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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7화 〉결단. (217/220)



〈 217화 〉결단.

어셔는 아이슨에게 닿는 단검을 보고 차라리 그대로 찔러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아들의 부탁이라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벨카를 끌고 가 괴롭게 만든 그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건..."

하지만 곧 들려오는 레니의 목소리에 어셔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레니는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하고 아이슨과 크리칼료프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아이슨의 조카라고 했던가.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헬레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모습이 떠올라 답답해졌다. 분명 그녀도 벨카를 강제로 끌고 간 아이슨에게 질린 기색이었으니까 그냥 연을 끊으면 되는 게 아니냐고 하고 싶지만 류드밀라가 떠올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벨카를 데려올 거냐? 오지 않을 거냐?"
"데려오지 않는다고 하면  같이 죽기라도 할 셈이냐?"
"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냥?!"

크리칼료프의 말에 모두가 당황하는데도 그는 뜬금없는 말을 이어나갔다.

"기둥에 각각 하나씩. 천장에 둘, 탁자 아래에도 하나."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헬레나가 곧바로 탁자를 가리던 천을 들어 올려 아래를 보더니 얼굴을 굳힌다.

"이건 설마 폭약입니까?".
"그래, 파르즈에 있는 흙을 활용한 거 같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냥?! 그럼 우리가 폭약 위에서 살기라도 했다는 거냥!"

그의 말에 레니가 경악했다. 그건 어셔에게도 놀랄 일이었다. 파르즈의 흙을 폭약으로 만들  있다면 이 왕성 자체가 폭약이나 다름없다는 소리였으니까. 그에 대답한 것은 헬레나였다.

"흙 자체만으로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다만 이곳의 흙은 흡수성이 뛰어나더군요."

그녀는 이곳에서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파르즈에 대해 조사하며 실험했었고 그중에는 당연히 파르즈의 토양에 대한 것도 있었다. 헬레나는 어쨌거나 연금술사, 새로운 지역과 나라의 생태와 물질이라면 연구하고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잘 모르겠지만 이 흙 덕분에 집안에서는 시원하고 바닥의 찬 기운이나 열도 올라오지 않아서 쾌적하게 지낼  있다냥."

파르즈에선 구하기도 쉽고 가공도 쉽기 때문에 이 흙 자체만으로 집을 만들어 살아도 문제가 없었다. 특히 털이 많은 캐트시들에게는 물론 인간들에게도 집을 만드는 데 있어선 완벽한 흙이었다. 외곽에서는 아예 벽돌을 구워 만들어 활용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만 활용한다면 괜찮습니다만 흡수성이 너무 좋아서 문제입니다."
"냐앙?"

레니가 그렇게 말해도 헬레나의 굳은 표정은 펴질 줄 모른다. 어셔도 궁금증이 생겨 그녀를 따라 탁자 아래를 보았다. 헬레나의 바로 옆에 있었기에 그녀가 들어낸 탁자보 사이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 작고 네모난 막대기 여럿이 탁자의 밑에 다닥다닥 붙여져 있었다.

""프로토 다이나.""

폭약이라면 보통 둥근 공 같은 형태였기에 그 이질적인 모습에 긴가민가 하고 있으니 헬레나와 주드의 목소리가 겹쳤다. 그들이 탁자 밑에서 고개를 들자 주드가 킥킥 웃었다.

"연금술사라면 모를 수가 없겠지?"
"뭐, 뭐냥?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냥?"

레니가 답답했는지 헬레나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프로토 다이나는 위험성이 강한 화학물의 일종입니다. 만드는 조건이 까다로워서 마법사들의 힘이 아니면 웬만해서는 만들 수도 없는 물질입니다만."
"워낙 착화점이 낮고 충격과 열에 민감해서 그대로 내버려 둬도 타오를 정도로 위험한 녀석이지."

주드는 헬레나의 말을 받으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  탁자 밑에 있던 것과 같은 형태의 막대기 하나를 들고 던졌다 받아낸다.

"특히 프로토 다이나는 상온에서 액체 상태로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

그제야 레니도 무언가 깨달았는지 안색이 새하얘졌다. 어셔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기에 몸이 굳어버렸다. 파르즈의 흙은 흡수성이 뛰어나다고 했으니 당연히 액체를 잘 흡수할 것이고 프로토 다이나가 액체 상태로 존재한다고 하면 이곳의 흙이 프로토 다이나를 흡수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레니의 시선이 주드가 던졌다 받아내는 막대기를 향했다. 단순한 막대기처럼 보이지만 그건 종이를 포장지 삼아 무언가를 눌러 담아놓은 것이었다.

