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0화 〉결단. (210/220)



〈 210화 〉결단.

이른 새벽, 동쪽으로부터 빛이 스며들자 달은 떠나가며 자리를 건넨다. 어두운 하늘은 밤 사이의 일을 잊은  푸르스름하게 물들고 하늘을 수놓았던 별들은 이슬이 되어 나뭇잎에 앉았다.

"그 화물은 이쪽이야!"

채 태양이 떠오르지 않은 새벽이지만 파르즈는 벌써부터 장사를 준비하는 상인들의 분주한 목소리로 떠들썩했다. 그중에 외곽과 내부를 잇는 문은 평소보다 더 많은 화물들이 오가는 광경이 돋보였다.

"요새는 성지 말고 다른 곳에서 사절이나 상단이 온 적은 없지 않아? 그런데  이렇게 화물이 많아?"

문을 지키던 캐트시가 지나가는 화물을 확인하며 의아하게 묻자 같이 문을 지키던 조지가 답했다.

"성지 쪽에서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남은 물건들을 정리했다더라."
"오늘 왕성에 초대받았는데? 그동안 초대를 미뤘다지만 정말 얼굴만 보고 가는 셈이잖아."
"원래 성지 녀석들이 그렇잖아."

성지가 사절을 보내는 목적은 나라끼리의 교류라기보다는 성지가 오래전부터 곳곳에 세워둔 성당의 정비와 관리를 위한 것이었다. 근 500년간 바뀌는 일이 없었던 성지의 주인이 갑자기 바뀌어서 쫓겨난 하피들이 이곳에 정착하기는 했지만 설령 성지의 주인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일은 있었다.

"성지에서 온 녀석들은 하나같이 행동이 똑같아서 기분 나쁘단 말이지. 낡은 건물이 뭐라고."

성지는 말이 좋아 주인이 바뀌는 것이지 외부의 사람들은 정말 성지의 주인이 바뀌었는지 긴가민가할 정도로 성지를 차지한 이들의 행동은 항상 똑같았다. 누가 되었건 한 번 정착하면 그곳에서 외부에 대한 교류도 없이 조용하게 성지를 지키며 10년 정도를 주기로 성지가 다른 곳에 세워둔 성당을 관리하고자 사절을 파견한다. 먼 옛날에 성당을 세워둔 이와는 연관도 없을 터인데도 항상. 사절단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교류는 하지만 그뿐 그들은 성당의 정비를 마치면  일이 끝났다는  돌아갔다.

그런 성지의 행동에 의문을 느꼈던 이들은 성당을 조사하기도 했었다. 심지어 어떤 곳은 성지와 교류하고 싶다는 이유로 성당에 직접 들어가 보기도 했지만 심한 일만 아니라면 성지에서도 딱히 그들의 행동을 제제한 적도 없었다. 때문에 성당이 자체만으로는 평범한 건물일 뿐이라는 건 성당이 있는 나라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입 조심해. 우리 중에도 신도가 있는데 큰일 난다. 그리고 너도 성당과 관련해서 있었던 일은 알잖아?"
"아, 그 옛날이야기..."

옛날 사람들은  폐쇄적인 성지가 계속 사절을 파견해야  만큼 성당에 중요한 물건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성지의 지배자가 바뀌어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옛날에 어느 나라의 왕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그는 성당에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마도구가 탐이 났다. 안 그래도 그는 자신의 나라에 세워진 성당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성당은 신도를 끌어들이거나 외부의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성당을 관리하는 신관의 권력은 왕에 버금갔다. 굳이 포교를 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성당에서 신께 기도를 드렸으며 성당에 갈 시간이 없는 이들도 성당의 신관에게 세례 받은 물건을 받아 기도를 했으니까. 욕심 많은 왕이 이걸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는 기도와 신을 믿는 것을 금지했고 끝내 성당을 무너트렸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마도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돌무더기만 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화근이었다.

왕은 실망했고 신관과 신도들이 마도구를 숨겼다고 생각해 전부 불게 하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순간 갑작스레 땅이 울리며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고 한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온갖 몬스터들이 땅과 하늘을 전부 가릴 만큼 넘쳐났다. 성당이 무너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 나라는 멸망해버렸다고. 때문에 신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성당을 무너트리려는 이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믿지 않고 성당을 무너트렸던 나라는 전부 똑같이 몰려드는 몬스터들에게 멸망했으니까.

