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밤을 나누는 사이2020.09.15.
“로지. 이 앙큼한 것.”
눈물이 그렁그렁해선 클로이가 로지를 흘겼다.
“꾸역꾸역, 아침을 먹인 게 그래서였구나.”
“당연하죠. 지금 아시다시피 공녀님은 유일한 아르네이신 걸요.”
로지 클라크. 이십 년을 아르네에서 일한 시녀는 노련하고 무척 현실적이었다.
“속상해서 식사도 안 하시고 앓아누우시면 정말 곤란해요. 공작님과 엘리오 소공작께서 어제 아침에 떠나신 통에 서류가 착착 쌓이고 있어요.”
“맙소사. 제대로 슬퍼할 시간을 좀 줘.”
“슬퍼하는 거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전 사 년 전에 일 초도 쉬지 않고 울었을 거예요.”
“사 년전…….”
로지의 말에 클로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 년 전이라면, 아르네 대공령에 유례없는 혹한이 불어닥친 해를 말하는 것이리라. 대공령의 많은 이들이 속수무책으로 고립되어 죽음만 기다리던 그때. 로지는 성문을 열고 2층 높이로 쌓인 눈더미에 굴을 파기 시작했다.
“그때, 로지가 일주일 밤낮으로 삽질해서 캐낸 조카가 그렇게 유명한 말썽꾸러기라지?”
“말도 마세요.”
“삽을 들고 눈에 굴을 파서 와준 고모 덕에?”
대답 대신 로지는 반듯하게 접힌 손수건을 클로이에게 건넸다.
“울지 마시고, 펜을 드세요. 공녀님께선 삽질을 해야 하는 게 아니니 얼마나 편하고 좋으세요? 전 그 후로 한 달을 고생했는걸요.”
“흥, 웃기네. 서류작업은 쉬운 줄 알아?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쯤에 나는 지혜 열로 석 달을 앓아 누울지도 몰라.”
“네네.”
성의 없게 대답한 로지가 툭, 하고 클로이의 등을 떠밀었다.
“공작님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 아시죠? 황제 폐하께서 이번 달 안에 정리하라고 하셨으니 이번 주 안에 마무리 지으실지도 몰라요.”
“…….”
“자자 공녀님 서두르세요. 적어도 지혜 열을 내보기라도 하려면, 한시바삐 서류를 보시는 게 좋겠어요.”
조만간 아르네 공작이 ‘당연히’ 귀환할 것이라는 확신을 담은 로지의 말투에 클로이는 무섭게 술렁이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이 기회에 날 부려보려는 속셈은 아니고?”
“어디에, 어떻게 부릴 수가 있는지 알려주시면 적극 참고하겠습니다.”
“왜 이래. 작년 사냥제를 연 건 나였어. 그리고 제 1의 사냥꾼도 나였고.”
“예에, 그러셨지요. 그러나 아쉽게도 집무실에 쌓이는 서류는 검도 활도 필요치 않고, 몸으로 뛸 필요도 없지요. 그저 잘 읽고 철저히 계산하셔서 사인하시면 되는 걸요.”
로지와 투닥거리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집무실이었다. 달칵, 잠금쇠가 풀리며 묵직한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자 늘 공작에게서 풍기던 우디향이 클로이의 비강을 가득 채웠다.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가슴이 일순 무섭게 요동쳤지만, 클로이는 볼 안쪽 살을 질끈 씹는 것으로 끓어오르는 감정을 눌렀다. 사 년 전, 로지는 울지 않았다. 그저 아르네 공작에게 성 밖 주민을 데려와도 되느냐 물었을 따름이었다. 혹한의 추위에 휩쓸려 추가 사상자를 내게 될까 봐 내주는 지원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단신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클로이는 그때의 로지와 달리 곁을 내주는 이들이 있지 않나. 거기에 울기까지 하면 꼴사납다.
“후우.”
긴 숨을 뿜어낸 클로이가 아르네 대공의 의자를 빼서 앉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아르네의 공녀였다. 아버지와 오빠의 생사를 걱정하는 막내딸을 밀어둔 클로이의 표정은 한없이 단단했다.
“제일 급한 것부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로지가 냉큼 서류 여섯 묶음을 내미는데, 두께가 한 뼘이다.
“오늘 오전 안에 처리해주셔야 하는 것들입니다.”
심지어 저 두꺼운 게 집무실 책상에 올라온 서류의 1/20도 안 된다. 골리나 싶어서 로지를 보지만, 웃음기라곤 요만큼도 없는 얼굴이다. 장난이…… 아니야?
“…….”
아까완 다른 의미로 아버지가 몹시 보고 싶어진다. 클로이는 이를 사리물고 잉크병에 펜촉을 담갔다. 역시, 시오도르는 밉상이다. 길롯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그러니 절대 지지 않을 테다. 반드시, 아르네를 멋지게 지켜내 보이리라. 힘을 바짝 줘 펜을 쥔 손가락이 다부졌다. * * *
“안녕히 주무세요.”
