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집착을 부르는 거절2020.09.18.
“로이, 날 위해 그들의 썩어 넘치는 돈을 좀 가져다주겠어?”
그는 서늘한 눈매를 달콤하게 접으며 속삭였다.
“지금 나더러 도둑질을-.”
“해오렴. 로이.”
그녀를 담은 푸른 눈이 몹시 차게 빛이 났다. 이건, 부탁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지배자로서, 그녀를 옭아맨 ‘주인’으로 명령하고 있었다. 이유를 묻는 것도, 거절하는 것도 물론 허락되지 않는다. 클로이는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당혹감을 재빨리 지우고 시선을 떨구었다.
“당신의 뜻대로, 전하.”
한 손은 허리 뒤에 그리고 다른 한 손은 가볍게 굽혀 가슴에 올리고 허리를 굽히는 그녀의 동작은 무척 절도 있고 자연스러워 퍽 우아해 보였다. ‘남성’의 것임에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얼이 눈썹을 슬쩍 치켜들었다.
“로이. 궁금한 게 있는데, 넌 왜 항상 ‘남성’의 예의를 차리는 거지?”
“남성이 아니라 ‘기사’의 예의를 보이는 거야, 난 전하의 사람이니까. 설마 이것도 안 되는 건가? 진짜 개처럼 발치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해?”
“아아…….”
한 방 먹었군. 레이얼은 입안으로 중얼거리곤 어깨를 으쓱했다.
“형제가 있나 보지?”
그의 질문에 클로이의 눈동자가 문득 잘게 떨렸다.
“네 정체를 캐겠다는 게 아니야. 그냥. ‘기사’가 할 법한 행동을 자연스럽게 할 정도면 자주 봐왔다는 뜻인데, 지체 높은 귀족가의 영애가 복면을 쓰고 칼을 들고 다닐 것 같진 않으니까.”
조곤조곤한 레이얼의 말은 몹시 논리정연해서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매번, 사람 깜짝 놀라게 똑똑하시네.”
짜증나게. 티 없이 입을 삐죽인 클로이가 새침하게 덧붙였다.
“영리한 전하는 내 정체를 밝히지 않으시겠다던 계약 조항을 기억할 거라 믿어.”
“걱정 마, 아직 약속을 어기는 무도한 자가 되고 싶을 만큼 호기심이 동한 건 아니니까.”
“저런 야비한 소리를 태연하게 하다니.”
“그러니 시오도르지.”
그는 클로이의 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버렸다. 자조하는 것 같은 말에 클로이가 더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자, 그럼 로이. 달이 졌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내일 다시 보자꾸나.”
“털어오라며?”
“효과적으로 움직여야지. 로이. 어디의 누구에게서 무엇을 언제 가져와야 하는질 알려주마.”
“아하.”
“시간 나면 수도 전도를 줄 테니 지리를 외워오렴.”
“얌체같이 굴지 맙시다. 난, 밤만을 걸었어.”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구나.”
“아무튼, 방심할 수가 없다니깐. 내일 봅시다.”
막, 몸을 돌리려던 클로이는 책장을 가리키는 레이얼의 손짓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쪽으로 가렴. 비밀통로가 있어.”
“……책장 뒤 통로가 있다고?”
“황족에게 허락된 비상통로지.”
안전하고 빠르니 반색할 거라는 레이얼의 예상과 달리 클로이는 그의 제안에 얼굴을 굳혀 정색해선 거절했다.
“싫어.”
“왜?”
“대가 없는 호의는 없으니까.”
“이게 무슨 호의야.”
“알아서 오고, 알아서 나갈 거야. 그리고 잡히면 우리는 모르는 사이야.”
“……로이.”
“시오도르완 이게 맞아. 그리고 난 이게 좋고.”
말을 마치자마자 클로이는 레이얼이 뭐라고 하기도 전 몸을 돌려 뛰어나갔다.
“내일 봐.”
장난스럽게 손 키스를 날린 클로이는 순식간에 허공으로 뛰어내렸다. 몸을 날리기 직전 시선이 마주친 레이얼의 얼굴은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흥.”
귀신같은 솜씨로 황궁을 빠져나간 클로이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레이얼의 굳은 표정을 떠올리곤 작게 콧방귀를 꼈다. 옭아매려는 속셈을 모를 줄 알고? 어림도 없지. * * * 한번 가본 길이라고 전날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돌아오는 게 가능해졌다. 클로이는 쌕쌕거리는 숨을 터트리며 공작 저의 담장을 타고 올랐다.
“내 집, 을, 헉, 내가 왜, 도둑처럼, 헉헉.”
“그러게요.”
“허억!”
툴툴거리던 클로이는 머리 위에서 울리는 때아닌 대답에 화들짝 놀라, 그만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가 깨지는 것 같은 고통이 스몄다.
“아흑.”
엉덩이를 감싸 쥐고는 앓는 소리를 낸 클로이는 눈을 세모꼴로 찢었다.
“로지! 아니 왜 그런 데서 나타나는 거야!!”
“그건 공녀님께서 먼저 설명해주셔야겠어요.”
