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순례.
크리칼료프의 말을 들은 나우시카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깥에서부터 비쳐드는 달빛에 어두운 여관에서도 눈빛이 흔들리는 모습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입술을 깨물고 주춤 뒷걸음질 치는 그녀에 어셔는 크리칼료프를 슬쩍 보았지만 달빛을 등진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헬레나를 부축하고 있던 레니 또한 무언가 느꼈는지 고양이 귀를 조금씩 쫑긋거리며 그들을 살폈다.
"아직..."
이내 들려오는 나우시카의 목소리는 얕게 떨리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미미한 떨림도 고요한 밤에 이르러선 술꾼들이 남기고 간 주정처럼 요란하다.
"아직은, 아니라고 했잖아."
"그랬었지."
끝에 이르러선 흩어질 정도로 힘을 잃은 그녀의 말에 크리칼료프가 담담히 답한다.
"아직이라고 했으면서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건데."
결국 어셔는 레니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그들과 더 오래 알고 지낸듯한 그녀라면 무언가 알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레니 또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린 환자가 있어서 먼저 올라가 보겠다냥."
그녀가 부축한 헬레나는 지금도 가쁘게 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기에 레니는 그녀를 부축한 채 어셔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저는 왜..."
"이런 일에는 함부로 참견하는 게 아니다냐."
그 말에 어셔는 입을 다물고 이끌려 가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달빛을 등진 크리칼료프의 모습은 여전히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지만 나우시카의 모습만은 뚜렷하게 비추고 있었다. 어셔는 곧 자신이 머물던 방에 레니와 헬레나와 함께 들어왔다. 다른 문은 모두 잠겨있었으니까.
"이래서야 묻고 싶은 것도 못 묻겠다냐."
"그럼 어떻게 해요?"
"어떡하기는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 먼저 자라냥. 나는 헬레나를 좀 봐줘야 할 것 같으니까."
"그러면 저도."
어셔도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레니의 손가락이 그의 이마를 때린다.
"윽! 갑자기 왜 때리는데요?"
그가 억울하게 바라보자 레니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그냥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냐. 그래야 키가 클 거 아니냥. 잠이 안 오면 자장가라도 불러주냥?"
"필요 없어요!"
키에 대한 건 왜 나오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먼저 침대에 눕지 않으면 직접 재울 기세였기에 어쩔 수 없이 옷 위에 덧대어 입었던 보호판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잠기운에 몸을 뒤척이고 있으니 레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일은 미안하다냥."
그에 놀라 뒤돌아보면 그녀는 침대에 눕힌 헬레나의 이마에 손을 대어보며 상태를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누나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어셔는 무어라 생각하기도 전에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레니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다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갑자기 웃기나 하고."
"냐하하항. 딱히 너에게 한 말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너에게도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다냐."
때문에 울컥하고 소리치니 돌아온 그녀의 말에 어셔는 귀가 빠르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그럼에도 들려오는 레니의 웃음소리에 어셔는 억지로나마 잠을 청하며 부끄러운 마음을 누르고자 애썼다. 그러다 겨우 꼬리를 붙잡은 수마에 빠져들기 전.
"그래도 고맙다냥."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를 헬레나에게 하는 말이라 여기며.
-절그럭절그럭
계단을 오르며 바닥과 부딪히는 철의 소리가 삐걱삐걱 울린다.
"자리도 비켜줬는데 너무 빨리 올라오는 거 아니냥?"
"먼저 들어간다 더만."
복도로 나온 레니가 계단을 올라오는 크리칼료프를 지켜보고 있었다.
"헬레나가 열이 올라서 물수건을 가지러 나왔다냐."
헬레나는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주드의 요구를 수락하고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쓰러진 상태였다. 며칠간 먹지도 잠들지도 않고 악착같이 벼르고 있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나우시카와 좀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거냥?"
"나도 그 녀석도 이미 오래전부터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러니 이야기를 길게 할 필요는 없다는 그에게 레니는 한숨을 내쉰다.
"너무 엄격한 거 아니냥."
"어쩔 수 없다는 건 너도 알잖냐. 그리고 너는 계획을 앞당겨야 할 거 같다."
"마법사 때문이냥?"
"그래, 그 녀석이 얌전히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어."