잠자리 인사와 함께 로지가 문을 닫고 오래지 않아 침대에 누웠던 클로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로이’가 출근할 시간이었다. 클로이는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왔다. 하루 내내 서류와 씨름해 여간 피곤한 게 아니라 정말, 꿈쩍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에겐 낮과 밤의 약속이 있었다. 아르네 공작가를 이끌어야 하는 공녀의 시간이 끝나고 아버지를 걱정하는 막내딸이 로이의 이름으로 시오도르를 찾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발끝을 세운 클로이는 몹시 조용하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어제완 달리, 오늘부터 밤 나들이는 그녀만의 비밀이다. 황제 암살범으로 현장에서 잡혀 이상한 계약을 맺었다는 것을 들키면, 그녀를 말리던 에반이 로지와 함께 기사를 끌고 뛰어나갈지도 모른다. 말은 저래도 아르네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들이다. 거의 한계에 몰렸을 테니, 어쩌면 얼씨구나……. 얼씨구나 하겠지.
“…….”
절대로 들켜선 안된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막내딸의 심박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클로이는 조용히 곁방으로 움직여 옷장을 열었다. 걸려있는 사냥복을 꺼내 들던 클로이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추수가 끝나고 겨울이 오기 전 황실에서 여는 사냥제에 참석하기 위해 가져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사냥복을 이런 식으로 입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계비에 미친 황제가 설마하니 ‘아르네’도 알아보지 못하고 노망난 짓을 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하…… 작년에, 곰이 아니라 빌어먹을 노인네를 잡았어야 했는데.”
클로이는 옷장 한구석에 얌전히 세워둔 자신의 활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길이 잘든 활은 어둑한 가운데서도 은근한 광택이 흘렀다. 활대를 잡고 어깨를 늘인다는 기분으로 뒤로 힘껏 잡아 빼자 활시위가 무섭도록 늘어지며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찌이이이익. 화살도 목표물도 없지만, 시위를 당기는 클로이의 눈빛은 더없이 형형했다. ‘몰이’하겠다며 단신으로 황궁에 뛰어든 건 허세가 아니었다. 그녀를 가르친 로지는 심드렁하게 굴었으나, 제1 사냥꾼이란 건 굉장히 명예로운 호칭이었다. 칼날 같은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맥을 두른 아르네 영지는 척박하고 위험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 터를 잡고 사는 짐승은 이미 괴수에 가까웠다. 그런 것을 겨울 사냥에서 가장 많이, 가장 큰 것으로 잡은 것이 바로 그해의 ‘제1 사냥꾼’이 었다. 사냥꾼은 특히나 체격 좋고 근력도 남달랐다. 그런 이들도 평생에 한 번 받기 어려운 게 바로 ‘제1 사냥꾼’임을 고려하면, 성년이 되던 해 나선 사냥에서 단숨에 그 명예로운 호칭을 거머쥔 클로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법한데. 그런데. 그런 클로이를 시오도르가 자꾸 눈이 뒤집히게 한다. 제 아버지인 아르네 공작은 ‘패트릭 시오도르’가 계비에게 미치기 전 그 누구보다 자애로운 황제였음을 알아 참을지 몰라도 그녀가 기억하는 황제는 그냥 미친놈이었다. 참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절대, 가만 안 둬.”
아르네의 두 남자는 당연히 무사하게 돌아오겠지만, 클로이는 이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감히 신의를 저버리고 아르네를 사지로 몬 시오도르에게 값을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마지막 순간, 황태자가 약속을 잊고 제 핏줄을 챙겨 무르게 군다면. 찌이이익. 시위를 당기는 이 손가락에서 갑자기 힘이 풀리는 불상사가 날지도 모르겠다. 후우. 끓어오르는 진득한 숨을 풀어 놓으며 클로이는 천천히 팔을 내렸다. 쥐고 있던 활을 옷장 안쪽에 얌전히 세운 클로이는 능숙한 손길로 가죽 허리띠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가죽 신발을 챙겨 신고 복면을 쓰는 것까지 일사천리였다. 활을 겨눌 때 창밖으로 보이던 달이 어느새 훌쩍 솟아 있었다. 약속한 밤이 왔으니 서둘러야 했다. 그녀는 누구와 달리 변함없는 긍지를 걸었으니까.
“이런?”
책을 읽고 있던 레이얼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글자가 어둑해 보이기에 눈이 침침한 건가 해서 고개를 들었건만. 생각지 못하게 눈이 마주쳐 레이얼은 지금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언제 온 거지?”
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었다. 심지어, 저 창은…….
“유리를 깼어?”
“만나기로 해놓고, 잠그면 어떻게 해?”
“어떻게?”
“어떻게 깨긴, 이거로 콕.”
그의 말에 눈매를 곱게 접은 로이가 예의 단검을 꺼내 보였다.
“단검으로 소리도 없이 유리를?”
“설마, 물어내라고 하는 거 아니지? 기사들이 자꾸 왔다 갔다 하는 통에 밖에서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고.”
