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1화 〉결단. (211/220)



〈 211화 〉결단.

캐트시들의 왕성은 어셔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대했다. 란투아에서 지냈던 성도 크다고 생각했지만 캐트시들의 왕성은 그 이상이었다. 슬쩍 올려다본 천장은 너무나 높아서 까마득할 정도다. 천장과 바닥의 사이, 중간중간 보이는 계단과 쌓여있는 공간을 보면 아직 입구에 가까운 것 같았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수많은 그림들이다. 대체 어떻게 세우고 그렸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거대한 기둥과 천장에는 빼곡히, 섬세하게 그려진 그림들이 가득했다.

"여기를 지키는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거예요?"

또각또각,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가로지르는 가운데. 어셔는 혹시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지 주변을 살피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왕성을 확인하고 그녀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이렇게 커다란 성이라면 지키고 있어야 할 인원도 많아야 하는 게 정상이었으니까. 그녀는 힐긋 그를 돌아보았다.

"대부분 일을 하러 나가거나 성지의 사절을 대접하고 있다냥."

덕분에 그들이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왕성을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다냥. 아무리 넓어도 우리는 소리와 냄새로 침입자 정도는 금방 잡아낸다냐."

어셔는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물고 그녀의 살랑이는 꼬리를 따라 걸었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없었지만 어젯밤 크리칼료프와 함께 지도로 보았던 헬레나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과 언뜻 겹쳐 보이는 느낌이었으니까. 이렇게 여유롭게 걷고 있어도 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조급하게 굴지 말라냐. 숨어 다니거나 달리면 더 수상하다냥. 그냥 손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걸으면 된다냥."

그녀가 그런 그의 기색을 귀신같이 눈치채고 속삭였다. 어셔가 그 말에 조금 놀라면서도 빠르게 뛰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켰을 때였다. 문득 그녀의 머리 위로 보이던 고양이의 귀가 쫑긋 세워지는 것이 보인 건.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속삭였다.

"경비다냥. 무슨 말을 해도 조용히 있어라냐."

어셔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수인인 그녀의 감각을 믿고 그녀를 따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퉁이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한 캐트시의 모습에 어셔는 흠칫 굳었다.

"레니?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야?"

그는 크리칼료프나 다른 기사들처럼 철갑으로 몸을 전부 가리고 있지 않았다. 철갑은 거슬린다는  중요한 곳을 위주로 가리고 사슬을 엮어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우락부락한 체형이 그대로 드러나  위협적으로 느껴지긴 했다.  와중에도 앙증맞은 귀와 꼬리의 모습이 저렇게 안 어울리는 캐트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길을 잃은 아이가 있어서 데려다주고 있었다냥."
"아이라고?"

레니의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어셔가 고개를 드니 그와 눈이 마주쳐 몸을 떨었다. 아무런 의도가 없다는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저 덩치로 그를 내려다보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아이라니. 어떻게 왕성에 들어왔대?"
"냄새를 맡아보면 모르냥?"

그러자 그는 코를 킁킁거리고 고개를 주억이다 이상하다는 듯 어셔를 보았다.

"성지에서 데려온 아이인가? 그런데 아까는 이런 아이를 못 봤던 거 같은데."
"네 덩치로 어른들 사이에 끼어있는 애를 볼 수 있을 거 같냥?"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그는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짓지만 그 덩치로 짓는 표정은 어셔에게는 위협적으로 느껴질 뿐이라 레니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았다.

"애는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길이나 가라냐."
"나도 같이 데려다주면..."
"귀찮게 군다고 조지한테 이른다냥? 그리고 애도 무서워하는데 무슨 짓이냥."
"아, 알았어! 알았다고. 너무하네 진짜."

