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4화 〉결단. (214/220)



〈 214화 〉결단.

"그, 일단 나가는 게 어떨까요?"

어셔는 자신을 껴안은 헬레나에 얼굴을 붉히며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그렇군요. 이러고 있을 시간은... 윽!"

헬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대로 주저앉는 그녀의 모습에 어셔는 당황했다.

"무슨 일이냥?"

그 소리에 밖에서 망을 보던 레니가 방으로 들어오자 헬레나는 어셔를 끌어안고 뒤로 물렸다. 그는 또 본의 아니게 맞닿는 뭉클한 감촉에 어김없이 삿된 생각이 떠오르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이런 건 벨카에게만 떠올랐으면 좋을 텐데.

"캐트시!"

그녀가 레니를 경계하자 어셔는 그녀를 말렸다.

"저를 여기까지 올  있게 도와준 누나예요."
"그게 사실입니까?"
"정말이다냥. 아니었다면 진작에 병사들이 몰려왔을 거다냐."
"당신은 캐트시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헬레나가 좀처럼 의심을 풀지 못하고 이상하다는 듯 묻자 레니는 고개를 젓는다.

"모든 캐트시가 왕족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아니다냥. 그래도 믿을  없다면 요프와 모종의 이야기를 했다고만 생각하라냥."
"요프라면..."

그건 나우시카가 크리칼료프를 부르던 말이었다. 그제야 헬레나가 경계를 풀자 레니는 천천히 다가왔다.

"우선 나가야 한다냥. 도와줄 테니 천천히 일어나라냐."
"...감사합니다."

레니가 그녀를 부축하자 헬레나는 순순히 부축을 받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사흘간 제대로 밥을 먹은 적이 없으니 이러는 것도 당연하다냥."
"사흘 동안이나요!?"

그 정도면 어셔가 크리칼료프와 훈련을 하고 있었던 시간과 같지 않은가? 어셔가 놀란 기색이자 레니는 혀를 찼다.

"냐앙, 얼마나 독한지 말도 마라냥. 하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첫날에는 수저가 사라져서 혹시나 해서 찾아봤더니 칼처럼 날을 갈아놨다  않냥."

때문에 매번 수저와 그릇 같은 것을 꼼꼼하게 챙겨가니 헬레나는 아예 식사를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어셔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니 씁쓰레하게 웃는 헬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탈출할 방법은 있습니까?"
"그건 요프 쪽에서 시선을 끌기로 했다냥. 우리는 그 사이에..."

그러나 레니의 말이 끊겼다. 귀를 쫑긋 세우고 긴장한 듯 표정을 굳힌 그녀의 모습에 그들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무슨 일입니까?"
"병사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냥."

혹시 그녀가 알린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는 모습에 그게 아니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냥? 아직 시간은 남아있었을 텐데."
"진정하십시오. 지금이라도 빨리 도망치는 게 어떻습니까?"

헬레나가 레니를 잡고 진정시켜보았지만 이미 발소리는 어셔의 귀에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 발소리는 방을 포위하는 것처럼 양쪽에서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마치 그들의 존재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곳은 복도가 일자로 되어있는 곳이었다. 양옆에서 다가오고 있다면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어있으니 곧 방문 앞으로 캐트시들이 섰다. 다른 캐트시들과는 달리 차가운 갑옷과 투구로 얼굴을 가린 그들 사이로  캐트시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 중에서도 유난히 화려해 보이는, 자잘한 장식을 여럿 달고 있는 그의 모습에 어셔가 긴장하고 있으니 레니가 앞선다.

"친위대가 여긴 어쩐 일이냥?"
"누나?!"

분명 이곳은 그녀의 관할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들키면 안 된다고 했던 것도 그녀였을 텐데. 당당하게 앞서는 그녀의 모습에 어셔가 그녀를 부르니 헬레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셔를 붙잡는다. 때문에 어쩔  없이 가만히 있으니 그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슨 님께서 손님들을 모셔오라고 하십니다."
"손님, 이요?"