겁났단 말이야. 작게 덧붙이는 소리엔 말과 달리 위기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저걸 뭐라 둘러대라고…….”
“아침에 화병이라도 던져.”
“이유는?”
“벌레가 있었다?”
영리하고 재기 넘치는데 이상하게 작은 부분에선 영 허술하다.
“정말 거짓말 못 해.”
작게 한숨을 쉰 레이얼이 보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던 이가 왔으니 고대하던 일을 해보…….
“키가 상당히 크네?”
그의 생각은 때아닌 소리에 뚝 끊겼다. 로이의 새파란 시선이 그의 정수리에 닿아 있었다. 구두를 벗어 던진 차림이라지만 클로이는 북부 태생답게 키가 꽤 큰 편이었다. 1미터 75센티미터인 그녀는 제대로 성장하고 구두를 신으면 어지간한 남자들과 눈높이가 비등했다. 그녀를 제대로 내리뜬 눈으로 보는 남자는 혈육 외엔 드물어 진심으로 감탄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놀랄 만큼 내가 왜소해 보였나?”
레이얼은 그녀의 반응에 외려,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빛이 바랬다지만, 시오도르는 그 옛날 아르네가 등을 허락한 유일한 기사였다.”
“아아. 뭐.”
그의 말에 클로이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옛적의 무용담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황태자가 소문과 달리 ‘얼굴 미인’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기야, 체중을 실어 장골을 누를 때 다리가 으깨지는 줄 알았지. 클로이는 그제야 그가 ‘완벽하게’ 자신을 제압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타고난 골격에 노력까지 겸비되었다. 뭐 이런 건가. 새삼스럽지만 그가 예쁘기만 한 고귀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기분이었다.
“이해했으면, 여기에 좀 앉지. 오늘은 봐둬야 할 서류가 있어.”
“서류?”
“그럼 이게 뭐로 보여?”
질겁하는 클로이 앞으로 레이얼이 밀어주는 두툼한 종이 뭉텅이가 놓였다. 한 뼘이 조금 안 되는 종이 뭉텅이는 클로이를 핼쑥하게 질리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 잠깐만, 내 사람이 되라는 게 서류작업이었어? 미안한데 난 까막눈…….”
“이거 다 읽어야 돌아갈 수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텐데?”
“……이게 뭔데 전하.”
마치 더러운 걸레를 건드리듯 손끝으로만 종이를 툭, 밀어친 클로이에게 레이얼이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국 내의 모든 귀족의 명부와 계파, 그리고 관계도를 정리해둔 거야.”
“아, 아니 잠깐만 그걸 지금?”
“지금 읽어. 외우면 더 좋은데…….”
“미쳤어? 이거 두께가 한 뼘이라고.”
“그러니까 외우길 바라진 않을게, 대충 이해라도 해둬.”
“……수많은 귀족이 서로 무슨 사이인지 어떻게 얽힌 건지 알려면 외워야 가능한 거 아니야?”
“외우면 더 좋다니까?”
“이 많은 걸?”
“그러니까, 외우는 걸 바라진 않는다잖아.”
“…….”
닥쳐. 외우라는 강요보다 더한 소리에 클로이의 눈꼬리가 무섭게 솟았다. 이를 아득바득 갈며 하루 내내 손에 들고 있던 것과 같은 재질의 종이를 막, 쥐었을 때였다.
“아참, 조금 전에 까막눈이라고 하지 않았어?”
정말 거짓말 못 한다니까. 다 들리게 덧붙이는 말이 정말 얄밉다. 빌어먹을 시오도르. 반지르르해서 광이 나는 흰 피부가 이렇게 얄미운 거였나.
“하아…….”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쉰 클로이가 재빨리 빼곡하게 글이 적힌 종이를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네 시간 후, 창백하게 질린 클로이가 마지막 종이를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롯, 길롯, 길롯!!! 대체 얼마나 작위를 팔아먹은 거야!!! 올해 승인된 단승 작위만 백 건이 넘는다고!!!”
“작위를 팔아먹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로이?”
“그게 뭔…….”
무심코 중얼거리던 클로이는 마주한 레이얼의 미소가 몹시 섬뜩하게 느껴졌다. 들으면 안 돼!
“아냐, 아냐아냐, 잠깐만. 나 안 들어도 괜-.”
어쩐지 등골이 스산해지는 기분에 클로이가 마구잡이로 손사래를 치며 물러날 때였다. 턱을 괸 레이얼이 한없이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들이, 전부 길롯에 연을 댔다는 거지.”
“그, 그게 뭐?”
“뭐냐니, 네가 경계하는 ‘미녀’가 부리는 ‘돈’이야. 막아야 하지 않겠어?”
“잠깐만, 지금 그 말은?”
“길롯에게서 작위를 사간 녀석들의 넘치는 돈을 내게 가져다주렴.”
믿기지 않는 소리에 클로이의 턱이 툭, 떨어졌다.
“탈탈. 털어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