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3. 맨살에 닿은 입술 (3/121)

003. 맨살에 닿은 입술2020.09.11.

“누구냐니.”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레이얼이 짧게 웃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지.”

당황했을 테지. 암살이나 여타의 위협으로부터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황가엔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전통이 있다. 그중 하나가 황제의 침실은 황태자가 쓰는 것인데, 외부인이 알 리가 없으니 황제를 기대하던 침입자가 그를 보고 당황하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그는 첫 피앙세를 잃고 조의를 표하느라 모든 사교 활동을 접지 않았나. 연이어 여섯을 잃어 어쩌다 보니 칩거가 되고 말았다. 10년의 세월을 세상과 단절해 살았으니, 그가 황태자인 것을 몰라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곳은 황궁이다. 그런 곳을 침입해서 질문하는 태도가 묘했다.

“고압적이었지.”

완벽히 제압당한 상태였건만 오히려 그를 내리깔아 보는 듯한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조차도 뒤늦게 위화감을 깨달았을 정도였다. 몸에 밴 자연스러운 하대와 수세에 몰려서도 당당하기 짝이 없는 모습. 게다가 황가의 사정을 세세히 들여다보는 명료한 말투와 순간순간 손끝을 가지런히 모으던 지극히 우아한 손놀림은 암살자라 보기 어려웠다. 마치, 제대로 교육받은 레이디같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레이디가 단신으로 황궁에 침투할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 다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처음 붙들었을 때 얼굴을 가린 것부터 벗겼어야 했는데. 이젠 그럴 수 없어 영, 아쉽다. 그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어땠을까? 그의 것이 되지 않을 바에야 죽여버리겠다는 잔혹한 선언을 들은 그녀에게서 쥐어 짜낸 항복에 너무 들뜨지 않았다면 말이다. . . .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네.”

“이왕이면, 기꺼이라는 말로 영광을 자처해보는 게 어때?”

“기꺼이라는 말을 끌어낼 자격부터 갖춘 뒤에 다시 이야기해.”

그의 말에 대꾸하는 여자의 두 눈에는 새파랗게 불이 올라 있었다. 허탕 친 거로 부족해 덜미가 붙들렸으니 적잖이 분했던 모양이리라. 황태자에게 보내기엔 몹시 불경한 눈빛이었으나 레이얼은 나무라는 대신, 그 심사를 헤아려 모르는 척 미소로 넘겨주었다. 제 것을 아낀다는 건 허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 사람이었다. 배신하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눈감아 줄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이미’라는 의미를 알고 있다. 충성은 사람을 성장하게 하지만, 분노는 사람이 가진 능력을 뛰어넘게 하고. 충성엔 명분이 필요하지만, 분노엔 맹목이 따랐다. 레이얼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가 없는 건 아니나 사람이 아쉽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계비, 캐서린 길롯은 마냥 예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천진하고 화려한 미소로 황제의 마음을 사고 달콤한 속삭임으로 황제를 부추겼다. 캐서린의 속삭임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크게 번져나갔다. 말단직에 제 가문인 ‘길롯’을 심는 것을 시작으로, 어느샌가 궁내부 요직은 길롯의 직계와 방계로 가득 차 있었다. 길롯이 파고든 자리는 하나같이 레이얼의 사람들의 것이었다. 레이얼의 세력이 어떻게 몰락하는지 똑똑히 본 귀족들은 몸을 사리느라 바빴고. 노골적이고도 집요한 경계에 그의 입지는 날로 좁아지다 못해 위태로웠다. 이대로라면, 캐서린 황후가 낳은 황자 ‘내쉬’에게 황위를 빼앗기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러던 차 뜻밖의 곳에서 요긴하게 부릴 이를 얻었으니 뭐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자꾸 웃음이 샌다. 물론, 상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부루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여자에게서 눈빛만큼이나 부어터진 목소리가 새나왔다.

“그만하면 승리를 충분히 만끽했을 테니 이만 계약서를 쓰는 것이 어떠신지요. 레이얼 전하.”