어셔는 그가 침입자를 잘못 말한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었지만 투구에 가려진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손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요즘엔 손님을 강제로 잡아와서 며칠간 가둬두는  예의인 거냥?"

황당한 건 헬레나와 레니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동안의 무례에 손님께서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러니 레니 님은 노여움을 푸시고 저희에게 손님들을 맡겨주십시오."

그의 말에 어셔는 멍하니 레니를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들은 친위대라고 했었는데 어째서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이가 일개 하녀인 그녀를 높여 부르는가?

"당신은 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헬레나가 그녀에게 물었지만 레니는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피할 뿐이다. 그러자 대신 답한 것은 친위대였다.

"아이슨 님의 조카 되시는 분입니다."
"그 입 다물라냥."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이지만 물러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레니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됐으니까 안내하라냐. 정말 손님으로 대할 생각이라면 내가 같이 가도 문제는 없지 않냥?"

결국 그들은 친위대라는 이들과 함께 어디론가 향하게 되었다. 서둘러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캐트시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가게 된 상황에 어셔는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당신 또한 왕족이라면."
"냐아. 인간도 비슷하지 않냥? 난 그냥 권력에서 밀려난 별 볼일 없는 캐트시일뿐이다냐."
"...그렇습니까."

그녀들의 대화를 끝으로 그들은 곧 커다란  앞에 도착했다. 친위대 중 하나가 그 문을 쿵쿵 두드리며 소리쳤다.

"전하, 손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여보내거라."

이어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문을 막고 서있던 이들이 문을 열자 보이는 건 누가 보아도 왕이라는 걸  수 있을 만큼 화려한 복장의 캐트시였다. 어셔는 그의 주홍빛 머리카락과 털에 그 고양이의 아버지라는 걸 확신했고 헬레나도 그를 멀리서나마  적이 있었기에 그의 붉은 옷감과 금빛으로 빛나는 화사한 왕관의 모습에 그가 아이슨이라는  알았다.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띄었던  그와 함께 긴 탁자에 앉아있던 기사였다.

"아저씨?"
"이제 오냐?"

어셔는 그가 크리칼료프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헬레나도 목소리를 듣고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네가  여기 있는 거냥?!"
"당신이 어떻게?"

그가 아이슨과 같은 탁자에 태연히 앉아 있는 모습에 레니와 헬레나가 당황하고 있으니 아이슨이 손짓했다.

"친위대는 물러가게. 내 손님들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예."

그들을 안내했던 친위대는 무어라  법한데도 그의 말을 따라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났다. 이내 그들이 문을 닫고 시야에서 사라지자 레니는 인상을 구겼다.

"여전히 기분 나쁜 녀석들이다냥. 그래서 백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 거냥?"

그녀가 쿵쿵 바닥을 찍으며 다가가자 아이슨은 손을 들었다.

"일단 진정하고 식사부터 하는  어떤가? 그쪽의 손님들은 아직 식사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 짜증 나는 말투는 대체 언제까지  생각이냥!"

레니가 화가 난 듯 따지자 그녀를 말린 것은 크리칼료프였다.

"좀 진정 혀. 그렇게 말하면 멀쩡한 사람도  말하것다."
"넌 대체 누구 편이냥!?"
"먼저 자세히 보라고 지금 그 양반이 제정신으로 보이냐?"

레니는 그의 말에 의아하게 아이슨을 보다 흠칫 거리며 물러났다. 그의 눈은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초점이 흐렸고 마지막으로 움직인 상태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어셔와 헬레나가 보기에도 그는 썩 정상적인 상태라고 보기 어려웠다. 마치 영혼이 없는  껍데기 같은 그 모습을 어느 누가 정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냥?"

