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예사롭지 않은 녀석2020.10.06.
“전하 왜 그래!”
짝! 클로이는 희게 질린 레이얼의 손을 후려쳐 목걸이를 떨어뜨린 후 발로 힘껏 걷어찼다. 구석으로 날아가 박힌 목걸이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나긴 했으나,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디 좀 봐!”
독인가? 잔뜩 당황한 클로이가 레이얼의 손을 잡아끌 때였다.
“진정해.”
커다란 손이 빙글 돌아 어렵지 않게 클로이의 손목을 감아쥐었다. 서늘한 피부에 착 감겨드는 레이얼의 손은 크고 따끈해 그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 너무도 생생했다.
“어어?”
놀라 쿵쿵거리던 심박이 조금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놀란 건 나니까.”
레이얼은 잡은 손에 힘을 줘 클로이를 한 발짝 앞으로 끌어당겼다. 맞닿은 시선이 주춤하는 발걸음을 따라 훌쩍 가까워졌다.
“이거 어디서 났어?”
“클랜트 남작가.”
“전부?”
“응.”
지척에서, 이렇게 빤히 마주 보고 있자니 클로이는 어째 좀 민망했다. 레이얼이 워낙 아무렇지 않아 버티고는 있지만, 슬금슬금 얼굴로 열이 몰리는 게 느껴진다. 이거, 얼굴이라도 붉혔다간 곤란해지는데.
“진짜 클랜트 남작가에 다녀온 게 확실해?”
희미하던 긴장감이 레이얼의 중얼거림에 단번에 증발했다.
“무슨 소리야? 설마, ‘클랜트’가가 하나가 아니야?”
“로이. 클랜트 남작가는 용병길드를 통째로 고용해서 호위로 쓰고 있지.”
어쩐지. 움직임이 보통 기사와는 조금 다르더라니. 미묘하던 위화감이 그런 거였구나. 그의 말에 후련한 표정을 짓는 클로이와 다르게 레이얼의 표정은 조금 더 복잡해 보였다.
“그런 곳인데, 어떻게…….”
“뭐어?”
클로이를 그저 실력이 조금 괜찮은 ‘암살자’ 혹은 ‘밤손님’으로 생각하고 있는 레이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클로이는 북부 제1사냥꾼. 아르네 공작이 코끝으로도 안 쳐줘서 그렇지 제1 사냥꾼은 굉장한 것이었다. 그런 클로이에게 겨우 남작가 잠입 정도에 의아해하다니 무시도 이런 무시가 없다. 분하고 어이없었으나 ‘제1사냥꾼’같은 소리를 했다간 정체가 들통날 판이니 클로이는 씩씩거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내 참. 이거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네. 잘했다는 한마디가 이렇게 어려워? 시오도르?”
냉담한 말에 레이얼 역시 표정이 차게 굳었다. 시오도르 주제에 시오도르가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지?
“흥.”
예전처럼 마냥 밀어내진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르게 품겠다는 뜻도 절대 아니다. 클로이는 자신을 쏘아보는 레이얼을 두고도 느긋하게 굴었다. 척,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었다.
“해봐. 칭찬.”
줄 거 줬으니, 받을 것을 받아야지. 거만한 클로이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던 것도 잠시, 레이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잘했다.”
한마디 더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관 달리 선선히 건네는 칭찬이라니! 레이얼은 ‘시오도르’들과 다르게 상식이 통하는 남자였던 모양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클로이의 시선이 잘게 떨렸다.
“그런데 로이, 혹시 금화는 없었나?”
……정정. 상식은 무슨. 염치도 없이 뻔뻔한 것이 ‘역시’ 시오도르답다. 클로이의 누그러졌던 눈매가 사납게 솟았다.
“작작하지? 내 참. 욕심하곤. 나 간다.”
“로이 잠깐!”
“흥.”
욕심꾸러기.
“로이! 기다리라니까!”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레이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클로이는 돌아 봐주지 않았다. 알게 뭐람. 나 화났다고.
“그럼, 이것도 빨고…….”