적어도 주드가 크리칼료프를 경계하는 이상 약점을 잡으려 들것이고 그 약점은 당연히 그의 주변 인물들이 될 것이다. 이미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는 걸 그 자리에서 들었기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녀석이 아이슨을 조종하고 있는 이상 권력도 놈의 손에 넘어갔다. 쫓아오는 녀석들이 없는 건 확인했지만 권력을 활용해서라도 파르즈를 샅샅이 뒤지겠지."
"...나우시카는 알고 있었던 거냥?"
"그래."
레니는 씁쓰레하게 말을 이었다.
"옛날부터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네가 바르가제트를 쓰러트렸을 줄은 몰랐다냐."
"그냥 운이 좋았어."
"운이 좋다고 마왕을 쓰러트리는 괴물이 어디있냥?"
그 정도로 쓰러트릴 수 있는 상대였다면 500년간 성지에서 군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그 자리에서 마법사를 쓰러트릴 수는 없었냥?"
"가능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그건 의미 없는 투정에 불과하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크리칼료프는 주드에게 불리기 전에도 왕성의 곳곳에 몰래 설치된 폭약들을 확인했었고 그중 일부를 헬레나에게 보였다.
"같이 죽으려고 작정했군요."
헬레나가 그가 건넨 폭약을 풀어 안을 보고 한 말이었다. 그녀가 폭약의 안에서 발견한 건 얇은 유리관에 장약을 채우고 구리로 된 격발기를 넣어둔 신관이었다. 헬레나가 신관을 폭약과 분리해 숟가락으로 툭 건드리자 그대로 작은 불꽃을 일으키며 터져버리는 유리관의 모습을 그들은 주드의 앞에서 똑똑히 확인했다. 이게 프로토 다이나를 잔뜩 머금은 흙에 닿았다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헬레나가 그가 설치한 폭약 중 하나를 분리해 확인하고 있음에도 주드는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내 할 말을 끝냈다는 듯 그녀를 지나치는 크리칼료프를 향해 말했다.
"진짜 아무 미련도 없는 거냥?"
그런 레니의 물음에도 그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툭 토닥이고 걸어나갔다.
"나우시카를 부탁한다."
삐걱대는 발소리가 복도를 채우지만 밤이 아무리 길어도 아침은 찾아오기에 그의 발걸음을 멈춰세울 수는 없었다.
"정말 바로 출발하는 거예요?"
어셔는 새벽이 밝자마자 자신을 깨운 크리칼료프에 얼떨떨했지만 벨카를 구하러 간다는 말에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우리가 왜 물과 식량을 챙기고 있겠냐?"
이른 시간부터 제레미아의 집으로 와 채비를 서두르는 그들을 따라와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나우시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것 같지가 않았다. 레니의 경우는 헬레나를 간호하고 있었기에 그녀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어셔가 불편한 마음으로 그를 돕고 있으니 제레미아가 말을 끌고 다가왔다. 이곳에서 말이라면 당연히 숲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말뿐이었다.
"어? 이 녀석은 왜."
"네가 타고 가야 할 녀석이니까."
"이 녀석을요? 하지만."
이미 어셔는 도나르에게 들어 말이 황야를 건너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힐디스비니는 물을 마시지 않고도 오랫동안 달릴 수 있지만 말은 사정이 달랐으니까. 심지어 달리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말을 타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나 크리칼료프의 말이 그를 찌른다.
"지금 네가 타고 갈만한 녀석은 이 녀석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힐디스비니를 탈 수 없었다.
"스바딜페리는요?!"
스바딜페리는 힐디스비니처럼 탈것으로 이용되는 생물이었다. 덩치도 작고 겁도 많지만 그래도 힐디스비니처럼 황야를 건너다닐 수 있는 생물이기에 타고 다닐 수 있다고 했었다.
"마을에서 길들인 녀석들은 이미 다 주인이 있고 사용할 곳도 있어.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야생의 스바딜페리를 길들이는 거다."
"그럼 길들이면...!"
"알고 있냐? 스바딜페리는 아무리 잘 길들이려 해도 한 달은 기본으로 걸린다."
어셔는 초조함에 볼살을 깨물었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은 제레미아의 움막 근처에 누워있던 회색 깃털의 힐디스비니였다.
"저 힐디스비니는요?"