단 한마디도 밀리지 않고, 단 한 번도 말려들지 않는다. 클로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로지의 다갈색 눈동자를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요새 불면증 있어?”
“아르넬에 시녀로 들어온 후, 단 하루도 잠을 깊이 자본적 없다는 것을 아가씨가 몰라주시면. 전, 몹시, 섭섭한데요?”
마지막에 가선, 꼭 이를 가는 것 같이 한 음절 한 음절을 뚝, 뚝 끊어 말하는 로지는 내려다보는 자세가 아니더라도 몹시 위압적이었다.
“공녀님. 피곤하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는데…….”
“그랬는데?”
“막상 누우니 잠이 안 와서 산책을 좀.”
“굳이 사냥복까지 챙겨입고 말이죠.”
“그, 이 밤에 드레스 차림으로 산책을 하기엔-.”
“구태여 이 넓은 공작저 화원을 두고.”
“내가 잘못했어. 로지.”
클로이는 변명대신, 저와 같은 차림새를 하고 담장 위에 선 로지에게 사과했다. 지금 로지는 ‘시녀’가 아니라 그녀를 북부인으로 키운 ‘스승’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가, 공녀님께 나무를 타고 은신하고 활을 날리고 검을 쓰는 법을 알려드린 건, ‘생존’에 꼭 필요해서였어요.”
내리뜬 눈 아래 시선이 섬뜩하리만치 차갑다.
“하지만 제가 가르쳐드린 것으로 스스로를 위험하게 하신다면.”
“로지.”
“목숨을 걸어 막아야 할까요?”
“로지.”
“아니면, 목숨을 보태드려야 맞을까요.”
매서운 질책에 감겼던 눈이 번쩍 뜨였다. 클로이를 내려다보는 로지의 표정엔 서운함이 짙게 물려 있었다.
“왜, 저에게까지 숨기세요?”
“어제 에반 숨넘어가는 거 봤잖아.”
“공녀님, 어제 에반님의 그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시중을 든 저예요.”
항상 네 편이라는 로지의 에두른 말에 클로이는 울컥했다.
“미안해 로지.”
“적어도 공작저는, 이 집엔 당당하게 들어오셔야죠.”
담에서 훌쩍 뛰어내린 로지의 손엔 두툼한 담요가 들려 있었다. 싸늘한 밤공기에 얼어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며 챙겨 든 따뜻하고 포근한 것은 에반이 건넸던 것처럼 따스했다. 얼마나 기다린 건지, 클로이를 일으켜 세우는 로지의 손은 차게 얼어 있었다.
“내 거 챙기면서 네 건 왜 안 챙겼어?”
“이래야, 미안해서 다음부터 안 그러시죠.”
“……넌 정말 날 잘 안단 말이야.”
눈을 흘기는 클로이의 눈꼬리가 새빨개져 있었다.
“내일부터는 뒷문으로 들어오세요. 문 열어둘게요.”
“아니야, 그냥 내가 알아서-.”
“누가 제집 담을 넘어요. 안 돼요.”
담을 넘지 말라고 말하는 로지의 표정은 드물게도 엄했다. 차라리 나가지 말라고 하는 대신, 돌아올 곳을 만들겠다는 게 그녀답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언제나 ‘클로이’만을 생각하는 것이 로지답다 해야 하나. 클로이는 새삼 코끝이 찡했다. 그리고 로지만큼이나, 아니 로지보다 더 끔찍하리만큼 ‘클로이’를 생각하는 두 남자가 떠올라 목구멍이 따갑고 아렸다.
“문만 열어놔. 그 앞에 지키고 있진 말고.”
“어차피 요맘때 오실 거 아니에요?”
“아, 응? 그렇게 될까?”
일순 로지의 눈초리가 가늘어졌지만, 워낙 순식간이라 클로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좀 일찍 나가셨다가…….”
“아니 그건 안 돼.”
“그럼 좀 일찍 주무시다가?”
“중간에 내가 일어날 수 있을까.”
내내 한시도 쉬지 않던 로지의 입이 꽉 다물렸다. 아침이면 눌어붙은 아교 덩어리보다 더하게 침대에 떨어지지 못하는 클로이를 누구보다도 더 잘았기에 할 말이 없었다.
“빨리 들어가서 자자. 내일 아침에도 봐야 할 서류가 있을 거 아니야?”
로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서류 소리가 나온 이후 그녀의 보폭은 조금 전보다 훨씬 커졌고, 걸음 속도 또한 눈에 띌 만큼 빨라져 있었다. * * * 어제와 같은 무자비한 날이 밝았다. 분명 침대에 기어들어가 이불을 펄럭여 자세를 잡았던 것 같은데, 클로이는 어째서 로지가 제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가씨이!!”
“……어?”
“일어나세요오! 제가 몇 번을 부른지 아세요?”
“뭐? 벌써 아침?”
“벌써라니요. 제가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깨워드린걸요?”
“그럴 리가!”
“절대 그렇습니다.”
로지의 야무진 대답과 함께 클로이는 정신없이 씻고 입고 먹고 마신 후.
“어제 일했는데 어째서 더 많아진 건데!”
