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제대로 복종하는 법을 배우는 게 좋겠어2020.09.25.
아르네 공작이 경계에 막사를 친 지도 사흘째. 황궁 근위대까지 끌고 왔기에 다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거라고 생각해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공작은 막사만 세워두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공작은 엘리오 소공작과 함께 가볍게 산책하는 것 외엔 막사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다. 기사들은 불을 피우거나 사냥도 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건량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식수는 옆 영지까지 가서 길어오는 듯했다. 차라리 뭐라도 하면 좋겠는데, 오히려 이 기괴한 평화가 더 피를 말린다.
“……대체 뭐 하자는 속셈이지?”
반란군 대장인 룻거는 정찰병이 가지고 온 소식에 수염이 꺼칠한 턱을 연신 문질렀다. 지척에 막사를 치고서 꿈쩍도 하지 않는 공작의 행보에 룻거는 신경이 한껏 곤두서 있었다. 밤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음식이 넘어가지도 않았다. 이건 룻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려 제국의 검이라는 위명이 있는 아르네 공작이 왔다는 소리에 반란군 사이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한껏 예민해진 이들 사이로 하루에도 몇 번씩 시비가 오가고, 고성이 터진다. 이건 길게 끌면 끌수록 반란군의 손해였다. 그러나 공작은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산책까지 한다.
“역시 아르네다 이건가…….”
룻거는 지친 표정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엔 아르네 공작이 머문다는 커다란 막사가 보인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생각은 굴뚝같지만, 무얼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무턱대고 움직이는 건 독이다.
“대장, 어떻게 하지?”
그래서 룻거는 오늘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분간 상황을 지켜본다. 도발하지 말라고 전해.”
“언제까지?”
“공작이 움직일 때까지.”
“대장!”
룻거는 항의하듯 목청을 높이는 부대장, 브리튼을 향해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브리튼. 진정해. 지금까진 굶어 죽는 영지민의 생존권을 위해 싸운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런데, 황명을 받은 공작을 먼저 공격했다간 반역자가 되고 말 거다.”
“하이씨. 진짜. 명분. 명분. 그까짓게 뭐라고. 말장난이잖아. 전부.”
“잊었나 브리튼? 우린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폭도’가 된 것을?”
브리튼은 룻거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선 씩씩거렸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공작의 진영을 기습하자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불만이라는 듯 발을 꽝꽝 굴렀을 뿐.
“힘이 넘치면 나가서 뭐라도 사냥해 와. 아무래도 장기전이 될 모양이야.”
“예예, 어련하시겠습니까. 대장 말씀이니 따라얍지요.”
툴툴거리면서도 브리튼은 재빨리 사냥도구를 챙겨 들었다. 룻거의 말처럼 장기전이 된다면, 식량 확보가 가장 중요하니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밖으로 나서자 뺨을 후려치듯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계절은 빠르게 겨울로 향하는 중이었다.
“겨울을 여기서 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얼얼한 뺨을 문지른 브리튼이 소릴 질러 사냥조를 꾸렸다. 해가 잔뜩 기울어져 오래지 않아 밤이 올 테니 서둘러야 했다.
“다행히 오늘도 이대로 넘어가려나 봅니다. 사냥조를 꾸리네요.”
들고 있던 망원경을 내려놓는 엘리오의 표정은 온화했다.
“좋은 선택이야. 곡식을 여기서 소비했다간 겨울을 나기 힘들지. 기사들이 몰래 사냥을 하지 않도록 잘 지켜보거라.”
“걱정 마세요. 혹시라도 사냥하다 걸리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경고해두었습니다.”
“그들이 고분고분 말을 들을 리 없을 텐데?”
“듣게 만들어 주었지요.”
품에서 단도를 꺼내 핑그르르 돌린 엘리오가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이 분명한 미남자의 미소는 근사했으나 푸른 눈엔 일말의 자비도 없이 사나운 빛이 가득했다. 공작은 엘리오의 말에 옅게 한숨을 쉬었다. 상냥하고 다정한 소공작이라는 건 가면에 불과했다. 엘리오 소공작의 진면목을 아는 건 공작뿐.
“엘리오 적당히 하거라.”
“당연한걸요.”
새파랗게 날선 단검을 품에 갈무리하고 일어난 엘리오는 예의 상냥한 표정이었다.