“계약서?”

“설마, 밑도 끝도 없이 개처럼 부릴 생각이었어?”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제법 영리하군.”

“칭찬 감사합니다만, 빨리 움직여주시겠습니까? 저도 일단은 돌아갈 곳이 있는지라 느긋하기가 힘들군요.”

허리를 굽히며 손을 뻗는 건 귀족식 재촉, 그녀는 두말할 나위 없이 우아했다.

“하…….”

굽혀진 고개 끝과 살짝 보이는 동그란 정수리는 더없이 공손했지만, 실상은 절대 그렇지 않다. 툭, 툭 튀어나오는 존대는 빈정거리기 위함이었으며 내리깐 눈꺼풀 아래 시선은 몹시 오만하다. 황족시해의 혐의를 물어 죽일 수도 있다고 위협당하는 순간에도 그녀는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제 안위를 챙기고 있었다. 맹랑하다는 생각도 잠깐. 레이얼은 어떤 상황에서도 손해를 최소로 하려는 태도에 오히려 한층 마음이 흡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것, 아니, 내 사람이라 생각해 모두 다 좋아 보이는 것이 팔불출답다 싶었지만. 야무지고 능력 있는 수하가 사랑스러운 건 당연한 거 아닐까.

“어차피, 네 목숨은 내 것인데 달리 계약서에 적을 게 있을까?”

침실 옆 협탁에서 종이를 꺼내든 그가 슬쩍 떠보듯 말을 꺼냈을 때였다.

“시오도르다운 발언이지만, 레이얼 전하는 정도를 지킬 거라 믿습니다.”

“정도?”

“나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니까?”

“단검을 들고 황제의 침실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네 목적이 훤하게 드러나지 않나?”

“내 목적이 뭔데?”

“야밤, 검을 들고 온 자의 불측한 행동엔 뭐가 있겠나?”

철저히 ‘암살자’로 몰아가는 레이얼의 말에도 그녀는 단 한 번도 밀리지 않았다.

“호신용이지, 호신용. 삼엄한 이곳에 발을 디디려면 나도 최소한의 방어구는 필요하잖아?”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럴싸한 거짓말을 태연하게 내뱉는다. 배포도 재치도 순발력도 그 어느 하나 흡족하지 않은 게 없다.

“검을 들고 온 불측한 자는 아직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는데?”

암살과 도둑은 그 죄질이 엄연히 다르다. 레이얼은 제 죄를 지능적으로 깎아내리는 말에 흥, 하고 작게 코웃음을 쳤다.

“나를 깨우려 하지 않았나?”

“보물이 어딨는지 물어보려고.”

“그렇게 나오시겠다?”

“적당히 합시다. 가진 것도 많은 분께서 굳이 나까지 욕심내서 될 일이야?”

침대 옆에 마련된 티테이블로 걸어가 자리를 잡고 앉은 그녀가 푸른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휘어 뜨렷다.

“가진 것 많은 레이얼 전하, 우리 살살합시다. 응?”

그렇게 시작된 계약서 작성이었다. 어차피 레이얼도 ‘이미’ 황실에 무언가를 당했다는 그녀를 고약하게 부릴 생각은 없었다. 기한은 황제가 물러날 때까지, 일은 밤에만.

“명령을 이행하는 건 뭐든 재량껏. 하지만 살인은 안 돼.”

“……나도 그리 바라는 건 아닌데, 상황이 그렇게 몰아갈 수도 있잖아?”

레이얼은 잔뜩 독오른 푸른 눈동자를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살인은 안 돼. 대신,”

“대신?”

“네가 살인을 결심할 만한 상황이 닥친다면, 반드시 그보다 훌륭한 복수를 약속하마.”

이를 갈며 죽이고 싶어 하는 게 누군지 아는 레이얼은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약속을 남겼다.

“전하. 그 약속 꼭 지켜야 할 거야.”

“빛이 바랬다지만, 시오도르의 영광을 걸고 맹세하마.”

“좋아.”

