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담을 넘는 공녀님2020.09.04.
사랑에 빠지면 머저리가 된다더니, 황제는 천치가 되어버렸다. 그러지 않고서야 다른 누구도 아니고 황가 ‘시오도르’를 도와 이 제국을 세운 ‘아르네’를 사지로 몰아넣는 게 말이 되나?
“이, 미친놈이.”
황실에서 보내온 출정명령서를 읽던 클로이는 뿌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황후에게 미쳐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이런 짓을 하는 걸 보아하니 여간 미친 게 아닌가 봐?”
“…….”
“황후의 가문이 제안한 증세안을 반박했다고 지금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회의 중에 민란군의 본거지로 압송했다고?”
“압송이 아니라, 즉각 출정하라 명령을 내리셨답니다.”
“언제부터 예장이 무장의 다른 말이 되었지?”
집사 에반의 말에 클로이가 입매를 비틀며 코웃음을 쳤다.
“유례없는 가뭄임에도 올해만 세 번 증세했다. 민란도 그래서 일어난 게 아닌가?”
“…….”
“증세 반대자들끼리 이야기가 잘 통할 거라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클로이의 손에 들린 출정서가 기어이 와그락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비겁하긴. 감히 황후의 가문인 길롯에 반목해서라고 썼더라면, 적어도 당당하기라도 하지. 아르네를 두고 같잖은 말장난을 치다니.”
시선을 내리깐 클로이의 얼굴엔 감출 수 없는 혐오가 짙게 물려 있었다. 황제가 번번이 이렇게 교묘한 방식으로 아르네를 모는 건 바로 제국민 때문이었다. 황가 시오도르를 도와 제국을 건국한 아르네는 좋게 말하면 중립,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정치에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 시간이 이백 년이었다. 단 한 뼘도 늘어나지 않는 영지, 사사로이 뽑히지 않는 검. 제국 최북단에 둥지를 튼 아르네가 움직이는 건 오직 제국에 일이 생길 때 뿐이었다. 제국민은 ‘제국의 검’ 아르네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길롯과 반목하는 아르네가 눈엣가시 같으나 황제가 대놓고 척을 지지 못하는 건 바로 그래서였다. 계비에 휘둘리는 와중에 제국민의 눈치를 보는 그가 딱하다고 해야 하나. 저 비겁한 자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누구인지 알고는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후.”
민란군의 규모가 1만에 육박한다고 했던가. 아르네가 나설 때가 되긴 했다는 건 안다. 그러나, 연이어 이런 일을 겪은 클로이는 진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불과 한 달 전, 클로이는 황제의 한마디에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황태자의 약혼자가 되었다. 사고로 여섯 번이나 피앙세를 잃은 황태자를 조롱하는 길롯 백작을 아르네 공작이 나무란 게 일의 발단이었다. 계비에 빠져 국정에 소홀한 황제에게 간언하는 황태자와 사사건건 길롯에 반기를 드는 아르네가 눈엣가시가 된 지는 오래. 황제가 둘을 한 번에 해치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아르네 공작, 그대의 충심을 증명할 기회가 왔군. 공녀를 레이얼의 짝으로 주게. 공녀가 무탈하다면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사라질 테니 말이야.’
얼토당토않은 억지였으나, 상대는 황제였다.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날의 분이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또 이런 개수작이라니! 속에 불이 끓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집결지는 어디야?”
연거푸 심호흡을 하며 끓어오른 화를 누른 클로이가 물었다.
“기사단은 얼마나 준비해야 하지?”
“……없습니다.”
“응? 몇 개 대대라고?”
기사단을 움직일 때 챙겨야 할 것들을 떠올리느라 말을 놓친 클로이가 재차 물었으나, 에반은 말이 없었다.
“…….”
“못 들었다고, 에반.”
“필요 없습니다.”
“뭐가?”
되묻는 순간 어째, 등골이 선뜩하다.
“기사단도, 물품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황제폐하께서, 황궁 기사를 내주셨-.”
“무슨 소리야. 폼만 재는 황궁 기사를 어디 아르네 기사단에 비교해. 그럼 한두 개 대대만 준비시킬까?”
“안 됩니다.”
“왜!”
에반은 그 누구보다 아르네를 끔찍하게 위하는 사람이었다. 이러는 건 그답지 않다.
“왜! 왜!”
클로이는 기분 나쁜 예감에 잔뜩 초조해져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국의 검을 제국민에게 겨누는 일이 발생해선 안 된다고 폐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 비겁한 새끼가.”
말은 번드르르했지만, 가서 죽으라는 소리였다. 제아무리 제국민의 사랑을 받는 아르네라고는 하나, 상대는 굶주림과 수탈에 미쳐버렸다. ‘말’로만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런데 검도 제대로 쥐지 못하는 오합지졸만 데리고 가라는 건,
“진짜, 아르네를.”
