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전하, 사기당한 거 같은데?2020.09.29.
일루미넴은 신경마비독을 가진 독초로 짐승도 먹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것을 먹였다는 소리에 클로이는 눈에서 불이 튀는 기분이었다. 으드득.
“레이얼 시오도르!”
잔뜩 숨죽인 외마디가 목 아래서 음산하게 울렸다. 일루미넴을 먹었으니 곧 자신은 온몸이 마비되다 못해 결국은 숨이 멎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는 안 죽는다.’
내동댕이쳐질 때도 놓치지 않았던 단검을 바투 잡으며, 클로이가 공격할 틈을 노리던 그때였다.
“로이. 내가 검을 놓으라고 했을 텐데?”
쩔그렁. 귓가를 울리는 쇳소리에 힐끗 살피니, 단검을 쥔 손목이 레이얼에게 붙잡혀 있다. 아마, 검을 떨구도록 꺾은 모양인데 우습게도 마비 독에 당해 아무 느낌도 없었다. 무기도 빼앗기고 독에 당해 제압되어 깔렸다. 로지가 굴릴 때 요령 피우지 말걸. 뒤늦게 후회가 든다.
“하…….”
클로이는 무기력한 제 꼴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단검도 빼앗겼으니 이제 가망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로이. 숨 쉬는 건 어때?”
“아직 안 끊어졌으니까 좀 기다려.”
“고얀 놈.”
딱! 경쾌한 소리에 눈을 뜨니 손을 거두는 레이얼이 보인다. 손가락 모양이며, 팔의 각도를 봤을 때.
“지금 죽어가는 사람을 딱밤까지 때린 거야? 뭐 이런 비열한-.”
“일루미넴 드신 부하씨. 아직까지 숨소리가 너무 쌩쌩한 거 아닌가?”
그의 말에 클로이의 입이 갑자기 꾹 다물렸다. 일루미넴의 악명이 자자한 건, 독의 종류가 굉장히 위험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 효과 역시 어마어마하게 빨라 해독할 새가 없기 때문이었다. 보통 일루미넴을 먹으면 5분도 안 돼 숨이 끊어진다. 약을 먹고 한참 몸싸움까지 했으니 못해도 십 분은 족히 넘었는데……?
“……이거, 일루미넴 맞아?”
조금 전보다 클로이의 목소리가 확연히 궁색해졌다.
“맞아.”
“그런데 왜 아직 안 죽어?”
“하나밖에 없는 부하씨를 제대로 부려먹지도 못하고 죽일 수야 없지.”
“……일루미넴이라며?”
“일어나라.”
몸을 일으킨 레이얼이 손을 내밀어 까딱였다. 잡고 일어나라는 듯했지만, 클로이는 손을 내미는 대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전하. 지금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아무래도 전하 사기당한 거 같은데?”
“……일어나라.”
조금 풀린 것 같던 레이얼의 얼굴이 다시 구겨져 클로이를 재촉했다. 눈빛이 어찌나 흉흉한지 조금 더 머뭇거리면 멱살을 잡고 일으킬 기세라 클로이는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감각이 없긴 했지만 몸 상태는 상당히 괜찮았다.
“……이거 뭔데.”
“뭐긴, 비열한 시오도르가 독을 건넨 거지.”
“전하.”
“레이얼이라 부르잖고선?”
꼬박꼬박 말꼬리를 잡아 따지는 것을 보아하니 제법 토라진 모양이다. 이렇게 나오신다? 클로이도 할 말은 많았다.
“전하. 미안합니다.”
냉큼 무릎을 꿇은 클로이가 사과를 건넸다.
“허?”
레이얼은 그런 클로이의 모습에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줏대가 없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상황파악이 빠르다고 생각해야 하나?”
“시오도르에게 당한 상처가 깊다고 넘겨주세요. 전하.”
“고얀 놈.”
살짝 미안하긴 했으나, 따지고 보면 전부 ‘시오도르’가 문제였다. 가만히 있는 아르네를 배신하고, 또 오해하게 만들지 않았나. 그래서 클로이는 레이얼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꼿꼿하게 허리를 펼 수 있었다.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전하 대체 그거 뭐라고 합디까?”
“일루미넴.”
“사기당했다니까 그러네, 그거 마취초 비슷한-.”
“해독제를 섞어 독을 적당히 중화해 알약으로 만든 일루미넴이다. 마취초가 아니야. 감각은 마비시키지만 정신이 멀쩡한 채 움직일 수 있지 않나.”