“자. 그럼 여기에 이름을 쓰렴.”

그가 깃펜을 건네자, 답지 않게 급소라도 찔린 듯이 어깨를 움찔 떨며 놀란다.

“이름을 쓰라고?”

“설마, 한배를 타게 된 마당에 감출 생각이었나?”

“아, 아니 그건……. 잠깐만, 추가 조항이 필요해.”

“무슨?”

“내 정체에 대해선 묻지 말 것.”

“계속 이 채로 있겠다고?”

“무작정 믿음을 강요하는 건 너무하잖아. 시오도르.”

굳이 그를 시오도르라 부르는 이유야 뻔했다. 가해자의 성을 쓰는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순 없다는 에두른 경계. 결국 시오도르인 레이얼은 그녀가 ‘로이’라는 급조한 티가 나는 이름을 서명으로 쓰게 둘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복면 아래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

“내일 밤, 이곳에서 다시 보지.”

“알았어.”

“……그런데 로이, 네가 올 거란 걸 나는 어떻게 믿지?”

“전하는 내게 빛바랜 영광을 걸었지만, 나는 변함없는 긍지를 걸겠다고 하면 안심되나?”

말을 마친 ‘로이’는 서슴없이 그에게 한 무릎을 꿇어 손을 내밀었다. 기사가 충성을 맹세할 때의 자세였다. 레이얼이 손을 내밀자, 손끝을 부드럽게 당겨 잡은 ‘로이’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16566372410572.jpg

  손등 위에 남기는 입맞춤이 너무도 경건해 레이얼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내일. 이맘때쯤 오지.”

짤막한 인사와 함께 로이는 가볍게 발을 굴러 테라스로 뛰어나갔다.

“로이! 잠깐!”

기사를 피할 길을 알려주려 황급히 뒤를 쫓았으나 레이얼이 테라스에 도착해서 본 것은 크게 휘청이는 나뭇가지뿐이었다. 마치, 꿈이라도 꾼 듯. 로이는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꿈이라…….”

불과 두 시간 전인데, 정말 꿈이라도 꾼 것 같다. 감은 눈을 뜬 레이얼이 느릿한 시선으로 텅 빈 방 안을 쓸었다.

“깜찍하기도 하지.”

벌써부터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다니, 정말 제법이란 말이야. 손을 들어 올린 그가 계약서를 넣어둔 가슴께를 툭툭 두드리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바스락. 톡톡 두드릴 때마다 나는 소리가 꿈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해 듣기 좋았다. * * *

“클로이 아가씨! 일어나세요. 벌써 일곱 시예요.”

아침 해가 뜨자마자 들이닥친 로지가 겹겹이 쳐놓은 커튼을 걷으며 목청을 돋웠다.

“으으, 로지.”

“네네 아가씨.”

“나, 어젯밤에 나가는 거 봤잖아.”

“그래서 설마, 더 주무시겠다는 건가요?”

어째, 으름장 놓는 것 같은 목소리에 클로이가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슬쩍 들어 올렸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선 로지는 역광에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허리에 보란 듯이 얹은 팔이라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쳐들린 턱끝이 아주 건방져 보였다.

“……뭔데.”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클로이가 아쉬워질 거라는 태도였다.

“안 일어나실 건가요?”

“으으, 로지이, 뭐냐고오.”

아교칠이라도 해둔 듯 떨어지지 않는 머리를 간신히 베개에서 떼어낸 클로이가 앓는 소리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세수부터 하시죠.”

“로지.”

“그리고 식사를 하신 후에 말씀드릴게요.”

“로지.”

“네, 아가씨.”

“감히 피곤한 주인을 일으켜, 세수시키고, 깔깔한 입에 아침을 떠넣는 만행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야.”

“아가씬, 저를 이십 년이나 겪고도 모르시나 봐요.”

“거대한 이유여야 한다고. 나 지인짜 피곤하거든.”

“알아 모실 테니, 이만 침대에서 내려오세요.”

