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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정말, 몰랐어? (6/121)

006. 정말, 몰랐어?2020.09.22.

시선에 촉감이 있는 게 아닐 텐데 레이얼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깃털로 쓰는 듯 간지럽다.

‘얼굴 뚫리겠네.’

클로이는 정확히 삼십 분만에 항복했다. 어지간하면 모르는 척 넘기고 싶었는데 어찌나 집요하게 쳐다보는지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탁, 소리 나게 서류를 내려놓은 클로이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복면이 비뚤어지도록 비비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왜?”

지금 왜라고 했어? 이 사람이 진짜. 능청스러운 질문에 기가 차 한마디 쏘아주려고 고개를 치켜든 클로이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

저런 얼굴이라니. 밖으로 빛이 새어나갈까 봐 커튼을 두 겹을 두르고도 불은 최소한으로 밝힌 방 안은 어둑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레이얼은 희미한 빛을 혼자 독식하기라도 한 듯 찬연하기만 했다. 기본 셔츠에 팬츠 차림을 한 남자는 심지어 머리칼조차 흐트러진 모습이었건만, 옅은 어둠을 두르고서도 이목구비가 보석같이 빛난다. 세상에, 보석 같다고? 대체 저런 낯뜨거운 소리를 어떻게 하나 했더니,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클로이는 큰 교훈을 얻었다. 심지어 오빠인 엘리오 소공작은 북부뿐만이 아니라 제국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미남이 아니었던가. 나름껏 꽤 단련된 눈인데도 단번에 홀리는 미모라니! 저렇게 아름다우니 제국을 휘두르는 캐서린 황후같은 ‘미인’을 두고 ‘고작’이라는 소리를 하는 거였구나.

“전하, 대체 사교활동은 왜 접은 거야? 어째서 십 년이나 칩거한 건데?”

클로이는 진지했다. 그저, 연회장에 얼굴을 비추기만 해도 저 경건한 미모에 아무도 저주 같은 소리를 떠올리지도 못했을 텐데. 장담컨대 길롯 따위는 설칠 틈도 없었을 것이다. 망상이 무섭게 뻗어 나가던 그때. ‘툭’ 레이얼이 서류를 내려놓는 소리에 클로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말 몰라서 묻나?”

목소리만큼이나 서늘하게 굳은 표정에 클로이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내부사정을 내가 아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내부사정이 아니라…… 다들 너무 잘 알잖나.”

질문에 질문으로 돌리는 건 클로이가 가장 싫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발끈하는 대신 클로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되묻던 레이얼의 표정이 순간 지독히 지쳐 보여,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칩거가 아니라, 추모였다.”

이럴수가. 클로이는 소리 없이 신음했다. 할 수만 있다면 클로이는 오 분 전으로 돌아가, 멍청한 소리를 하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잘생긴 얼굴에 홀려서 생각 없이 떠들어대는 꼴이라니. 견디기 힘든 자괴감에 얼굴로 피가 쏠리는 느낌이 여실했다. 얼굴을 감싸 쥔 클로이가 앓는 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전하, 미안해.”

웬만하면 시오도르에게 사과 같은 걸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건 수습이 불가능했다.

“혹시, 무릎이라도 꿇…….”

“되었어. 아무도 몰라주는 것을 너 역시 몰랐다고 책할 수는 없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클로이의 손을 잡아 만류하는 레이얼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에게 손목이 붙들린 채 엉거주춤 서 있던 클로이는 문득 그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도 몰라주다니?”

그들은 황태자의 피앙세가 아니었나? 추모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왜냐고?”

레이얼 질문은 마치 클로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황궁에서 금세 또 청혼서를 돌렸거든.”

“그래도 고인의 가문은…….”

“순진하긴. 경사를 앞둔 황가를 두고 누가 감히 망자를 위해 울 수 있겠나.”

분명, 레이얼은 그 순간 웃었다. 클로이가 봤던 그 어떤 모습보다 환하게. 하지만, 그는 클로이가 기억하는 그 어떤 순간보다 사나워 보였다. 사지를 눌러 결박하고 처형을 입에 올리던 첫 만남보다 거칠고 흉흉했다. 괴수 같은 짐승들이 내뿜는 살기를 맞아본 클로이조차 절로 손이 저릿해질 만큼. 빛이 바랬다고는 하나 역시 시오도르다 이건가. 새삼, 그가 먼 옛날 아르네와 등을 맞댄 시오도르의 후손이라는 게 실감 난다. 클로이는 목덜미의 솜털이 올올이 일어서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전하가 추모하셨다?”