이를 갈던 클로이가 분을 못 이긴 듯 발을 쾅쾅 굴러가며 명령서를 짓밟곤 2층으로 올라갔다. 홀로 남겨진 에반은 옅은 한숨과 함께 엉망이 된 출정명령서를 집어 들었다. 갈가리 찢어버려도 시원찮지만, 꼬투리 잡히는 건 사양이니 잘 펴서 공작집무실에 가져다 둘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로지! 어깨 보호대 챙겨와!”
“설마?”
콰직. 저택을 쩌렁하게 울리는 성난 클로이의 목소리에 기껏 펴둔 명령서가 그의 손아귀에서 다시 엉망으로 구겨졌다. * * * 설마는 역시였다. 화려한 드레스를 벗어 던진 클로이는 잠깐사이 완벽한 북부의 사냥꾼 모습을 하고 1층으로 내려왔다. 어깨에 두른 보호대며 굽 없는 가죽 신발, 그리고 한 뼘 너비의 널찍한 허리띠까지. 단단히 작정한 모습에 에반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타운 하우스엔 사냥터가 없습니다.”
“걱정 마. 황궁에 갈 거니까.”
“해도 진 저녁입니다. 사냥터를 내어달라 청하기엔 늦은 시간입니다.”
“에반, 에반, 에반.”
간절하기까지 한 에반의 표정에 머리를 높이 올려 묶던 클로이가 고개를 잘게 흔들며 웃었다.
“복면 주렴.”
클로이가 내민 손에 전속 시녀 로지가 냉큼 까만 천을 올려주었다. 눈 자리에 길게 구멍을 낸 얼굴의 반을 가리는 천은 밤사냥을 다닐 때 사냥꾼들이 쓰는 개량형 복면이었다. 짐승들의 눈에 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선 얼굴을 다 가려야 맞았으나, 내내 달려야 하는 것이 바로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호흡과 은신을 절충한 것이 바로 코끝부터 하관까지를 잘라낸 모양이었다. 능숙하게 복면을 뒤집어쓰는 클로이에게 에반이 다가섰다.
“그러지 마세요.”
모르쇠로 넘길 수 없어지자 에반은 제대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아르네엔 공녀님 한 분뿐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달라는 듯, 에반은 클로이를 굳이 ‘공녀’라고 불렀다. 로지가 건네는 단검을 받아 허리띠에 찔러넣던 클로이가 그 소리에 짧게 웃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렇게 호들갑이야?”
“황궁을, 황제를 해하는 건.”
“…….”
“반역입니다.”
반역이라고 외친 에반의 목소리가 1층 홀을 후려치듯 싸늘하게 울렸다.
“에반, 에반, 에반.”
버릇처럼 그를 장난스럽게 부르는 목소리는 똑같았지만, 에반을 바라보는 클로이의 눈빛은 건조했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전 아르네의 집사입니다. 유사시 아르네의 후계자를 전력으로 지킬.”
“걱정말아, 에반. 아직 유사시가 아니야. 그리고 나도 아르네가 멀쩡한 이상 난폭하게 굴 생각은 없어. 이것 봐 복면도 썼잖아.”
오늘은 사냥이 아니라 몰이만 할 거야. 아르네를 사지로 몰았으니, 이정도는 해야 셈이 맞지 않겠어? 뒷말은 날 선 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 * * 타운 하우스를 벗어난 클로이는 곧장,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에반에게 했던 말은 전부 진심이었기에 그 몸놀림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그림자를 따라 소리 없이 달리고 때론 담을 넘고 지붕을 타며 클로이는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삼십 분이 지난 후, 클로이는 황궁 담벼락 아래에 서 있었다. 황가의 문양을 빼곡하게 새긴 높다란 하얀 벽은 고개를 젖혀 올려봐야 할 만큼 높았다. 그러나 까마득한 절벽과 가파른 산세를 앞마당처럼 헤집고 다니던 북부 사람에게 이 정도 는 장애물도 아니었다.
“후. 후읏.”
담을 넘기 전 숨을 고르던 클로이가 신음도 웃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냈다. 기름칠이라도 한 듯 나불거리던 혀로 오늘밤, 제게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빌거릴 황제를 생각하니 웃음을 참기 힘들었던 탓이었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건만. 챙.
“누구냐!”
검을 뽑는 소리와 함께 잔뜩 경계한 기색의 목소리가 담 안에서 울렸다. 클로이는 입을 틀어막은 채 숨죽였다.
“왜, 무슨 일이야?”
귀를 쫑긋 세우자, 담 안 소리가 훨씬 세세히 들린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소리?”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바람에 낙엽 쓸리는 소리는 아니었고?”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소리에, 클로이가 발치에 구르는 도토리를 집어 힘껏 던졌다.
“저기다!”
소곤거리던 기사들이 다급히 이동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야, 생각보다 귀가 밝네.”
클로이는 멋쩍게 중얼거리며 담을 훌쩍 넘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제국 하나뿐인 공녀인 클로이에게 이 황궁은 제집처럼 익숙했다. 게다가 매년 추수제며 사냥제며 온갖 대연회에 불려와선 인사만 남기고 슬그머니 도망다니느라 근위기사 교대 시간이며 황궁 지리며 아주 훤했다.