레니가 물러나자 크리칼료프는 못마땅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딴 역겨운 짓은 관두고 얼른 기어 나와라. 빌어처먹을 자식."
"하, 편리한 물건을 알맞은 곳에 사용하겠다는데 무슨 문제지?"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셔와 헬레나는 동시에 굳어버렸다. 왕의 뒤, 한쪽 벽을 전부 가릴 정도로 커다란 병풍을 열어젖히며 나타난 것은 바로 주드였으니까. 그는 곧 헬레나와 어셔를 발견하고 삐뚜름하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군. 헬레나. 내 품이 그립지는 않았나?"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헬레나는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그에 치를 떨었다. 어셔는 아예 본 척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었을 때였다.

"뭐, 뭐냥? 이 남자는?"

레니가 몸을 떨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주드를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온몸이 경고하는 감각에 몸을 떨고 있으니 주드는 심드렁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흥미를 잃은  아이슨의 옆에 섰다.

"자리를 비켜."
"예."

그리고 그의 말에 아이슨이 곧바로 일어나며 의자를 비우는 모습에 모두가 놀라고 있음에도 주드는 태연히  자리에 앉았다. 크리칼료프만이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계속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지루하지는 않았어? 시타?"
"말이라고 하는 거냥? 아무리 하는 일이 없다지만 늙은이 아래에 있는 건 질색이다냐."

이어서 탁자의 아래에서 기어 나온 건 이전에도 주드와 함께 본 적이 있었던 여인이었다.

"시타?! 너는 분명 마틴과."

레니도 그녀를 아는지 놀란 기색이지만 정작 시타는 레니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곤 주드에게 애교를 부렸다.

"냐앙, 이제 다른 녀석들이  때마다 저러는 것도 귀찮다냐."
"그러게. 너는 이미 내 건데 말이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냥! 너는 마틴과 결혼한 게 아니었냥?! 그리고 백부는  남자의 말을 왜 그렇게 순순히 따르는 거냥!?"

레니가 혼란을 참지 못하고 소리치자 주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꽥꽥 시끄럽군. 아직까지 알아보질 못하다니 캐트시들의 수준도 알만하군."
"주드가 너무 대단해서 그런 거니 이해하라냥."

그러자 오히려 그녀를 무시하며 한심하게 여기는 주드와 시타의 모습에 레니가  말을 잃은 것도 잠시. 무언가 깨닫기라도 한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였다. 그야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조종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주드는 그제야 만족한  의자에 편하게 기대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때문에 지금까지 가만히 주변을 살피던 어셔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아저씨, 벨카...는요?"

그야 아무리 찾아봐도 이곳에는 그가 찾던 소녀의 붉은색 한 조각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혹시 실패한 것일까? 어셔가 불안하게 크리칼료프를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태자의 방에 갔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저놈의 악취미적인 물건밖에 없었지."

그의 말을 들은 그들의 시선이 주드를 향하자 그는 큭큭 웃었다.

"오랜만에 즐거운 일이었지. 인간과 달리 캐트시의 근육은 질기지만 손질하는 보람은 있더군. 난쟁이와는 다르게 몸의 구조도 달라서  신선했어."

주드가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야기에 그들은 그가 정말 요리를 하는 취미라도 있는가 싶었지만 곧 그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태자를..."

레니가 무언가 떠올렸는지 입을 가리고 헬레나의 안색도 나빠졌다. 어셔는 정말로 그가 같은 인간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주드는 이미 같은 인간마저 요리하듯 손질한 경험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벨카, 벨카는 어떻게?"

어셔는 그가 고양이를 그런 식으로 죽여버렸다면 혹시나 하는 생각에 덜덜 몸을 떨었다. 공포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  검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가 검을 뽑아들 일은 없었다.

"그건 나야말로 묻고 싶군."

그보다 먼저 주드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성기사들이 벨카를 데리고 간 이유가 뭐지? 그건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성기사."

그의 화가 난 듯한 말에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크리칼료프를 향했다. 어셔는 일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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