아, 로지는 정말 가차 없어. 들리게 중얼거린 클로이는 뺀질거리는 말과 다르게 한없이 상냥한 손길로 저를 시중드는 로지의 손아래서 흐물거렸다. ‘공녀’로 살겠다며 호언장담까지 한 이상 야무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으나, 자다 말아서인지 오히려 더 피곤해 눈을 뜨고 있기도 벅찼다. 어떻게 씻었는지도 모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로지가 건네는 아침까지 싹 비우고 나자 간신히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았다. 클로이는 잔을 들어 입을 가신 후, 내내 자신의 곁을 지키던 로지를 불렀다.

“그래서 뭐야.”

“제가 전달할까요? 아니면 집사님께 들으시겠어요?”

예사롭지 않은 서두에 괜히 가슴 한구석에서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인데 에반까지 나와.”

“어떻게 하실래요?”

“에반 불……아니야, 뭔데?”

“전서구가 왔어요.”

“그런 게 왜……. 전서구?”

낯선 단어에 눈을 깜빡이던 클로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가 보내신 거지? 왜! 뭐, 무슨 일인데?”

“전서구가 물어온 건, 편지 두 통이에요, 에반 집사님과 아가씨께 각각 한 통씩 보내오셨어요.”

로지는 흥분한 클로이를 달래며 시간을 끄는 대신, 재빨리 탁자에서 편지를 가져다주었다. 수신자에 적힌 ‘클로이 디 레나나 아르네’라고 눌러쓴 필체가 눈에 익었다. 레나나라고 쓸 때 ‘기쁘다’는 뜻 그대로 가볍게 날려쓰는 건 그녀의 아버지, 아르네 공작 특유의 버릇이었다. 하지만 클로이는 공작의 편지에 웃지 못했다. 편지는 구겨져 있었고, 그녀가 제대로 본 게 분명하다면 봉투에 있는 검붉게 말라붙은 이 자국은,

“피?”

불쾌한 상상에 불시에 머리끝까지 쭈뼛하게 소름이 오르고, 발이 휘청이고 말았다. 로지는 비틀거리는 클로이를 붙들곤 더없이 단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반 집사님의 말로는 공작님은 아직 무사하시대요. 소공작께서도요.”

“……아직이라는 말을 쓰면 어떻게 해.”

“공작님께선 곧, 레바튼으로 들어가신대요. 아마도 다음번 소식은 일이 마무리된 후가 될 거라고 한동안 연락이 없어도 걱정하지-.”

“뭐? 레바튼?”

남부의 곡창지대를 읊는 클로이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새되게 울렸다.

“왜 이렇게 빨리!”

레바튼, 남부의 제일가는 곡창지대이자 지금은 민란의 주동자 룻거가 점령하고 있는 영지. 그리고 황제가 친히 내려보낸 ‘사지’였다. 중앙인 수도에서 사흘 거리. 전력으로 달려도 만 하루가 걸리는 곳이다. 클로이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인 건 바로 그때였다.

“설마, 전력으로 달리신 건가? 그래서 전령이 아니라 전서구를 날린 거야?”

“…….”

로지의 침묵이 긍정임을 클로이가 모를 리 없었다.

“뭐가 급해서? 기사단이 따라잡을 시간을 벌어주-.”

“일반 기사도 아니고, 근위대의 눈을 가리긴 어렵죠.”

“……근위,대? 어제 그런 말은 없었잖나.”

“명령서에 없던 내용이에요. 어제 밤에 출발한 기사단으로부터 근위대를 확인했다는 전서가 왔어요.”

이어지는 로지의 말에 클로이는 정신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언제나 영리한 빛을 뿜던 푸른 눈은 벌겋게 물들어 젖어버렸고,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는 흥분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근위대는 길롯가의 개가 된 지 오래지 않나?”

중얼거리는 클로이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차라리, 단신으로 가셨다면 나았을까. 앞뒤로 적이라니…….”

정말, 아르네의 끝을 보겠다는 건가. 쏟아지는 절망에 클로이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