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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내 것이 되어주렴 (2/121)

002. 내 것이 되어주렴2020.09.08.

“넌, 누구냐.”

사지를 단단히 붙들려 완벽히 제압당한 상태에서도 당당하기 짝이 없는 저 눈빛만큼은 가히 일품이라 할 만했다. 자객 주제에 저를 심문하는 듯한 모습에 레이얼은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왜 웃는 거지? 웃어넘길 생각 말고 대답해!”

발끈하는 목소리는 앙칼졌지만 발성이 깨끗해서 듣기 좋았다. 슬쩍 비트는 손목을 옭아매듯 야무지게 움켜쥔 레이얼이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질문 그대로 돌려주지. 넌, 누구지? ‘황제’를 노리는 암살자가 진짜로 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남자의 목소리는 여유로웠고, 행동은 느긋했다. 심지어 암살자라고 발음할 때 남자는 어깨를 잘게 떨며 웃기까지 했다. 절대적 우위를 완벽히 점한 승자의 오만함이 저런 걸까. 클로이는 자신을 누르고 있는 남자와 시선을 맞추며 손을 가볍게 털었다.

“아파. 좀 놓고 말해. 설마 내가 겁나?”

“뻔히 속셈이 보이는 도발인데, 넘어갈 필요가 있나?”

남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보통, 오만함은 방심을 부르기 마련인데 남자는 철저했다. 이 주도면밀함은 몸에 밴 신중함일까, 그도 아니면 영리함일까. 그게 뭐든 클로이에겐 좋지 못한 소식이다.

“흠.”

클로이는 자신과 꼭 닮은 시린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잠깐사이 바짝 마른입을 혀끝으로 축인 클로이가 그를 불렀다.

“늦은 밤 황제의 침실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미인이라니……. 그댄, 미동인가?”

“그런 식의 칭찬은 처음이라 신선하군.”

“미동이 아니야?”

마치 흥미가 돋는 듯 미소를 지어보지만.

“굳이 가르자면, 이성애자일까……?”

남자의 속삭임은 영락없이 권태로웠다.

“대체 뭐가 궁금하신 걸까?”

“그쪽.”

“왜?”

“내가 상황이 지금 좀 그렇잖아.”

농담하듯 가벼운 말투였으나 사실 클로이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아하, 좀 아쉬우시다?”

산뜻한 대꾸와 달리 남자는 손목을 거머쥔 손에 힘을 더했다. 관절 이음새가 꾸욱, 졸리며 가뜩이나 아픈 손목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감각이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래 끌면 무조건 손해였다. 빨리 빨리. 설득이 불가하다면 지금이라도 팔 하나 내줄 각오를 하고 구르는 게 나으리라. 살짝 조급한 마음에 클로이는 남자를 몰아붙이듯 말을 쏟아냈다.

“취향이 뭐야? 돈? 미인?”

“알면……?”

“미끼로 쓰려고.”

“취향이 왜 이렇게 고루해?”

“고루하다니?”

빈정거리는 말투에 클로이의 얼굴이 굳었다.

“이 세상에 미인과 돈의 조합만큼이나 강력한 게 있을 것 같아?”

“고작 그 따위가?”

작게 코웃음을 치는 남자의 시건방진 태도에 클로이는 순간 울컥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련님.”

“도련님?”

“네가 고작이라고 부르는 것에 역사상 얼마나 많은 파란이 일어났는지 모르나?”

“그건-.”

“멀리 갈 것도 없지. 지금 이 제국도 돈을 탐하는 미녀에게 흔들리고 있잖나?”

“뭐?”

가면을 뒤집어 쓰기라도 한 듯 시종일관 여유롭던 남자의 얼굴이 깨진 건 바로 그때였다. 그러나 클로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남자는 클로이를 결코, 고작이라는 말로 우롱해서는 안 됐다. 그가 고작이라고 부르는 것에 오늘 아르네는 사지로 내몰렸다. 유일한 아르네가 될지도 모르는 클로이는 그래서 분노했다.

“왜, 아니라고 해보시지?”

“꽤 위험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나?”

“시오도르의 영광이 사그라들고 있다는 건 알아.”

“큰일 날 소리.”

“넌, 시오도르의 영광이 영원할 거라 믿었나?”

도발하듯 되묻는 클로이의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더없이 차갑게 빛났다. 남자는 말이 없었다.

“빛바랜 영광 아래 사방이 신음하고 있어.”

“그래서, 네가 시오도르를 처단하기 위해 왔다는 건가? 단신으로?”

이번엔 클로이가 침묵했고 남자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어리석긴. 네가 한 짓은 결국-.”

“한 짓? 내가 뭘 했는데? 누구와 달리 난 아직, 아무 짓도 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부터 죄인 취급이야?”

“아직이라…….”

