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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시선을 앗아가는 미소 (11/121)

011. 시선을 앗아가는 미소2020.10.09.

“아, 이게 누구신가? 레이디?”

다급한 클로이와 달리 그녀를 맞이하는 레이얼은 얄미울 정도로 느긋했다.

“레, 레, 레이디라니!”

“레이디가 아니라 레레레이디였어?”

“잇!”

진짜 시오도르! 클로이는 능글거리는 레이얼의 모습에 거칠게 콧김을 내뿜었다. 지금 자신은 ‘레이디’라는 망측한 별명으로 부족해, 온 수도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이렇게 놀려? 자기 일 아니라 이거지? 한편은 무슨!

“어제 그렇게 불러도 매정하게 돌아가시던 분, 오늘은 무슨 일이신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레이얼이 씩씩거리는 클로이에게 물었다.

“전하!”

“네, 레이디.”

나긋한 대답에 클로이는 문득, 놓치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오늘 레이얼은 단 한 번도 ‘로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전하?”

“왜 그러시죠 레이디?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레이얼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이거 설마……? 간밤에 ‘로이’를 부르는 걸 모르는 체 했다고 이러나? 합리적인 의심과 함께 일일이 토라지는 레이얼의 모습에 피로감이 든다. 하지만, 황태자로 살아온 그가 ‘무시’에 이정도면 온건한 반응이다 싶어 클로이는 달래듯 좋은 목소리를 내주었다.

“전하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앉으시죠. 아, 설마 에스코트가 필요하신 건가?”

“아잇 진짜!”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얼은 마치 레이디에게 에스코트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한 손으론 가볍게 뒷짐을 지고 손을 내밀며 허리를 굽히는 정중한 모습에 클로이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계속 이럴 거야!”

“잡으시죠. 레이디.”

클로이는 발을 동동 굴렀으나, 레이얼은 허리를 굽힌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아아아…….”

아무래도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려면 그의 장단에 맞춰주어야 할 모양이었다. 또 한 번 까딱. 아쉬운 건 클로이였기에 결국 그녀는 레이얼이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단정하게 손가락을 오므려 그의 손에 올리자, 레이얼이 손끝만 가볍게 잡아 당겼다. 사교계에서 십년간 칩거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더없이 정중하고도 노련한 모습에 클로이는 살짝 놀랐다.

“……과연 레이디.”

그런데 정작 감탄은 레이얼에게서 터졌다. 레이얼의 시선이 클로이의 부드럽게 내려앉은 팔과 곧게 펴진 등을 차례로 스쳤다.

“별명이 아깝지 않군. 이렇게 훌륭한 자세라니, 정말 귀족 같잖아.”

아차. 클로이는 살짝 혀를 깨물었다. 북부에서 저 좋을 대로 살았다고는 하나, 클로이는 아르네 공녀였다. 제국 유일의 공녀이자, 유구한 역사를 가진 ‘아르네’의 일원. 타고난 기품과 당연한 교육으로 몸에 밴 우아함이 복면 따위로 가려질 리 없었다.

“그만 좀 놀리라니까!”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굵은 땀방울이 되어 흐르지만 표정만은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고작 똑바로 선 정도로 무슨 호들갑이람!”

“……저런, 이제 좀 정신이 드나 보지?”

“뭐?”

“이제야 사람 얼굴 같다고. 로이.”

빙긋, 미소지은 레이얼이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들어 툭, 턱끝에 가져다 댔다. 손등에 닿는 차가운 피부. 그제야 클로이는 자신이 몹시 긴장해 얼어붙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 말도 안 되는 능글맞은 억지가 토라져서가 아니었다고? 클로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레이얼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퍽 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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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레이디’라니요?”

야밤, 황후궁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팔걸이를 두드려가며 웃는 이는 캐서린 황후였다.

“겨우 그런 일로 독대를 청하시다니요?”

“겨우라니요!”

그녀의 맞은 편에 앉은 이는 길롯 백작. 캐서린 황후의 오빠였다. 하도 급하다며 매달리기에 들였더니, 한다는 소리가 아주 가관이었다. 이름도 낯선 남작가 하나가 도둑맞은 게 뭐라고, 이밤에 꾸역꾸역 찾아와 하소연인지. 저, 머저리는 어떻게 해가 지날수록 더 한담. 캐서린은 짜증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숨을 골랐다.

