소리도. 중간중간, 움직일 때마다 휘청이던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클랜트 남작 이후 로이는 소위 ‘예고장’을 남겨 사람들에게 자신의 방문 날짜와 훔칠 물건까지 똑똑히 알려주었다. 등장을 알려주는 도둑이라니. 다들 레이디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무리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도 레이디는 약속한 날, 점찍었던 물건을 반드시 들고 가버렸다. ‘레이디’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말이 되었다. 예고장을 받은 집에선 호위를 두 배, 세 배로 늘리고 온갖 덫을 놓았다. 회를 거듭할수록 당연히 더 위험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클로이는 그 어디든 그 무엇이건 간에 레이얼의 지령에 단 한 번도 우는소리를 하지 않았다. 힘들다거나 위험했다거나 하는 보고도. 혹은 불가능하다거나 쉬운 곳으로 바꿔 달라는 부탁도.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오늘같이 다쳐 온 날도 말이다. 하다 못해 약을 달라는 말이라도 할 법도 한데, 로이는 일이 끝나면 꽁지에 불붙은 것처럼 달아났다.
“후.”
레이얼은 빛을 받자 마치 불이 일렁이듯 강렬한 빛을 뿜는 플레이엄을 바라보다 나직이 한숨을 터트렸다. 하다하다 이런 것을 미끼로 흔들게 하다니. 자괴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저주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로이는 정작 그가 역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살 피해 다녔다. 미묘하게 벌리는 거리감을 그가 모를 리 있나. 그러나 로이는 알고 있을까, 자꾸 거리를 벌릴수록 호기심보다 더한 집착이 돋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