“워후. 그러네? 전하 나 그런 건 처음 들어봐.”
“당연하지.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건 좀 진작 말해주면 어디 부러지나? 클로이는 빌어먹을 시오도르를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서, 앞으로 어쩌겠다고 로이?”
무릎 꿇은 클로이에게 앉은 그대로 레이얼이 상체를 숙여 바짝 다가왔다. 신뢰를 하던지, 제대로 복종하라고 했었나? 클로이는 레이얼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척에서 빛나는 레이얼의 눈동자는 티 없는 겨울 하늘을 닮았다. 북부에서 매일같이 보던 바로 그 하늘. 신뢰와 복종을 오가던 추가 기우뚱, 한쪽으로 쏠린다.
“전하. 최선을 다해 충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아. 나도 신뢰를 얻어내도록 전력을 다하마.”
레이얼은 비로소 옅게 웃어주었다. 이미 계약으로 묶인 사이였고, 한배를 탔다고도 했다. 그러나 클로이는 비로소 이제야 레이얼이 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웃어주는 그를 향해 살짝 웃어주었다. 그가 했던 그대로.
“아니 진짜, 이해할 수가 없네. 시오도르는 사람 속을 뒤집는 교육이라도 따로 받는 거야 뭐야?”
담을 타 넘는 내내 클로이는 투덜거렸다. 억지로 묶인 관계가, 계약서보다 더욱 탄탄한 것으로 얽히던 순간은 일견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랬는데, 그 순간에 레이얼이 기다렸다는 듯 망쳐놨다.
‘웃지 마’
‘예?’
‘이상하니까 웃지 말라고.’
“아호 짜증나!”
질색하던 레이얼의 얼굴이 떠오르자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모멸감이 스민다. 엘리오만큼은 아니라고는 해도 클로이도 북부에선 제법 미인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미소에 못 볼 걸 본 것처럼 진저리 칠 정도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런 취급은 난생처음이라 데미지가 상당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순간순간 질색하던 레이얼의 얼굴이 떠올라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아주 그냥!”
끓어오르는 성질을 어쩌지 못하고 클로이는 담을 쾅! 소리 나게 걷어찼다. 레이얼의 앞에서 대놓고 이러지 못한 건, 그가 비웃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미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얼굴만 보고 살았으니까, 세상 모든 게 하찮겠지. 하지만 그래도! 쾅! 마지막 담만 넘으면 되는데 좀처럼 속이 가라앉질 않아 클로이는 아예 본격적으로 담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거기 누구냐!”
오래지 않아 근위대가 달려오는 소리가 나 냅다 담을 넘어 숨죽이긴 했지만, 담을 넘기 직전 클로이는 똑똑히 봤다. 흙발로 더럽혀진 황궁 담장을 말이다. 소소한 복수란 이런 걸까. 속이 좀 후련해졌다.
“빌어먹을 시오도르.”
냅다 달리기 전, 소리 내 욕도 한번 했더니 기분이 풀리다 못해 좋아져 공작저의 후문을 들어설 때쯤 클로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었다. * * *
“갑니다!”
“아, 로지! 좀!”
정오 무렵부터 이어진 대련에 클로이는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헉헉거리는 숨소리엔 열기가 짙게 물려 있었다. 몸이 거의 한계에 몰려 있었으나 로지는 좀처럼 끝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침입자’를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경솔한 한마디가 불러온 대참사였다. 덕분에 며칠간 네발짐승처럼 기어 다녀야 했지만 근육통은 잠깐이었다. 클로이의 몸은 빠르게 적응했다. 한 달여 간 드레스와 보석에 휘감겨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하게 퍼졌던 몸은 북부에서 산을 누비던 때만큼 단단해졌다. 덕분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던 첫날과 달리, 오늘은 끝까지 검을 쥔 채 버티는 중이었다. 기기기긱. 검날과 검날이 첨예하게 서로를 갉아내는 서슬 푸른 소리가 한참 동안 울렸다. 그러나 둘 다 타고난 힘은 비슷했기에 결국 마지막 승패를 가른 건 노련함이었다. 길어지는 대치에 로지가 검날을 틀어 클로이의 검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목덜미를 찔러왔다.
“으…….”
목덜미 바로 앞에서 멈춘 예리한 칼날. 클로이의 명백한 패배였다.
“졌어.”