클로이의 말을 곱씹듯 중얼거린 남자가 서서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넌 ‘이미’ 무슨 일을 당한 거군?”

“쉿. 사람 말하는 데 끼어드는 게 아니란다. 황궁 예법이 보기보다 까다로운데, 넌 한참 고생하겠구나.”

‘이미’이라고 중얼거리는 남자의 말에 뒷머리를 쾅, 소리 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클로이는 그만 ‘공녀’의 말투를 사용한 것도 모를 만큼 당황해버렸다. 실수였다. 짧은 단어 하나 흘려듣지 않고, 이런 식의 유추를 해낼 줄이야. 몹시 주의 깊은 성격에 영리한 머리를 가진 남자는 여러모로 위험했다.

“단신으로 황궁을 뚫을 정도의 실력에 ‘시오도르’와 ‘이미’의 뜻을 아는 자라…….”

나직한 남자의 읊조림에 온몸의 솜털이 삐죽 솟았다. 클로이의 온 감이 외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정말 위험해, 도망쳐! 클로이는 제 감을 언제나 전적으로 믿었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더 할 거 아니면, 이만 비켜줘.”

“어쩔까…….”

붙들린 손목을 항의하듯 비틀며 하는 말에 남자는 빙글거리던 것관 달리 선선히 손을 놓아주었다. 결박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사지로 피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으…….”

작게 앓으며 클로이가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물러나는 것 같던 남자가 순식간에 클로이를 다시 그의 두 팔 아래 가두었다.

“너!”

“내가 누구냐고 물었지?”

들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머리 양옆을 짚은 남자의 두 팔이 마치 감옥의 창살 같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남자는 어린 새끼를 품듯, 클로이를 제 그림자 아래 가두고 느긋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황태자다. 지금 네 위에 있는 자.”

생각지 못한 말에 클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올려보았다. 지척에서 시선이 얽히는 순간 그녀는 작게 신음하고 말았다. 각도에 따라 다르게 빛나던 벽안과 달빛 아래 유독 희게 보이던 남자의 백금발이 코앞에 두니 제대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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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백금발이 아니다. 황족만이 가진다는 눈이 부실만큼 찬란한 은발. 황가의 일족중 벽안에 은발을 가진 청년은 황태자가 유일했다.

“황태자. 레이얼 시오도르.”

얼굴 한 번 못 본 그녀의 약혼자였다. 착잡하게 읊조린 소리에 레이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게 나야.”

입꼬리를 늘어뜨려 짓는 그의 미소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참 달았다. 황제의 침실에 있는 미인이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무려 황태자일 줄이야. 골치 아프게 됐다. 낭패감에 얼굴을 굳힌 클로이를 뭐라 착각한 건지 레이얼이 전에 없이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내 밑으로 들어오겠나?”

아스라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와 고막을 달착지근하게 울리는 목소리. 그는 명령을 달콤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까딱하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복면을 쓰고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미인에게 홀린 바보 같은 표정을 들켜 휘둘리고 말았으리라.

“이미, 밑에 깔아두고 더한 바닥을 원하면 땅에 묻겠다는 소리야?”

“말 돌리는 게 어설퍼, 그리고 난 진심이다.”

“…….”

“하나보다는 둘이 낫고.”

“싫어.”

노골적인 지적에, 클로이 역시 솔직하게 굴기로 했다.

“시답잖은 하나보다야 황태자 쪽이 조금 더 강력하지.”

“싫다고 말했-.”

“게다가 난 내 것을 몹시 아낀단다.”

그는 클로이의 두 번째 거절은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설마, 나와 그분과의 관계를 모르는 건 아닐 테고.”

황제와의 불화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말에 클로이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아아, 너도 내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왜? 곁에 있다가 내 피앙세들처럼 금방 죽을 것 같아?”

가볍게 묻는 듯하지만, 저주를 읊는 그의 얼굴은 설핏 굳어 있었다. 쯧, 작게 혀를 찬 클로이는 짤막한 거절 대신 최대한 배려를 하기로 했다.

“절대, 전하가 저주받았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믿어서도, 우방이 필요 없어서도 아니야. 그저 이쪽도 사정이 있어서 아쉽지만 거절하는 거야.”

“진짜 아쉬운 건 맞고?”

“그래.”

아쉬웠다. 그의 말처럼 같은 처지의, 그리고 강력한 우방을 만드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현 황가에 대한 복수를 그 누구보다 힘있게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레이얼 시오도르, 그만한 이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시오도르와 아르넬이었다.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군신관계로 이루어진 사이. 먼저 등을 돌리고 비수를 꽂으려 한 건 시오도르다. 하지만, 그의 배신은 변심이라 치부될 수 있으나 아르넬의 배신은 반역이 된다. 황제에게 반기를 드는 황태자라고 한들, 그 역시도 시오도르. 황좌에 오를 남자다. 지금이야 손을 잡지만, 만에 하나 그녀가 정체를 들키게 된다면……? 심지어, 그들은 약혼까지 한 사이가 아니었나. 이건 절대 안 될 소리였다.