레니의 힐난하는 눈초리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놓아주었다. 같이 가지 못하는 게 아쉽기라도 한지 떠나가는 그들을 계속 지켜보다 거리가 멀어진 뒤에야 반대편으로 걸어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다른 곳과도 그리 다르지 않은 일자로 늘어선 복도가 보였다. 이 성은 어찌나 큰지 걸어도 걸어도 같은 곳만 나오는 것 같았다. 지도를 어느 정도 외워두긴 했지만 미로 같은 왕성을 걸어 다니느라 대체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부턴 특히 조심해야 한다냥."
"네?"
"네가 찾는 사람은 명목상으로 죄인이지만 일단은 감옥이 아니라 남는 방에 가둬졌다냥."

그나마 감옥처럼 아예 접근할 수 없는 곳보다는 사정이 좋지만 그래도 위험하다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아까 그곳까지는 괜찮았지만 여기는 내 관할이 아니다냥. 지금 방을 지키고 있는 동족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들켜버리면 문제가 커진다냥."
"그럼 저 혼자 가는 게."
"그 여자가 갇혀있는 곳이 어딘지 알기는 하냐냥?"
"...아니요."

그녀는 거봐라는 듯 어셔를 이끌었다. 방금 들키면 안 된다고 한 사람이 맞는지 의문이  정도라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

레니의 표정이 굳어버리는 것을 보고 그가 앞을 보자 그녀처럼 하녀복을 입은  다른 캐트시 여인과 마주쳤으니까. 누구를 위해 준비된 음식인지 제법 먹음직스러운 모습에도  입도 대지 않아 메말라 있는 음식을 쟁반 위에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서로를 보고 굳은 것도 잠시. 그들과 마주친 그녀가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부자연스럽게 툭 하고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고맙다냥."

그리곤 스쳐 지나가는 그녀에게 레니가 중얼거리듯 하는 말에도 그녀는 잠시 몸을 떨었을 뿐 아무 말 없이 걸어가버렸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는 열쇠 꾸러미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쇳소리의 정체는 저게 떨어지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어셔가 신경 쓰여 돌아보았지만 그녀가 뒤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저 사람은 왜."
"그냥, 그럴만한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라냥."

어셔의 의문에 레니는 안타깝다는 듯 그녀를 지켜보다 다시 그를 이끌었다. 그리고 어느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다른 곳과도 그리 다르지 않은, 평범한 문이었다. 다만 어느 곳과는 달리 밖에서 문을 잠글 수 있는 자물쇠가 둘 정도 달려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다 열쇠로 자물쇠를 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기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누나는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내가 캐트시라서 그러냥?"

자물쇠를 하나 풀어내면서 예상했다는 듯 되묻는 레니의 말에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아니었지만 죄를 지은 기분에 어셔가 눈치를 보고 있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 쓰지 말라냥."

그녀는 두 번째 자물쇠까지 풀어내곤 그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어른에게는 어른만의 사정이 있는 거다냥.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구하고 빠져나가라냥."

이내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무릎을 끌어안은  고개를 숙인 여인이 있었다. 조용하고 숨이 막힐 듯 조여오는 무거운 공기 속에 짓눌려 죽어가듯 숨을 죽이고 화사한 분홍빛의 머리마저 우울하게 점철된 여인이.

'저는  아무것도 할  없는 겁니까.'