“내 피앙세였으니까.”

“아니 잠깐만, 나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 전하.”

클로이의 질문에 레이얼이 턱짓을 까딱했다. 해보라는 뜻이었다.

“그, 그…… 뭣이냐.”

그런데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연이은 피앙세들의 죽음에 황태자가 ‘저주’ 받았다는 소문이 날 정도가 아니었나? 그런데도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저기…….”

“로이, 황가의 청혼은 사실상 명령이란다.”

“뭐?”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클로이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얼얼하고, 손끝이 차게 식는다. 레이얼은 희게 굳은 클로이의 모습에 작게 혀를 차더니 쥐고 있던 손목을 끌어당겼다. 코끝이 스칠 만큼 바짝.

“명령 불복종은 반역이다.”

“…….”

“그리고 반역자는 사형이지.”

새파랗게 눈을 빛내며 속삭이는 레이얼의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클로이는 다짐했다. 반드시 살아남고 말겠다. 이쪽 시오도르에게서도, 저쪽 시오도르에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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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 트기 직전 클로이는 가까스로 아르네 공작저의 뒷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쩌다 보니 분위기가 심란해져 그만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탓이었다.

“후.”

보아하니 피앙세 사건은 저주도, 사고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예고된 암살인가. 물론 북부 제1의 사냥꾼인 그녀가 쉽게 당할 리는 없지만, 기분이 좋진 않았다.

“……사냥은 해봤어도, 사냥감이 되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머릿속이 한껏 복잡했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속이 답답해 한숨을 푹 내쉬던 중에 갑자기 뒷문이 열리며 로지가 나왔다.

“안 들어오시고 뭐 하세요?”

“……어? 로지? 안 잤어?”

“문 열어드린댔잖아요.”

“열어놓고 자라니까.”

“세상에? 여기가 북부인줄 아세요? 여긴 눈뜨고도 코 베어 가는 수도예요. 그런데 문을 열어둔다고요?”

“로지, 로지.”

와다다닥 쏟아내는 잔소리에 클로이가 얼굴이 핼쑥하게 질려 손을 들었다. 항복자세였다. 하지만, 로지는 두 손을 들어 올린 클로이를 못 본 체하며 쉬지 않고 쏘아댔다.

“‘어서 옵쇼, 여기는 재물과 인심이 넘치는 아르네’ 할 일 있으세요? 도둑들이 아주 그냥 제집처럼 들어와 온갖 것을 다 털어버리겠네요.”

“어휴 우리 로지가 퍽이나 그렇게 두겠네.”

“아, 가, 씨.”

“로지, 우리 말은 바로 하자. 제1사냥꾼이었던 로지가 과연 낯선 사람이 들어와 설치게 둘까?”

“…….”

“설령 로지가 못 알아차려도 에반이 모를까? 아니면 일당백이라는 아르네의 기사단이 가만히 있을까?”

로지의 잔소리를 피하려 시작한 말에 클로이는 심란함이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이곳, 아르네는 안전하다. 아……. 나 좀 불안했었나? 클로이는 자신도 몰랐던 속내에 작게 웃었다.

“작작 하시죠. 아무리 그래도 전 문 열어두고는 못 살아요.”

“로지랑 에반 그리고 기사단이 있는데도 불안한 거야?”

“불안이 아니라 늘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게 호위 된 자의 자세죠. 안심은 방심을 부르니까요.”

“물샐틈없이 잘 지키면서.”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할 텐데요.”

마치 여태 무언가를 전력으로 막아온 듯한 묘한 말이었다.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클로이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설마, 밤손님이 꽤 왔다던가……?”

“꽤는 아니고요.”

“허어?”

로지는 이게 좋았다. 굳이 불안하게 시시콜콜 알려주지 않으나 물어보면 적어도 거짓말로 감추지 않는다. 눈을 가리거나, 무턱대고 호도하거나 하는 것을 로지는 몹시 경계했다. 상대를 얕잡아보면, 필패하기 마련이고 자만하면 빈틈이 생긴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몇 명이나?”