“혹시라도 클로이 귀에 들어가면 그 귀여운 것이 얼마나 놀라겠어요. 걱정 마세요. 잘 처리 해두었어요.”
“클로이……. 그나저나 그 어린 것이 혼자 잘 있는지 걱정이다.”
내내 반듯하던 아르네 공작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그가 있을 때도 끊임없이 공작저로 암살자며 첩자들이 기어들었다. 그런데 아르네 공작도 없는 지금 공작저는 어떨 것인가.
“흐음…….”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클로이도 제1 사냥꾼인걸요. 너무 걱정 마세요.”
근심하는 공작을 안심시키기 위해 꺼낸 소리였건만, 결과적으론 안 하느니만 못했다. 엘리오의 말에 공작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쯧! 클로이, 고 여리고 귀여운 것도 받아오는 애들 장난 같은 이름이 무슨 소용이라고.”
북부의 사냥꾼들이 들었더라면 눈물을 철철 흘렸을 소리였다.
“클로이도 아르네인걸요. 그리고 로지와 에반도 있고요. 진정하세요.”
엘리오도 역시 그 말엔 동의하나 적어도 공작을 달래는 이 순간만은 지극히 진심이었다. 제국의 검이라는 거창한 별호를 가진 아르네 공작께서 사실은 딸바보라는 사실을 들키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클로이가 표적이 되는 게 큰일인 거다.
“걱정 마세요.”
그래서 공작을 달래는 엘리오는 무척 진지하고 단호한 표정이었다. * * *
“대체 낮에 무슨 일을 하는 거지?”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런 표정이라니, 이런 표정을 두고 보통 걱정한다고 표현한다만.”
레이얼은 거의 네발짐승처럼 기어들어 오는 로이를 보며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어기적거리는 꼴이 어디서 흠씬 두들겨 맞고 온 꼴이라 정말 어이가 없었다.
“정체를 캐겠다는 게 아니야. 로이, 넌 첫날을 빼고 도통 몸이 성할 때가 없잖나.”
“아……. 으. 그러니까 내가 공과 사가 아주 정화악……하다니까? 걱정 말고 시켜!”
“끄으…….”
듬직한 소리와 달리 로이는 소파를 짚고 몸을 일으키며 끙끙 앓았다.
“끄으?”
그는 맹세코 저런 소리를 입으로 내는 사람을 처음 봤다.
“대충 흘려들으시죠. 전하.”
“흘려듣기엔 너무 크잖아. 그런 몸을 해서 어떻게 담을 넘고 보물을 가져오지?”
“대충 잘?”
“퍽이나.”
“무시하지 마시죠. 전하! 이래뵈도 난 제1…….”
“제일?”
무시하는 말투에 발끈해서 그만 제 입으로 정체를 불뻔했다.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제일 뭐?”
“전하의 제일 멋진 부하라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말고 부하 있어? 좀 믿어보라는 뜻이야.”
클로이는 레이얼을 몰아세우듯 눈을 부라렸다.
“보통은 부하가 아니라 보좌관이라고 하지 않나.”
옅은 한숨을 내쉬며 레이얼이 미간을 꾹꾹 눌렀다. 무사히 넘긴 모양이라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그나저나, 로이 대체 어디가 안 좋은 거지?”
또다시 말머리가 제게 향하자 뜨끔한 클로이가 버럭 목청을 높였다.
“말 돌리지 마! 난, 보좌관이 아니잖아. 아니야? 누가 보좌관에게 도둑질을 시켜?”
레이얼은 고개만 설레설레 저을 뿐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침대 옆 협탁으로 가서 무언가를 꺼내왔을 뿐.
“그래. 알겠으니까 앉아봐 부하씨. 좀 봐줄 테니까.”
“아니야. 됐어.”
클로이는 손을 싹싹 내저어 거절했다. 오늘은 로지의 으름장 그대로 집무실 한번 들어가 보지 못하고 온종일 연무장에서 구르다 온 참이었다. 기감이 떨어졌다며 말 그대로 죽도록 굴렀다. 수도에 와서 드레스 입고 부채를 팔랑거리다가 오랜만에 제대로 움직였더니 온몸이 아주 난리였다. 손끝이 벌벌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괴롭긴 하지만 다시 힘이 붙을 때까지 계속 단련해주는 것 말곤 달리 방법이 없다. 요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다. ‘약’ 같은 게 도움이 될 리가 있나. 게다가 눈앞의 이 남자는 특히 눈치가 빠르고 영리해서 여러모로 성가셨다. 괜히 보였다가 뭐라도 눈치채면 골치 아파진다.