하다못해 헬레나의 힐디스비니도 있었다. 캐트시들이 벨카와 헬레나를 끌고 갔을 때. 같이 끌려갔었던 앤서 종의 힐디스비니가. 그는 어셔가 파르즈에서 힐디스비니를 길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브랜타 종이기 때문이라 했으니. 앤서 종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힐디스비니는 한 번 길들이면 주인을 안 바꾼다는 것도 알지?"
"그럼 헬레나 누나를 깨우면!"
"너, 진심이냐?"
"...아니요."
어셔는 충동적으로 나온 자신의 말에 후회했다. 그녀는 지금 일어날만한 상태도, 일어나도 힐디스비니를 몰만 한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아저씨도 기사라면 힐디스비니를 몰 수 있지 않아요?"
"이런 몸으로는 힐디스비니의 척추가 부러져 인마."
생각해 보면 그의 몸은 골렘과 같았다. 골렘은 자세한 재료는 모르지만 철만큼이나 무겁고 단단한 것으로 만들어졌는데. 그와 비슷한 크리칼료프의 몸이 가벼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힐디스비니의 등에 탈 수는 없었다.
"마차라도 있으면 좋겠다만, 그것도 만들어진 것들은 주인이 있다."
그나마 헬레나가 끌고 왔던 마차도 있었지만 그 마차는 팔기라도 했는지 왕성에서 돌려주지 않았다. 그나마 힐디스비니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던 건 주인을 바꾸지 않는 성질 때문이었으리라.
"그래도 이 녀석은!"
"어리광 좀 그만 부려!!!"
그런 어셔의 입을 다물게 만든 건 어느새 다가온 나우시카의 외침이었다.
"아저씨는 벨카를 구하러 가는 거잖아! 그래서 너를 데리고 가는 건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 건데!!"
귀를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도 목소리였지만 그보다 그의 가슴을 찌른 건 그녀의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이었다. 어셔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자신은 괜찮다는 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말의 콧등이 그를 더 아프게 때리는 것만 같다.
"죄송해요."
차분히 자신의 행동을 돌아본 어셔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다. 나우시카는 그를 보고 입술을 깨물다 고개를 돌려 크리칼료프에게 커다란 나무 상자를 내밀었다. 밝은 톤의 반질반질하게 손질된 나무 상자는 무척 견고해 보였다.
"받아. 부탁했던 검이야."
크리칼료프가 그녀가 내민 나무 상자의 표면을 쓸어보다 상자를 열자 부드럽게 열리며 안에 든 물건을 보였다. 하얀 천에 둘둘 쌓여있는 그건 얼핏 보기에 커다란 십자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손잡이 부분을 잡고 들어 올리며 천을 풀어헤치자 그 사이로 스며나온 은빛이 떠오르기 시작한 햇살을 반사했다. 검 끝에서 시작된 파도와 같이 얕게 물결치는 칼날을 중간에 삐져나온 가시가 막아 곧은 칼날로 이어지고 직각으로 세워진 가드가 십자가를 그린다.
그건 어셔가 보기에 그 길이만 해도 자신의 키보다 긴,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떤 검보다 커다란 검이었다. 크리칼료프는 손으로 그 검을 세워 돌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를 잘해놨구만."
"당연하지."
나우시카는 가슴을 펴며 웃어 보였다. 그녀의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끝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크리칼료프는 그녀에게서 건네받은 검을 가죽끈으로 메어 등에 걸치고 돌아섰다.
"제레미아."
"그래."
"지옥에나 떨어져라."
"끝까지 악담이냐!"
"뭐 어뗘 길동무도 되고 좋겠구먼."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어셔는 말에 올라탔고 크리칼료프는 그 옆에서 앞장서서 말을 이끌었다. 어셔는 그를 따라 이동하다 힐긋 뒤돌아보니 여전히 그들을 지켜보는 제레미아와 나우시카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거예요?"
벨카를 당장 구하러 가는 건 좋았지만 아무래도 크리칼료프와 나우시카의 모습이 걸렸다.
"그려."
그의 담담한 대답과 동시에 그들의 뒤에서 나우시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빨리 돌아와야 해!! 안 돌아오면 고기 안 해줄 거야!!!"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크리칼료프가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참. 돌아가지 않으면 큰일이 하나 더 늘었구만."
어셔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 강해질 수 있을까요?"
"글쎄다. 일단 꼬마 아가씨부터 구하고 봐야 하지 않겠냐?"
돌아가면 나우시카에게 제대로 사과하자고 다짐하며 크리칼료프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