“아무튼 사정이 그러니까 난 이만.”

“왜 안되는지 설명해.”

“그건 비밀이야.”

“그럼,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할 사정은 영원히 함구하고 내 사람이 되어주렴.”

“안-.”

클로이가 그의 말을 거절하려 할 때였다.

“아 참, 내가 말했나.”

팔을 굽혀 조금 더 거리를 좁힌 그가, 금방이라도 코끝이 스칠 거리에서 더없이 단정한 표정을 지었다.

“엘피디오는 황족시해범에 경중에 상관없이 사형을 내리지.”

“잠깐, 난 아직 아무것도……!”

그의 협박에 클로이가 새된 목소리로 항변할 때였다. 허리띠에서 뭔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눈앞에 날이 바짝 오른 단검이 드리워졌다.

“증거도 있네.”

“…….”

“내가 지금 소리쳐 사람을 부르면 어떻게 될까?”

이 시오도르 녀석! 이를 가는 클로이를 즐겁게 지켜보던 레이얼이 작게 속삭였다.

“깜빡했을 것 같아서 다시 말해주는데. 제안은 유효해.”

내 것이 되어주렴. 진득한 속삭임에 클로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자리에서 죽거나, 혹은 그와 손을 잡거나. 답은 금방 나왔다. 일단,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해보자.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네.”

이를 뿌득 소리 나게 간, 클로이에게서 쥐어 짜낸 승낙이 새어 나왔다.

“클로이 아가씨!”

공작저 후원을 살금살금 걸어오던 클로이는 저를 향해 달려오는 에반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에반?”

자로 잰 듯 반듯하고 단정하기만 하던 에반이 놀라 달려오는 모습이라니. 그 와중에 새벽 추위를 생각한 듯 담요를 쥐고 온 게 그다웠다.

“아니, 에반 이 시간까지 나 기다린 거야?”

“절대 아닙니다. 공작님께 보낼 비밀 기사단을 배웅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걸요.”

“아아, 담요를 들고?”

“이런.”

클로이의 턱짓에 그제야 에반이 담요를 깨달은 듯 낭패감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줄 거면 빨리 줘. 춥다.”

“……네.”

두툼한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꼼꼼히 여미는 그의 손길은 한 치의 빈틈없이 완벽했으나, 표정은 여전히 어둑했다. 화 한 번 내는 일 없던 클로이가 사냥복까지 갖춰 입고 나섰으니 어지간히 속이 탔던 모양이다.

“몰이만 하고 온다고 했잖아. 내 실력 몰라? 왜 걱정을 해.”

“당, 연히 믿지만 걱정이 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에반은 자꾸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클로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반, 에반, 에반.”

“네, 아가씨.”

“내 행동에 후회하진 않지만, 사과할게.”

“네?”

내내 시선을 피하던 에반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걱정 끼쳐 미안해 에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아르네의 집사입니다. 주인을 보필하고 ‘아르네’를 위해 움직이는 게 바로 제 일인 것을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공녀님’의 사과에 에반은 정신 놓은 것처럼 굴었다. 설핏 보이는 그의 귀 끝이 붉다. 그 모습에 클로이 손을 내밀어 에반의 소맷부리를 쥐고 살살 흔들었다.

“에반, 잊었어? 아무도 나를 아르네라고 부르지 않아. 아버지와 오빠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아르네의 남자들은 강하지.”

클로이는 제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화사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르네 공녀로 지내는 건 며칠 되지 않을 테니 너무 겁먹진 마.”

“클로이 아가씨.”

“청개구리 같긴. 공녀라 불리는 게 싫다고 할 땐 고집스레 공녀님이라 불러 놓고선.”

축 처지는 건 그들의 방식이 아니다. 클로이는 에반에게 눈을 흘겨주곤 과장되게 배를 문질렀다.

“나 배고파. 뭐 먹을 것 좀 줘.”

“배고프십니까?”

“응. 밤 내내 뛰었더니 허기져 죽겠어. 생각보다 황궁이 넓더라고.”

눈을 내리뜨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퍽 처량하게 울렸다. 마치, 헤매다 오기만 한 것 같은 말투. 거짓말은 아니지만 적당히 오해를 유도한 건 고의였다.

“큰일 없이 돌아오신 게 정말 천운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에반의 얼굴이 그녀의 말에 화사하게 피어난다.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세요.”

상냥한 표정을 짓던 클로이가 문득, 건물 안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당분간은!!!”

“무슨……?”

잠시, 이해하지 못해 눈을 끔뻑이던 에반에게서 전에 없이 커다란 고함이 터졌다.

“잠깐만요! 아가씨! 공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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