“흐아, 죽겠네…….”
그러나 모두 안다고 해서, 마냥 수월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경계에 빈틈이 없도록 각 지정위치마다 황궁 기사들의 교대 시간이 달랐기에 클로이는 본성 후원 나무 위에 숨어 벌써 사십 분째 버티는 중이었다. 제아무리 활동에 편한 옷이라지만, 사십 분을 쪼그리고 앉아 있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
다리가 저리다 못해 발가락 감각이 멀어진다. 하지만, 지척에 황궁 기사들이 있어서 클로이는 자세를 바꾸거나 몸을 뒤틀 수도 없었다. 괴롭지만 고지가 코앞이었다. 클로이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황제가 손 모아 싹싹 비는 상상을 하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렇게 십 분을 더 참고 나서야 아래쪽에서 희미한 말소리가 울렸다. 고대하던 교대 시간이었다! 쏴아아아아. 사방을 단번에 소란하게 헤집는 큰 바람과 함께 내내 웅크리고 있던 클로이의 몸이 가지 끝에서 팍 튀어 올랐다. 근처 테라스에 무사 안착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저린 다리가 제대로 바닥을 딛지 못해 처박히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바닥을 짚은 손목이 시큰한 것이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았다.
“빌어먹을.”
나직이 욕설을 중얼거린 클로이는 저림이 가시자마자 슬그머니 테라스 문을 열고 궁내부로 잠입했다. 목표는 황제의 침실. 그녀의 기억에 의하면 3층 중앙계단 우측이다. 발끝을 세운 클로이의 걸음은 이전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은밀했다. 순찰하는 기사들과 마주칠 때마다 클로이는 어둠에 날래게 몸을 묻어 위기를 넘겼다.
“후.”
화려한 문 앞에서 한숨을 내쉬는 클로이는 전력으로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황제의 침실이 있는 3층에 오는 길에 순찰기사만 스무 번을 마주쳤다. 2층에서 3층으로 오는 그 짧은 사이에 말이다!
“…….”
스무 겹의 호위라니. 안전한 황궁 안에서도 이렇게나 몸을 사릴 정도로 목숨 귀한 줄 아는 놈이 아르네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지로 몰아? 새삼스럽게 속이 끓어오른다. 그러나 클로이는 사나운 눈빛과 달리 한없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침실 문을 열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다시 조용히 닫혔다. 재빨리 방 안을 훑어 이 방 안에 있는 건 그녀를 제외하고 침대 위에 단 한 명뿐이란 걸 확인한 클로이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이 났다. 황제 하나뿐이다 이거지……? 하늘도 오늘은 그녀를 돕는 모양이었다. 둘이라면 살짝 귀찮았을 텐데, 황후도 없으니 마음 놓고 괴롭히라는 건가! 황제는 엎드리다시피 해서 잠들어 있었다. 안심하고 죽은 듯 잠든 꼬락서니에 절로 눈초리가 사납게 치뜨였다.
“허?”
흥분은 금물이었는데, 클로이는 눌어붙은 캐러멜 같은 황제의 모습에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지금, 자고 있다고? 아르네를 사지에 처넣고 이렇게 태평하게? 위협이건 습격이건 간에 제1원칙은 완벽한 우위를 점하는 것임을 북부 출신인 그녀가 모를 리 없는데. 다짜고짜 잠든 이의 어깨를 움켜쥔 건 이성이 날아갈 만큼 화가 나서였다.
“당장 일어나지 못-!”
하지만, 흥분의 대가는 썼다. 어깨를 붙든 손이 잡아 당겨지는 것과 동시에 클로이는 크게 한 바퀴 돌아 그대로 침대에 처박혔다.
“윽!”
곧장 몸을 빼려 했으나 잡힌 손이 하필 접질린 쪽이었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멈칫한 사이 사지가 완벽히 제압돼 깔렸다. 클로이는 자신의 위에 올라탄 남자를 올려다보며 짧게 신음했다.
‘황제가 아니야?’
그녀를 내려다보는 건 젊은 남자였다. 아마도 제대로 훈련을 받은 모양인 듯, 그리 큰 힘을 쓰는 것 같지 않은데. 관절을 파고든 손가락이 힘을 주지 못하게 그녀를 교묘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남자는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감탄을 자아냈을 미남이었다. 아찔하게 솟은 콧날과 그에 잘 어울리는 길고 깊은 눈매. 속눈썹 사이로 비치는 시린 벽안까지 남자는 정말이지 완벽했다. 조각 같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모양이었다. 아니다. 대성당에서 본 조각상도 저보다 아름답고 우아하진 못했다. 공들여 빚은들 저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클로이의 집요한 시선을 받은 남자가 모양 좋은 입술을 열었다.
“안녕.”
밤공기를 따라 나직이 깔리는 묵직한 목소리가 터무니없이 감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