“클랜트 남작가를 모르십니까? 금 여섯 상자를 고작 ‘단승’ 작위에 쓸 수 있는 자입니다. 그자가 타운하우스 거리에 남작저를 마련하고 제 집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요. 그런데 그런 이를 털었다고요. 싹.”

“그래서요? 백작께서 받은 금이 구리가 되길 했습니까? 아니면 그것도 가져갔나요?”

“그건, 아니지만.”

“그게 아니면 그 도둑놈이 클랜트 남작가를 통째로 뜯어가기라도 했습니까?”

금방이라도 땅이 꺼질 것 같이 요란을 떨던 길롯 백작의 입이 꾹 다물렸다.

“백작님.”

“…….”

“움직이기 전, 말하기 전, 항상 내쉬 황자를 떠올리세요. 백작님의 행보가 우리 황자님의 앞날에 누가 되진 않을지를! 이러다가 백작 저의 나무가 말라 죽어도 제게 이르러 오실 참이세요?”

탕! 말 끝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동댕이치듯 내려놓은 캐서린의 푸른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다.

“부디, 생각하시란 말이에요.”

“황후폐하. 그래서 제가 달려온 것 아닙니까?”

황후에게 꾸중을 들은 길롯 백작의 목소리가 잔뜩 부어터져 있었다.

“이번에 퇴직명령서에 올랐던 이중 ‘자작’위를 받아갈 이가 나섰다고 말씀드렸는데.”

“아아…… 설마?”

은근한 말에 문득 캐서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길롯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맞습니다. ‘자작’위를 클랜트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파직 명령서는 무산되지 않았습니까?”

“금세 또 만들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돈을 낼 클랜트가 거하게 털렸다 이겁니다.”

그냥 도둑이 아니었나? 캐서린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걷혔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폐하, 간밤 ‘레이디’라는 녀석이 클랜트가에서 털어간 보석은 금 여섯 상자같이 귀여운 규모가 아니에요. 녀석이 쓸어간 보석은 하나에 수천만 골드짜리였어요.”

“뭐, 뭐라고요?”

수천만 골드라는 소리에 캐서린은 작게 헐떡였다.

“계승 작위인데, 고작 금 몇 상자로 셈할 가격은 아니지 않습니까. 해서 클랜트에서 마련 해두었던 보석을 죄다 잃었으니…….”

“맙소사.”

셈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돈이 증발했단다. 과연 이 밤, 길롯이 앓는 소리를 하며 찾아올 법한 소리였다. 캐서린은 치미는 짜증에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얼마 전 황제의 바보짓에 아르네 공녀를 날려 먹은 것도 아직 가라앉히지 못했건만, 연이은 비보에 견디기 힘든 두통이 치민다. 캐서린은 황급히 알약을 찾아 삼키곤 입을 열었다.

“찾아오세요.”

“예?”

“우는소리만 하지 말고, 찾아오건 잡아 오건 뭐든 하시라고요!”

노성을 터트리는 캐서린의 두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레이얼이 건네는 따뜻한 차를 마시고 났더니 한결 속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차 마실 때는 벗을 줄 알았더니?”

클로이는 레이얼을 매섭게 흘겼다.

“굳이 전하 아니더라도 지금 사방에서 내 정체를 캐고 싶어서 안달이라고. 보태지 말지?”

“그러게 적당히 하지 그랬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는 클로이는 적잖이 억울한 표정이었다.

“내가 뭐 얼마나 어쨌다고. 아니……그래 내가 너무 잘난 게 죄다. ”

“…….”

“전하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걸. 경계조가 얼마나 허술한지 정말 ‘어서옵셔’ 분위기였다고.”

그럴 리가 있나. 레이얼은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로이를 보며 쓰게 웃었다. 클랜트 남작저를 호위한 건 수도에서도 내로라하는 용병 길드였다. 그런 곳에서 목표물을 하나도 아니고, 모두 다 가져올 줄 그도 몰랐다. 주머니를 가득 채운 보석을 보고 그도 얼마나 당황스러웠던가.