“부러지거나 베인 거 아니야.”
“알아.”
“……뭐?”
“부러졌으면 걷지 못할 테고, 베였으면 냄새가 날 테니까.”
냄새에 예민한 편이거든. 날렵하게 잘빠진 코끝을 톡톡 두드리며 레이얼은 웃었지만, 클로이는 도통 웃음이 나질 않았다.
“난…….”
“앉아 로이.”
“전하.”
“앉아. 네 정체 작심하고 캐기 전에.”
이 시오도르 녀석! 어째서 이러는지 뻔하다는 듯 덧붙이는 소리가 정말 얄밉다.
“설마, 이런 식으로 호기심을 유발하는 작전이었다면 꽤 성공-.”
“앉아! 앉, 으으. 앉는다고.”
클로이는 레이얼의 나긋한 협박에 이를 갈며 의자에 앉았다. 무릎을 굽혀 자리에 앉는 순간 근육이 사방에서 비명을 질러댄다.
“흐으.”
“……진짜, 그 몸을 해선 오늘 어떻게 온 거야?”
“잘?”
“그렇게나 내 관심을 끌고 싶은 거냐?”
“어허, 그런 못된 소리는 그만둬 전하. 난 진지하다니까? 잘 왔어. 잘. 안 들키게 잘. 대체 뭐 어떻게 설명하라는 거야.”
툴툴거리는 사이 레이얼은 어느새 손에 들고 있던 병을 열어 손바닥에 덜었다.
“먹어.”
그가 내민 것은 알약 세 알. 클로이는 시시콜콜 따지는 대신 그가 내미는 것을 냉큼 받아먹었다. 바보 도련님 같으니라고. 이런 걸 먹는다고 뭐 좋아질 줄 아나. 속으로 코웃음을 치던 것도 잠깐. 클로이는 전신으로 스미던 동통이 옅어지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잠깐, 이거 뭐야?”
근육통을 낫게 해주는 약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고통이 사라지다니? 클로이는 자리를 박차고 뒤로 훌쩍 물러섰다. 이미 품 안의 단검은 진작에 빼든 상태였다.
“이거 뭐냐고!”
약효과가 돌 정도면 이미 녹아 사라졌을 테니, 토해낼 수도 없다. 클로이가 겨눈 단검을 바라보는 레이얼의 눈빛이 전에 없이 서늘하다.
“빛바랜 영광이라지만, 이렇게 우습게 볼 줄 몰랐는데.”
“이 세상에 이런 약은 없어! 나한테 뭘 먹인 거야!”
“로이. 그 검은 넣는 게 좋겠어.”
“빨리 대답해!”
“로이-.”
말끝이 묘하게 늘어지나 싶더니 클로이는 그대로 메쳐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크윽!”
“칼 넣으라니까.”
이번에도 클로이는 레이얼에게 깔려 완벽하게 제압당했다. 마치 처음 마주쳤던 그날 같지만, 클로이를 내려다보는 레이얼의 시선은 그날보다 사나웠다.
“로이. 넌, 나를 좀 더 신뢰하던지. 아니면 제대로 복종하는 법을 배우는 게 좋겠어.”
“윽!”
그의 무릎이 오므라들며 허리를 사정없이 죄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숨이 막혀 절로 신음이 터졌다.
“뭐가 좋겠어?”
내리뜬 눈꺼풀 아래 색이 옅은 눈동자가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암살자인 너를 살려 친히 거두고.”
“으윽!”
“원한을 가진 너의 심정에 공감하며 재주를 높이 사 계약서도 써주었다.”
사방이 할딱거리는 클로이의 숨소리로 가득하던 그때. 레이얼이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아픈 너를 위해, 통증을 지우는 약도 특별히 내주었건만 돌아오는 게 의심이라니. 이걸 어쩌면 좋을까?”
“그런 약이, 어, 어디있, 어허.”
“일루미넴.”
“뭐?”
이런 개자식을 봤나! 클로이의 눈이 무섭게 치뜨였다. 일루미넴은 유명한 독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