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밤에 하는 나쁜 짓2020.10.02.
“이번엔 또 어디가 아파서 이러는 거지?”
레이얼은 어제와 달리 해쓱해진 클로이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좀, 토할 것 같아.”
“……왜?”
“본업 쪽이 바쁘네.”
클로이는 비칠거리며 다가와 탁자에 거의 쓰러지듯 엎드렸다. 달이 뜨기 전 서류를 처리하느라 눈이 빠지게 일했다. 마지막엔 글자가 글로 읽히지 않고 활자 그대로 스치고 지나가는 통에 같은 문장을 일고여덟 번씩 읽어야 했다. 정말, 울고 싶었다. 꾸역꾸역 처리하고 일어나며 클로이는 다짐했다. 아파 죽어도 절대 서류는 밀리지 말자. 오늘 할 일은 죽어도 오늘 해치우자. 내일은 내일의 서류가 쏟아질 테니까.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휘갈기고 공작저를 나서던 순간의 그 짜릿함이라니! 황궁으로 향하는 길이 이렇게 신나기는 처음이었다. 클로이는 문득 고개를 들어 옅게 미간을 찌푸린 레이얼을 향해 배시시 웃어주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레이얼이 무척 근사해 보였다.
“전하, 아름다우십니다.”
“열병이 돈다는 이야기는 아직 못 들었는데…….”
“염병?”
“……귀에도 이상이 있나?”
레이얼은 대놓고 클로이를 미친자 보듯 했다. 그는 클로이가 시오도르를 얼마나 불신하고 증오하는지 ‘일루미넴’ 때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상을 감지한 순간 곧장 그에게 겨눠지던 단검. 그를 향해 곧게 겨눠진 칼날을 마주한 순간 레이얼은 가슴을 꿰뚫린 것보다 참혹한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그는 요만큼도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가 그토록 지긋지긋해 하는 ‘시오도르’라는 이유로. 그런데, 다른 누구도 시오도르를 그렇게나 경멸하는 로이가 선선히 칭찬할 리 있나……? 레이얼은 눈을 가늘게 늘여 흐물거리는 클로이를 경계했다.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클로이가 모를 것인가.
“흥. 됐어. 우리 사이에 칭찬은 무슨. 그래서 나 어디로 가면 돼?”
클로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갈 수 있겠나?”
“이제 몸이 쑤시는 것도 아닌데 못 갈 이유가 뭐야? 설마 또 계보니 뭐니 하는 서류 내밀 생각이라면 그만둬. 나 오늘은 때려죽여도 안 봐. 못 봐.”
“봐야 할 텐데?”
“흥. 내가 끝까지 안보겠다면 어쩌려구, 전하?”
이제 서류라면 아주 지긋지긋하다. 정색하는 클로이에게, 레이얼이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아깝지만 경계병 교대시간과 위치, 그리고 내부 지도는 버려야겠군.”
“뭐? 전하! 전하! 사실 저 활자 중독이랍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클로이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레이얼은는 순식간에 바뀌는 클로이의 태도에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클로이는 그런 레이얼의 모습을 못 본 척 입을 크게 벌려 활짝 웃었다.
“어서 주세요.”
까딱까딱. 내민 손가락이 방정맞게 재촉했다. . . . 그로부터 한 시간 뒤. 클로이는 수도의 고급 타운 하우스가 밀집한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오늘 그녀가 방문할 곳은 클랜트 남작가였다. 타운 하우스 거리는 백작위 이상이 들어와 있는 게 보통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귀족가의 주 수입원은 영지세다. 보통은 작위에 걸맞은 영지를 하사받기 마련이라 작위는 그 가문의 재력의 지표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등작중 가장 바닥인 남작가가 이곳에서 이렇게나 큰 저택을 가지고 있다고?
“워후. 이거 우리 집보다도 큰 것 같은데?”
담장 위에 오른 클로이는 입이 떡 벌어지게 화려한 클랜트 남작저의 전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이 정도의 재력은 있어야 작위를 살 수 있다는 거지? 흐응. 작게 콧소리를 낸 클로이는 품에 넣어둔 종이를 꺼내 남작저와 대조해 확인하기 시작했다.
“남작부인 드레스 룸이 여기고……. 어디보자 영애의 드레스 룸은 이쪽인가?”