“하……. 진짜 어떻게 하지.”

“부하 씨. 좀 이르긴 하지만, 다음부턴 목표물을 집어오면서 금화도 들고 오렴.”

“무겁고 소리 나는 걸 들고 오라고? 아예 내가 잡히길 빌지 그래?”

“고얀놈.”

삐죽한 말에 레이얼이 대뜸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클로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얼을 똑같이 쏘아봐 주었다.

“내가 엄청 유능한 부하이긴 한데, 그렇다고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않아?”

“가지고 오라는 게 아니야. 금화를 챙겨서 영지민에게 나눠주고 오렴.”

“으응?”

툴툴거리던 클로이가 레이얼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황제가 신경 쓰는 게 뭔지 아나?”

“……글쎄?”

“제국민의 이목이야. 황제는 시오도르가 ‘반정’으로 세운 황조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 그래서 폭군으로 보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지.”

이미, 폭군이잖아. 목끝까지 올라온 소리를 클로이는 꿀떡 삼켰다.

“나를 황태자에서 폐위시키지 않는 것도. 그리고 민란이 일어나자 증세안을 철회한 것도. 다 그런 맥락이지.”

“증세안이야 철회했을지 몰라도, 민란의 본거지로 아르네 공작을 보냈잖아.”

“아르네이니 보냈지. 제국민의 신임을 받는 공작이니 민란 주동자들도 별 반발 없이 수그러들 테고. 설령 일이 잘못되더라도 황제가 잃을 게 있나?”

“…….”

“잘 들어. 반드시 귀족가를 털고 나면 영지민에게 금화나 자잘한 보석류를 뿌리고 와. 그러면 네 배후는 바로 제국민이 될 테니까.”

“의적 같은 거라는 거지?”

“이름이야 뭐가 됐건 상관없어. 하니, 꼭 나눠주고 오렴.”

“털고, 나눠주고, 돌아온 다라……. 영, 바쁘겠는걸.”

“이곳에 들르지 않아도 돼.”

클로이는 인심 쓰는 것 같은 레이얼의 말에 크게 코웃음을 쳤다.

“그 보석들을 나더러 가지고 있으라고 하면 어떻게 해?”

“가지고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라는 건가?”

“그까짓 걸?”

“그까짓 거?”

레이얼이 되묻는 소리에 클로이는 아차 했다. 공녀인 그녀에게 보석은 그리 귀중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로이는 사정이 다르다! 당황도 잠시, 클로이는 턱을 바짝 치켜들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내가 말한 ‘이미’는 고작 보석 몇 점으로 제할 만큼 가벼운 게 아니라는 뜻이야. 그리고, 도둑맞은 물건을 들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라고?”

“……번거로우시다?”

“응.”

“그럼, 가져다 놓고 가던가. 그런데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건 뭐야. 걱정 말라고 아주 얌전하고 신속하게 가져다줄 테니.”

“것 참 든든하군 그래?”

빙긋 미소를 지은 레이얼이 작은 종이를 쓱, 밀어 넘겼다. 탁자를 가로질러 넘어온 종이엔 어제와 비슷한 것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말없이 종이를 훑은 클로이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 다들 하나같이 타운하우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 멀지 않아서 말이야?”

“누구나 탐내는 귀족들의 본거지 아니겠나.”

“글쎄. 별로 내 취향은 아니라서.”

클로이가 나고 자란 곳은 이렇게 화려한 곳이 아니었고, 그녀가 아는 귀족은 점잖을 빼는 부류가 아니었다. 찬 바람을 두르고서 그 누구보다 먼저 험한 곳에 나서는 이. 북부의 귀족은, 아르네는 그랬다. 그리운 이를 떠올리며 나직이 중얼거리는 클로이의 표정이 일순 부드럽게 풀렸다. 야물게 다물린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낭창하게 늘어지고 복면 뒤 푸른 눈이 상냥한 빛을 뿌린다. 시선을 한 번에 앗아갈 만큼, 몹시 사랑스러운 표정이었다. 레이얼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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