“그냥 몇 명요.”

“한 달 전쯤부터?”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클로이는 그런 로지의 태도를 건방지다 꾸짖는 대신, 살짝 웃어주었다. 한 달 전 그녀가 누구와 엮였는지를 생각해보면 답은 금방 나왔다. 황가와 얽히는 건 백번 주의해도 부족하다.

“왜 말 안 했어?”

“이건 제 일인 걸요.”

“로지. 그래도 알려줘야지. 난 로지의 하나뿐인 제자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뿐인 아르네이기도 해.”

“아가씨!”

“멋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당하는 건 싫어. 알면 쉽게 당하지 않을 거고. 난 제1의 사냥꾼이잖아. 애 취급은 말아줘.”

클로이의 말에 로지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건 잠깐이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클로이의 말은 옳았다. 알고 미리 대비하면 확실히 유리하다.

“일단 수도에 올라와 단기로 고용했던 시녀들은 모두 해고했습니다.”

“잘했어.”

기사단과 그들을 부리는 에반. 전담 시녀이자 클로이를 길러낸 로지가 있는 이곳에 암살자 잠입은 거의 불가능이다. 섞여 들어오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데, 그 가능성을 아예 지워버렸다. 하지만, 조금 전 로지는 그랬다. ‘앞으로도 잘 해내야 한다’라고. 그렇다는 건…….

“사람들을 내보냈다니, 인력 중엔 따로 건드릴 사람이 없어 보이는데 그럼 난 뭘 조심하면 돼?”

“이 집이요.”

로지는 산뜻하게 대답하며 그들 앞으로 늘어진 나뭇가지를 뜯어 던졌다.

“이 집?”

로지는 두 번 설명하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꺾어 던진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로지가 끼고 있던 장갑이 까맣게 젖어 번들거린다.

“클로브스의 맹독이죠.”

“이게 어떻게……?”

“오늘 저녁에 병이 날아들었어요. 열댓 개가 날아 들어와 깨지더니 이 꼴이에요.”

확실히 이런 방법이라면, 잠입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후…….”

이, 빌어먹을 시오도르가! 이미 예전부터 늙은이는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몰랐을 뿐. 안으로는 클로이가 밖으로는 엘리오와 아버지가 위험한 상황. 자칫 ‘아르네’의 존폐자체를 걱정해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겁먹진 않을 셈이었다. 뚝. 다시 앞서 나가며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진 나뭇가지를 꺾어버리는 로지를 보며 클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이곳 아르네저는 안전하다. 클로이는 로지의 팔에 슬쩍 팔짱을 꿰며 속삭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로지.”

“어리광부리지 마세요.”

뚝뚝. 손바닥이 까매지도록 돋은 나무를 부러뜨리는 로지를 보며 클로이는 작게 웃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 어디보다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다. 클로이는 이전에도 앞으로도 하나뿐인 제자니까. 한발 앞서 자연스럽게 위험을 확인하는 로지의 모습이 무척 든든하다.

“좋아 안심된다.”

“뭐 그렇게 새삼스러운 반응이에요. 진짜 몰랐던 것처럼.”

“몰랐어.”

클로이는 별생각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오늘 레이얼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아마 끝까지 몰랐으리라. 그리고 에반과 로지 역시 영원히 말해주지 않았을 테지. 어쩐지 곱고 곱게 사랑받는 느낌이라 클로이는 가슴 한구석에 깃털이 잔뜩 날아다니는 듯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진짜, 모르셨다고요?”

생긋 웃으며 되묻는 로지의 목소리가 어마어마하게 살벌했다. 저건, 스승의 얼굴이잖아!

“큰일이네요. 수도에 와계시는 동안 잠깐 쉬셨기로서니, 이렇게까지 둔해지셨을 줄이야. 아무래도 제가 좀 도움을 드려야겠네요.”

“노, 농담이야!”

“날이 밝으면 연무장으로 오세요.”

“로지, 로지?”

뒤늦게 아차한 기분이 들어 클로이가 사정을 해보았지만 로지의 살벌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내내 클로이의 비명이 연무장에서 울려 퍼졌다. 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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