헬레나와 주드의 말을 들었다면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아, 아무리 그래도 흡수되었다면 폭발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냥?"
"그랬다면 좋겠습니다만, 프로토 다이나의 성질을 생각해 봤을 땐 기대하지 않는  좋을 겁니다."

헬레나의 말은 그런 희망조차 끊어버렸다.

"무섭지도 않은 거냥?!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가지고 놀다니!"
"그래서 뭐 어떻단 거지?"

레니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지만 주드는 아무래도 좋아 보였다.

"원래는 크리칼료프, 네 녀석 때문에 준비한 물건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아졌어. 그래서 벨카를 구해올 거냐? 구해오지 않을 거냐?"
"구해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 다 같이 죽고 싶다면야."

그의 목소리는 평온하게 죽음을 말하고 있었다. 어셔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무서운  사실이지만 그러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었다.

"대체 벨카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 왜!"

그가 어렸을 적부터 함께 해온 소중한 소녀였다. 그런데 어째서 마법사인 그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이렇게 벨카에게 집착한단 말인가?

"흐흐흐, 나도 잘 모르겠군.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 설령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너에게 벨카를 넘겨주고 싶지가 않다는  말이야."

처음으로 그와 똑바로 마주한 주드의 눈동자에는 어두 칙칙한 감정이 타오르듯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자, 이제 선택하자고 다 같이 죽던가. 벨카를 구해오던가."

침묵이 다시 방을 채우고 주드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선택지는 애초부터 하나밖에 없었다.

"오늘도 잘 먹었다!"
"다음에 또 오세요!"

해가 저물고 황혼마저 잦아든 늦은 저녁, 나우시카는 식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마지막 손님들을 배웅했다. 그녀가 다시 가게로 들어서자 텅 빈 가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불들은 손님들이 떠난 후 이미 꺼트려 놓았기에 하나 남은 등불만이 외로이 타오르며 주변을 밝혔다. 나우시카는 그런 가게를 둘러보다 유일하게 남아 타오르는 등불을 들고서 행주를 들었다.

"어휴, 영업이 끝났으면 빨리 돌아가면 좋잖아. 청소하는 것도 일인데. 괜히 오지랖이야."

그녀는 마지막 손님들이 떠나가며 어지른 접시와 컵들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접시와 컵을 설거지통에 담그고 닦지 못한 식탁을 뒤늦게 닦아내었다.

"좋아!"

손가락으로 식탁을 훑어 확인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미 다른 손님들의 그릇은 진작에 닦아놓은 뒤였기에 설거지 거리도 마지막 남은 손님들의 것뿐이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텅  여관을 울리며 퍼져나갔다. 그렇게 잔업을 끝마치고도 그녀에겐 일이 남아 있었다.

"이 많은 걸 대체 언제 다 정리 한담."

그녀는 쌓여있는 동화와 철전, 가끔 있는 은전을 구분해 놓고 손님들의 오늘 치 주문을 받아 적은 쪽지를 모아 가계부에 적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마저 크게 느껴지는 고요한 가게에서 그녀는 가계부를 적다 찌이익 하는 소리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아아악!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잖아! 으으, 아까워."

나우시카는 새로운 종이를 꺼내들고 옆에 놓았다. 파르즈에서 종이는 그나마 구하기 쉬운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싼 편은 아니었기에 종이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했다. 그녀는 이미 종이를 찢어버린 것에 더욱 조심하며 가계부를 적어나가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아저씨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우시카는 크리칼료프를 떠올리고 맞은편 의자를 바라보았다. 비록 힘이 무식하게 강해서 직접 기록하려 하면 종이가 남아나질 않아서 기록을 그녀에게 맞기던 그였지만 계산을 워낙 잘해서 간단하게 계산해 주곤 했었으니까.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그녀를 지켜봐 주던 그였기에 나우시카는 기운이 빠졌다.

"오늘도  오려나."

그녀는 오늘따라 잡히지 않는 펜에 가계부를 옆으로 치워버리고 엎드려 누워 가게 문을 바라보았다. 조금 늦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던 크리칼료프의 발소리와 그림자는 여전히 보이질 않는다. 결국 그녀가 다시 허리를 펴고 가계부를 계속 쓰려고 했을 때였다.

-절그럭
"아저씨?"

그녀는 몇 번이고 들어왔던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 문을 보자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가 그곳에 서있었다. 심지어 곁에는 헬레나와 어셔, 레니도 있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갔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아기 토끼는? 구해 온 거 맞지!"

그리고 그녀는 곧장 그들의 사이를 살폈다. 벨카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녀의 덩치가 워낙 작은 탓에 가려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붉음의  톨조차 찾을 수 없었기에 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그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으니까.

"아저씨, 아기 토끼는?"

나우시카가 의아하게 묻자 크리칼료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우시카, 검을... 돌려받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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