간밤 클랜트 남작가에 잠입했을 당시, 클로이는 코끝을 스치던 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향이 뱄을지도 모르니 세탁해두는 편이 안전했다. 복면과 상하의 그리고 손목 보호대까지 클로이는 꼼꼼하게 챙겼다. 아무도 모르는 밤마실이라 하녀에게 세탁을 지시할 수도 없다.
“흠. 빨러 갈 시간이 안 됐는데. 역시 로지에게 부탁해야 할까.”
‘좀 미안한데……’라고 클로이가 작게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들고 있던 사냥복을 감춘 클로이가 집무실 의자에 앉으며 목청을 높였다.
“누, 구야?”
“에반입니다. 아가씨.”
“……에반? 들어와.”
클로이는 뜻밖의 얼굴에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쩐 일이야?”
“일은요 무슨. 요즘 도통 뵙질 못한 것 같아서 구실삼아 찾아뵈었습니다.”
에반은 제 손에 들린 찻주전자를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게 거창하게.”
핀잔하는 것 같았으나 클로이는 어느새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앉아 일단. 안 그래도 어깨도 뻐근하고 눈이 침침해서 쉬려던 참이야.”
클로이는 어깨를 휘두르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반쯤 엄살에 반쯤 진심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세요. 공작님과 소공작님께서도 금세 돌아오실 겁니다.”
“응. 하루빨리 돌아와 주시길 정말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그렇게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가 한참을 이어졌다. 에반은 기본적으로 듣는 것에 능한 사람이라, 클로이는 어느새 속에 담아두었던 것까지 죄다 꺼내 조잘거리고 있었다.
“아니 근데 로지는 정말 너무하지 않아? 내가 힘들다고 하면 일을 좀 줄여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갖다 줘. 일도 자꾸 해야 요령이 늘 거라나?”
“하하하하. 로지답습니다.”
“에반. 자기 일 아니라고 그렇게 웃는 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가씨도 참. 당연한 소릴.”
에반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클로이의 빈 잔을 채웠다. 쪼로록. 청량한 소리와 함께 거의 바닥을 드러냈던 클로이의 찻잔이 그득하게 차올랐다. 수색이 맑고, 향이 깊은 것이 아무래도…….
“에반, 나한테 뭐 말할 거 있지?”
클로이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 이건 에반의 버릇이었다. 그는 ‘주인’에게 뭔가를 청하기 전 티타임을 준비해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든 뒤 본론을 꺼냈다.
“아가씨, 혹시 허락해주신다면 집안의 귀중품 보관 자리를 바꿔볼까 하는데요.”
이렇게. 클로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그의 습관에 슬쩍 미소지으며 차를 머금었다. 화려한 수색에 풍부한 향, 그리고 상큼한 뒷맛. 이건, 블랙잉그리드인가? 흐음……. 클로이는 작게 감탄했다. 블랙잉그리드는 차를 좀 즐긴다 하는 이들 사이에서 선망이자 애증의 대상이었다. 향도 화려하고 맛도 훌륭했으나 블랙잉그리드는 우리는 동안 시간을 조금만 넘겨도 입에 대지도 못할 만큼 씁쓸해진다. 쓴맛을 잡기 위해 차를 덜 우리면 색과 향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우리면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라, 한번 맛본 이들은 절대 잊지 못하고 목을 맸다. 그런 블랙잉그리드를 가지고 왔다라……? 클로이는 눈을 가늘게 늘여 단정한 자세로 앉아있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안 들어주곤 못 배기겠는데? 한 잔 더.”
“감사합니다.”
에반이 빙긋 웃으며 찻주전자를 들었다. 쪼르륵. 떨어져 내리는 고운 찻물이 잔에 부딪혀 맑은 소리를 냈다. 흐뭇한 것도 잠시, 차를 홀짝거리던 클로이가 불현듯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옮기는데?”
“……대답 전에 먼저 물어보셨어야죠.”
“남도 아니고 뭐 어때?”
클로이는 에반의 눈총을 능청스럽게 넘기며 웃었다.
“어휴.”