활자만 보면 속이 메스꺼웠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눈에 쏙쏙 박히고 재미까지 있다.
“이래서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는 건가……?”
심지어 이건 반쯤 합법이다. 무려 황태자의 인가가 떨어진 거니까.
“어디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남작저를 바라보는 클로이의 새파란 눈이 반짝, 짓궂게 빛났다.
“후…….”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레이얼은 천천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벌써 몇 시간째 쉬지 않고 서류를 봐서인지 눈이 뻑뻑하고 여간 피로한 게 아니었다. 차가운 손으로 눈두덩을 꾹꾹 누르자, 좀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아르네 공작도 자리를 비운 지금, 길롯을 막을 만한 가문은 전무하다시피 했기에 그들의 행패는 보란 듯이 더욱 노골적이고도 더욱 집요해졌다. 이번 주만 해도, 세 건의 파직 명령서를 승인해달라 난동을 부리지 않았던가. 거론되었던 이들이 황제의 방계 혈족으로 ‘시오도르’의 친족이었기에 끝끝내 막아낼 수 있었으나, 이번 건은 특별한 경우였다. 보통은 길롯 백작이 내미는 파직 명령서는 높은 확률로 이행된다. 그것이 특히 레이얼의 지지세력일 경우엔. 하루하루가 커다란 등짐을 가득 지고, 살얼음이 언 강을 건너는 기분이었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끝에서 번지는 균열이 뻔한데 이미 한가운데까지 들어와 있어서 등에 진 것을 내려둘 수도, 이 걸음을 멈출 수도 없다. 결국 레이얼에게 남은 선택지는 명확했다. 무조건 전진. 반드시 살아남는다. 레이얼은 밤에 제대로 잠을 자본 기억이 희미했다. 어려서부터 시작된 고립이었기에 레이얼은 언제부턴가 밤을 지새워 일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빈말로라도 매일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는 그의 모습이 좋아 보일 리가 없다. 수면 부족과 긴장에 시달린 얼굴은 피곤에 절어 가만히 있어도 퍽 예민해 보인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런데…….
‘전하, 아름다우십니다.’
“쯧.”
생각지 못한 소리를 들어서였을까. 감히 황태자를 평가하는 말을 하는 죄를 저지른 녀석을 혼쭐내는 것이 아니라 그만, 당황해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말았다.
“열병은 뭐고 염병은 뭐야…….”
후, 아까완 다른 의미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는 레이얼의 얼굴은 분명 조금 전보다는 화사하고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 * *
“진짜 뭐지…….”
번쩍번쩍 빛이 나는 목걸이를 손에 든 클로이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남작가에 잠입해 목표한 보석류를 챙기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시간. 그나마도 경비조의 교대시간을 기다리느라 시간이 소요되어서였지, 잠입이 어려워서는 결코 아니었다. 이쯤 되자 클로이는 오만가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거…… 함정인가? 어떻게 방마다 조금 뒤졌다 하면 보석이 나오지? 가지고 온 작은 주머니는 다이아몬드며 오팔, 사파이어등 온갖 찬란한 보석으로 가득했다. 공녀인 제 눈으로 보기엔 진품이나, 극도로 정교한 가품일 수도 있다. 그래서 조금만 더 뒤져볼까 한 거였는데……. 클랜트 남작의 집무실을 뒤지다 발견한 숨겨진 비밀 공간엔 금괴가 한가득이었다.
“……금괴도 좀 집어 갈까?”
원래 클랜트 남작가는 상단을 꾸리던 상인 가문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상단은 아니었는데 몇 해 전 우연히 동쪽 대륙에서 실어 온 향초가 크게 인기를 끌어 거부가 되었다. 본래 사람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기 마련. 넘치는 재물을 쥐자, 이번엔 명예도 가지고 싶어졌다는 게 바로 클랜트 남작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올해 초 길롯백작저로 금 여섯 상자를 내고 단승 작위를 샀다. 어지간히 돈이 많겠구나 했지만 집무실에서 금괴 더미가 나올 줄이야. 클로이는 한쪽 벽에 가득 쌓여 존재감을 과시하는 금덩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제국의 하나뿐인 공녀로 클로이 역시 남부럽지 않게 살아왔다. 그런데, 그런 클로이도 이런 금더미는 처음이었다.