헬레나는 저도 모르게 떠올린 말이 제 가슴을 찌르는 것을 느끼며 부여잡지도 못했다. 지켜주고 싶었다. 어쩌면 그저 그리운 이와 닮았다는 이유로 시작되어버린 불편하면서 아릿한 일방적인 사랑. 차마 그녀의 사랑을 받아주지 못해 아파하는 소녀의 모습에  커져버린 감정을 감추고 그녀를 지켜주기로 결심했다. 그저 옆에 서서 그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소년은 결국 소녀를 떠나가 버렸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헬레나는 그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소녀가 울음을 삼키는 모습을 지켜만 보아야 하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하지만 헬레나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었다. 벨카의 마음은 어셔에게 있었으니까. 잊었다 생각했던 불편하고 질척한 마음이 가슴속을 끓이는 것 같아서. 소녀가 그를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에 동의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얼마나 괴로운지 헬레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들은 잠시나마 정이 들었던 여관을 나와 건물을 빌려 란투아에서 그랬듯 연금술을 활용해 치료약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헬레나에게 그것만큼 익숙한 일은 없었고 벨카 또한 마녀였다. 그녀의 더없이 사랑스러웠던 친구 또한 마녀였기에 그녀들이 얼마나 약에 대해  알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사샤의 말에 따르면 마녀가 되면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 정보가 떠오르는 느낌이라고 했던가. 그렇기에 더 이상 연금술사를 꿈꿀 수 없게 되어버렸다며 씁쓸하게 웃던 친구의 모습은 여전히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그만큼 벨카의 지식은 해박해서 헬레나가 낯선 파르즈에서도 약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함께 약을 만드는 시간은 행복했다. 캐트시들이 갑자기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그녀들은 영문도 모른  그들에게 끌려갔다. 무엇이 문제인지 아무리 소리쳐도 그녀들의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지도 묻지도 않고 그동안 만들었던 약이나 도구들을 짓밟고 그녀를 이 방에 가두었다. 헬레나는 벨카의 생사조차  수 없었다. 쓸데없이 호화로운 음식들을 먹는 것을 거부하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웃기지도 않은 발버둥의 전부였다.

스스로의 비참한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대체 뭐가 연금술사인가? 대체 뭐가 의사인가? 정작 정말로 소중한 사람은 구할 수도 지킬 수도 없는데. 바로 그때였다.

"괜찮아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다가온 건. 제대로 만난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소년의 목소리가. 퍼뜩 고개를 들자 그녀는 노란 머리카락의 소년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있었다. 아직 앳된 모습을 벗어나지 못해 소녀처럼 보이는 여린 소년이 굳게 닫힌 문을 열고 그녀의 앞에 서있었다. 헬레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그게."

어셔는 곤란한  눈을 돌리다 그녀가 집요하게 바라보자 결국 입을 열었다.

"구하러 왔어요."
"이곳은 함부로 올만한 곳이 아닙니다."
"알아요. 저 혼자는 안 된다는 거. 그래서 크리칼료프 아저씨에게 도움을 받았어요."

헬레나의 머릿속에 자신들을 구해주었던 남자가 떠올랐다.

"아저씨가 벨카를 구해주신다고 했으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이상하고 수상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당당하게 인정해 주었던 기사가. 그가 소녀를 구해주기로 한 것이다.  소년의 부탁을 듣고. 헬레나는 그것이 기쁘면서도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두렵지 않았습니까?"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헬레나는 캐트시들의 조심스러운 행동에 이것이 그들의 왕족이 내린 명령이라는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들이 이렇게 굴 이유가 없었으니까. 헬레나는 가끔 소녀를 쳐다보던 고양이의 시선에 정욕이 깃들어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마 그것이 이 일의 원인이었으리라.

"무서웠어요. 왕족이라고 했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버렸어요.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어셔는 헬레나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하나 이어가는 말들이 잔잔하게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

"하지만 죽는 것보다 벨카를 위해 아무것도  수 없는 제가  미웠어요. 그래서 크리칼료프 아저씨한테 검을 달라고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에게 부탁해버리고 말았다며 자조하는 소년의 모습에 헬레나는 어느덧 그를 껴안은 자신을 발견했다.

"저, 저기요?"

어셔가 꼼지락거리며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헬레나는 그를 껴안은 손을 풀 수 없었다. 어째서 그가 벨카가 아닌 자신을 구하러 왔는지 알  같았다.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알기에. 경계가 삼엄한 곳에 잡혀있을 소녀를 직접 구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것이 가능할 것 같은 타인에게 맡기고서라도 자신이  수 있을 일을 찾은 것이었다. 잠시 도망치고 헤매며 무릎 꿇었을지언정 결국 당신은 길을 잃지 않았구나. 헬레나는 자신이 이 소년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을 것이라는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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