훨씬 두툼해진 서류 뭉치를 들고 괴로워해야 했다. 간밤 굴러떨어져 다친 엉덩이가 아려와 로지에게 앓는 척을 해보기도 했지만.
“쿠션을 하나 더 깔아드릴까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클로이는 어제보다 더 많아진 서류를 모두 처리하고 나서야 집무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어으…….”
어깨가 쑤시고, 허리가 아프고 눈이 침침했다. 앓는 소리를 흘리며 비척거리며 걷던 클로이는 어느새, 복도 창을 통해 스미는 햇살이 새빨간 것을 보고 펄쩍 뛰었다.
“아니 뭐 벌써 해가 져! 하루 너무 짧은 거 아니냐고.”
중얼거리는 클로이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짙은 어둠이 깔리자 엉덩이를 움켜쥔 늘씬한 인영이 어기적거리며 공작저를 나섰다.
똑똑.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작은 소리에 레이얼이 보던 책을 내려두고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슬쩍 커튼을 걷어 확인하자, 문을 열어달라는 듯 손을 연신 까딱이는 로이가 보였다.
“이런…….”
유리창을 깨뜨렸다고 통박을 놓았더니, 노크할 줄이야. 의외의 구석에서 착실한 모습이 꽤 귀엽다. 레이얼이 문을 열자마자 로이가 그 사이로 몸을 모로 세워 쑥 밀고 들어왔다.
“아흐 추워.”
몸을 부르르 떨며 그를 스쳐 지나가는 로이의 입술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추수가 마무리되어가는 계절, 밤바람이 하루가 다르게 싸늘해지고 있었다. 정문에서부터 이곳 본궁까지 거리도 만만찮은데 로이는 잠입이니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레이얼은 팔뚝을 비비는 로이를 조금 전까지 제가 앉았던 의자로 가볍게 툭 떠밀었다. 벽난로와 가까워 따뜻하고 의자가 푹신해 앉으면 꽤 안락하다. 아직 시오도르에 대한 경계가 대단하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몸을 녹이지도 않을테니까.
“윽!”
로이의 외마디에 레이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떠밀려 앉은 로이가 터트린 소리는 ‘놀람’과는 거리가 있었다. 뾰족하게 솟은 마른 어깨. 확실하게 구겨진 미간.
“다쳤나?”
레이얼의 질문에 로이는 한참이나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대답을 기다리던 그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
“걱정 마 전하, 내가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하는 편이야. 일엔 지장 없게 잘할 수 있어.”
이성을 잘라먹는 소리가 로이에게서 새어 나왔다.
“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
로이가 손을 살살 저으며 하는 소리에 레이얼은 문득 신경줄이 갉히는 기분이 들었다. 반쯤의 억지와 반쯤의 협박으로 맺어진 관계임을 안다. 하루아침에 ‘믿음’ 같은 게 생길 리 없다는 것도. ‘시오도르’의 성을 달고 있는 한, 쉽사리 경계를 늦추기 힘들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계약서도 써주지 않았나? 그런데도. 아니, 이렇게까지 그를 무자비하게 생각했을 줄 미처 몰라서 입안이 여간 쓴 게 아니었다.
“넌.”
“응?”
“아니다.”
맑기만 한 푸른 눈동자를 본 레이얼은 큰 한숨과 함께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자, 읽어.”
그가 던진 서류가 툭하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로이의 앞에 있는 탁자로 떨어졌다.
“어? 이거 어제 본 건데?”
“또 봐.”
“또? 왜?”
“외울 수 있어?”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대충은 이해했-.”
“읽어.”
그는 ‘레이얼’이 아니라 아직, 비열하고 무도한 ‘시오도르’에 불과했다.
“…….”
“읽어, 읽는다고! 그만 노려봐!”
이것 보라지. 그저 걱정해서 보는 것조차 노려본다는 식이다. 어디가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르는데, 내보낼 순 없다. 몸이 나을 때까지 쉬라는 말을 해 줘봐야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할 게 분명했다. 어제도 비상구를 내준다는 ‘호의’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가지 않았던가. 서운함이 점점 덩치를 불려 말투가 절로 서늘해졌다.
“내가 시킨 일에 대충이라는 마음가짐은 버려.”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알아들었으면, 읽어.”
“기왕이면 외우고?”
“잘 알고 있네.”
“흥.”
팔락, 종이 넘기는 소리와 함께 어제와 같은 밤이 다시 시작되었다. 씩씩거리던 것도 잠시 로이도 레이얼도 곧, 무섭게 집중해 손에 든 종이를 넘기기 시작했다. 특히 속도가 나는 건 레이얼 쪽이었다. 그는 잠깐 사이 어느새 서류를 열 장째 처리하고 있었다. 오늘 내내 서른 장을 겨우 처리한 거에 비하면 엄청난 속도였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이얼은 문득 오전 내내 집중하지 못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로이. 눈앞의 저 못돼먹은 녀석 때문이었다. 그의 호의가 역병인 양 기겁하며 허공으로 몸을 날려 도망친 녀석이 종일 생각나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흐음…….”
어떻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매번, 매 순간 거절만 할 수 있나. 종이를 넘기는 로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얀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