“…….”
힐끔 시간을 확인한 클로이는 얼굴에서 망설임을 지웠다. 함정이면 빠져나가면 그만이지. 보석이 가짜면 다시 오자. 지극히 간단한 결론이었다. 그래서 클로이는 이 어이없을 정도로 쉬웠던 첫 도둑질을 마무리하고 떠나기로 했다. 열린 비밀 문을 닫기전 금괴도 좀 챙겼다. 자신이 들어와 헤집은 흔적을 착착 지운 클로이는 문을 열고 나서기 전, 클랜트 남작의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선물을 고맙게 받아가오. 무작정 털어와서야 도둑밖에 되지 않으니, 메시지가 필요하다는 게 레이얼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클로이는 펜을 들어 자신의 방문을 클랜트 남작에게 알렸다. 그러나 다 쓴 편지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넣고 버릇처럼 봉투 겉면에 ‘레이디’를 쓰던 클로이는 깜짝 놀라버렸다. 이건 정말 큰 실수였다. 클로이에게 펜을 들게 만드는 건 티파티와 독서모임같은 지극히 여성들의 초청장이었다. 수신자에 레이디를 붙여 가문의 명을 적었던 버릇이 이럴 때 발휘될 줄이야.
“하, 이거. 진짜.”
곤란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클로이는 이맛살을 구긴 그대로 레이디라 쓴 부분을 찍 그어버렸다. 알게 뭐야. 격식 차리는 도둑이 어디 있담. 그리고 새로 쓰기엔 시간도 빠듯했다. 새벽 2시. 그녀의 기억에 의하면 곧, 복도 순찰을 돌 때였다. 높이 3층의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클로이의 얼굴엔 흔한 망설임도 없었다.
“……전하, 전하.”
톡톡톡.
“전하.”
레이얼은 쉬지 않고 울리는 로이의 목소리에 헛웃음을 지었다. 몰랐는데 아무래도 자신은 칭찬에 목말라 있었던 거였나보다. 예쁘다는 소리를 한번 듣더니 로이 녀석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다 못해 이제 환청까지 들린다. 레이얼은 차가운 물이라도 마시고 진정할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톡톡톡.
“전하. 전하.”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같다.
“전하, 빨리 안 열면 깨고 들어간다?”
물잔을 입에 물던 레이얼은 지극히 현실성 넘치는 소리에 고민했다. ‘환청이 원래 이런 식인가?’ 하는 의심과 ‘어쩐지 진짜 같은데?’ 하는 확신에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확인해보면 되지. 레이얼은 빠르게 움직여 테라스에 드리워진 커튼을 슬쩍 걷었다. 벌어진 틈은 새카맸고 역시 아무것도 없…….
“서서 졸아? 빨리 열어!”
없는 줄 알았는데, 잠깐 몸을 숨긴 거였는지 유리창 밖에서 새파란 눈동자가 번뜩인다.
“로이?”
“빨리! 빨리!”
“네가 무슨 일이지?”
실상은 잔뜩 당황한 채였으나 문을 열어주는 레이얼은 속내와 달리 매끈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은? 가져오래서 갖고 왔더니 왜 문을 안 열어! 아흐 추워!”
슬쩍 벌어진 틈새로 몸을 모로 세워 밀고 들어오는 로이에게선 냉기가 풀풀 뿜어져 나왔다.
“갔다 왔다고?”
클랜트 남작가의 위치를 가늠한 레이얼은 이번에야말로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거긴 이렇게 금방 다녀올 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렇게 금방?
“아니 그럼, 배달이라도 시키란 거야, 뭐야?”
로이는 그의 경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어이없어하는 쪽이랄까? 배가 살찐 다람쥐처럼 볼록하다 싶더니, 척척 걸어들어온 로이가 불쑥 품에서 주머니를 꺼낸다. 절그럭 하는 소리와 텅, 텅, 텅. 묵직한 소리가 세 번 울리며 탁자를 채웠다.
“금괴?”
“응.”
“보석을 가져오라니까?”
“보석 여기 있습니다. 전하.”
클로이는 작은 주머니를 그에게 툭 던져주었다. 반사적으로 받은 레이얼은 주머니를 열어보곤 침음을 흘렸다.
“로이!”
목걸이를 꺼내든 레이얼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