로지는 클로이의 항복 선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의외의 소리를 했다.
“……못해도 보름은 걸릴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빈정거리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말투만 저럴 뿐, 칭찬이었다. 클로이는 로지의 칭찬에 거만하게 턱 끝을 치켜들었다.
“좀 처졌던 몸을 원래로 되돌리는 정돈데 뭘.”
“아 예예, 그러시겠지요.”
“제1 사냥꾼을 잊으면 곤란하지.”
“아무렴요.”
로지는 클로이의 뻔뻔함에 질렸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천천히 오세요. 목욕물 받아놓을게요.”
“어어, 그래그래.”
이내 로지가 본래의 제 일인 ‘시녀’ 일을 준비하러 자리를 비우자 클로이는 털썩 소리가 나도록 험하게 주저앉았다.
“하.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고개를 젖히고 늘어진 클로이는 제국의 하나뿐인 고귀한 공녀님이라는 볼 수 없을 만큼 몰골이 엉망이었다. 말이 쉽지 단시간에 몸을 되돌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진짜 무슨 뒤에서 곰 쫓아와?”
쫓기는 사람처럼 들들 볶아대던 로지를 떠올리며 툴툴거리던 클로이가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뿜었다. 지난 닷새, 정말 매 순간이 지옥 같았다. 그때마다 클로이는 ‘쉬운 길’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툭툭 허리띠를 두드리자 클로이를 시험에 들게 하던 작은 주머니가 만져진다. 이건 그러니까, 닷새 전 전 서로에게 진정한 동료가 되자는 약속을 했던 날의 일이다. 웃는 얼굴로 면박을 주던 것도 잠시, 레이얼은 클로이에게 들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이거 뭐야?’
‘일루미넴.’
‘그러니까 이걸 왜 날?’
‘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일같이 다쳐 오니 주는 거야.’
‘이걸?’
클로이의 떨떠름한 반응에 레이얼은 답답해하며 주머니를 손에 꽉 쥐여주었다. 혹시라도 거절할까봐 두 손으로 클로이의 손을 꽉 붙들고선 놓지도 않았다.
‘미련하게 참지 말고 쓰거라.’
‘이걸 진짜 나 준다고?’
‘다쳐서 상처를 수습해야 할 때 더 요긴할 테지만, 일단 쓰거라.’
‘얼마나 위험한 일을 시켜 먹으려고 이런 걸 줘?’
‘……고얀 놈.’
‘아, 이건 실수야 실수.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했잖아. 조금 기다려봐 전하.’
‘나도 그래서 그 노력 하고 있지 않나? 최선을 다해 신뢰를 얻어내려는 중이다.’
눈을 흘기는 척 하며 클로이는 주머니를 꾹 움켜쥐었다.
‘괜히 나중에 돌려 달라 하기 없기야?’
‘약효는 하루다. 한 번에 세 알씩. 시간 맞춰서 잘 챙겨 먹으렴.’
‘걱정 마시라니까. 내일부턴 씽씽 날라올 테니까. 고마워 전하.’
그랬다. 레이얼은 그 귀중한 일루미넴을 겨우 근육통 따위에 쓰라고 했다. 이 좋은 것을 그런 데 써서 될 일인가? 아껴둬야지! 덕분에 클로이는 그 다음 날부터 온 힘을 다해 레이얼의 앞에서 안 아픈 척 근육통을 참아내야 했다. 몇 번의 위기가 있긴 했으나 클로이는 의심쩍어하는 레이얼에게 태평하게 웃어주었다.
‘세 알 다 먹으면, 너무 강해서 발목이 꺾여도 모르더라고. 그래서 두 알만 먹으니 이러네. 하하하. 내일은 세 알 먹어야겠다.’
그렇게 지켜낸 알약이 열다섯 알. 계산상 이제 오늘부터는 마음껏 앓는 소리를 해도 변명거리가 있었건만.
“……안 아프다.”
등짝까지 결리던 것이 오히려 기를 쓰고 움직인 덕에 죄다 시원하게 풀렸다. 이걸 아깝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복잡한 심경으로 천천히 일어나던 클로이는 문득 붉은 하늘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점심을 먹고 잠시 나왔지 않았나……? 오늘치 서류가 자그마치 허리까지 쌓여있는데, 하늘이 왜 저렇지? 한참을 바라보던 클로이는 노을을 향해 한껏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왜, 어째서! 갑자기 저녁인 거야!”
서류는 그대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