그 모습에 에반이 늘어지게 한숨을 쉬던 것도 잠시, 모노클을 쓱 추켜올리며 예의 그 단정한 목소리로 이유를 들려주었다.
“어제, 클랜트 남작저에 도둑이 들었답니다.”
“크……흐음.”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고 가슴이 뜨끔해지는 소식이었다.
“아아, 설마 여기도 도둑이 들까 봐 금고를 옮긴다는 거야?”
“…….”
“걱정하지마. 아르네는 괜찮아.”
클랜트 남작가를 털어버린 도둑은 다른 누구도 아닌, 클로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에반은 클로이의 말에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평소라면 그렇지만 이번엔 아닙니다.”
“뭐? 아니 왜?”
“이번 일을 벌인 건 그저 그런 도둑이 아니니까요.”
“그럼?”
심각해진 에반의 모습에 클로이도 덩달아 긴장해 마른 침을 삼켰다. 꿀꺽. 너무 싹 털어왔나? 아니면, 뭘 흘렸던가? 에반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클로이에게 한층 더 은근해진 목소리를 냈다.
“선물은 잘 받아가오. ‘레이디’라고 적어놨답니다.”
“…….”
그게 왜? 눈을 끔뻑이는 클로이를 향해 에반이 한숨을 쉬더니, 어린아이에게 하듯 조곤조곤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평민 이상의 신분이라는 거죠.”
아차.
“게다가 하오체는 고어로 귀족가에서나 쓰는 게 아니겠습니까?”
맙소사.
“그뿐만이 아닙니다. 클랜트 남작가는 길드 하나를 통째로 고용해 호위를 맡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인원을 따돌리고 집 안의 모든 곳을 뒤져 털어 갔답니다.”
“…….”
“예사롭지 않은 녀석입니다.”
졸지에 ‘예사롭지 않은 녀석’이 된 클로이는 에반의 말에 마른 침을 꿀떡 삼켰다.
“제일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뭔데?”
자칫 너무 관심 보이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대체 뭘 실수했는지 알아야 했다.
“필체와 창틀에 찍힌 발자국으로 보건대.”
“응응.”
클로이는 에단의 대답을 기다리며 귀를 한껏 기울였다.
“여자랍니다.”
“응?”
그게 뭐? 이번에도 클로이는 눈을 끔뻑였다.
“이게 무슨 의민지 모르시겠습니까?”
“응.”
에반은 천진하게 눈만 끔뻑이는 클로이의 모습에 목 졸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답답해 죽으려는 표정이었다는 뜻이다.
“수도엔 그 어떤 여성 기사도, 그 어떤 여성 길드원도 없습니다.”
“……어?”
“‘레이디’라고 이름을 남긴 건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는 의미입니다. 아마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에반의 말에 클로이는 그제야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클로이는 나고 자라길 뼛속까지 북부인이었다. 북부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 여자고 남자고 똑같이 검을 들고, 활을 쏘았으며 말을 몬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북부에선 당연하던 것이 수도에선 특징이 되어버릴 줄이야.
“그……렇구나.”
하긴, 레이얼도 ‘여자’침입자였기에 자신에게 흥미를 보였었지 않았나. 아, 이거 좀 일이 위험하게 돌아가는데? 긴장감에 어느새 클로이의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지금 수도는 난리예요. 클랜트 남작가야 워낙 적이 많아서 아직 특정할 수 없지만, 다음 타자는 누가 되는지에 따라 ‘레이디’의 배후 세력이 보이지 않을까요?”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그렇지요. 그리고 레이디를 길러낸 조직이 ‘레이디’를 하나만 길러냈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러니 미리 조심해두어야지요. 지금은 공작님도 안 계시니까요.”
“그래. 얼른 가 봐. 할 일이 아주 많겠어.”
에반을 몰아낸 클로이는 그날 밤, 달이 뜨기도 전 일찌감치 황성으로 향했다.
“전하! 전하! 전하! 얘기 좀 해!”
간밤 뛰쳐나갈 때와는 달리, 몹시 다급하고도 절박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