"그래도 그 낡은 건물이 몬스터들이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게 막아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심지어 우리는 성당이 외곽 마을에 세워져 있잖아."
"그럼 직접 무너트려 보기라도 할 거냐?"
"미쳤다고."
"거봐."

그들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검문을 계속했다.

"사실 그것보다 바르가제트가 쓰러졌다는 걸  못 믿겠어."
"하긴 괴물 같기로 유명한 양반이었으니."

바르가제트는 캐트시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름이었다. 그야 아무리 인간보다 수명이 긴 편인 수인이라고 해도 500년을 넘게 산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으니까. 심지어 오랫동안 성지를 지배하며 해온 일들은 지금까지 성지를 지배해왔던 이들에 비해서도 특히 악명이 높았기에 마왕이라 불릴 만큼 두려움을 산 자였다.

"그럼 그 마왕을 쓰러트린 지금의 주인은 대체 얼마나 괴물 같은 자라는 거야?"
"우리야 모르지. 만날 일이 없으니까. 됐잖아."

캐트시들도 하피들이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면 바르가제트가 쓰러졌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했으리라. 그러다 동이 완전히 터 올랐을 무렵. 저 멀리서  무리가 나타났다.

"야, 왔다. 왔어."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힐디스비니를 탄 기사들과 그 뒤를 따라 걷는 하얀 신도복을 입은 이들이었다.

"그럼 검문을."
"그만둬. 오늘 출근 전에 들었던 말도 기억 못 하냐?"
"아, 맞다."

문지기들은 이미 입구에서 사절단의 검문을 넘기라는 말을 들었던 상태다. 검문을 최대한 줄여서 그들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게 한다는 이유였던가. 다행히 조지는 동료가 까먹고 평소처럼 검문하려는 것을 막고 그들을 들여보낸다. 서로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괜히 긴장되었다. 그들은 그냥 기사도 아니고 마법과 비슷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성기사들이었으니까.

"휴, 공기 한 번 무겁네."

결국 끝자락의 신도까지 들여보낸 뒤에야 긴장이 풀렸는지 캐트시가 입을 연다.

"맨 앞에 있던 그 여자가 사절단 대표겠지?"
"그렇겠지. 그런데 왜?"
"아니, 진짜 예쁘던데. 아까워서."
"이젠 하다 하다 성지의 사절을 넘보냐."
"눈이 가는 걸 어떡하라고."

그들이 다시 잡담을 나누고 있었을 때였다. 또 다른 이들을 발견 한 건. 평소였다면 그냥 내부 구역으로 들어오려는 자들이겠거니 했겠지만 그들의 행색이 문제였다. 여러 조각을 끼워 맞춘 것 같은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와 원피스 치마 위로 최소한으로 몸을 보호하는 보호판을 덧입은 여자아이의 모습은 의심이 가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저건 누가 봐도 검문해야 할  같지 않냐."
"그냥 보내줘."

동료가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으로 창을 세우려 했지만 조지가 멈춰세우는 게 먼저였다. 그가 왜 그러는지 의아하게 돌아보자 그는 고갯짓으로 기사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눈이 있으면 좀 보라고."
"뭐야. 성지의 사절은 방금 다 지나간 거 아니었어?"

그곳에는 성지의 상징이라  수 있는 심벌이 그려져 있었으니까.

"아마 따로 명령을 받은 성기사겠지."
"그래도  이상한데. 위장해서 몰래 검문 피하려는 거 아니야?"
"코는 장식이냐?"

그의 말에 냄새를 맡은 캐트시는 그제야 창으로 막으려던 것을 멈추었다. 직접 대보지 않고 멀리 있어도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만큼 예민한 게 그들의 코였으니까. 기사와 조지의 시선이 언뜻 마주쳤지만 서로에게 말을 거는 일 없이 스쳐 지나갔다. 덕분에 그들은 검문에 막히는 일 없이 문을 지날 수 있었다.

"아저씨, 진짜 이래도 괜찮은 거예요?"

생각 이상으로 순조롭게 검문을 통과한 상황이 얼떨떨하면서도 어셔는 정말 괜찮은지 의문이었다. 그들은 일단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었지만 혹시나 싶어 주변을 살피고 있으니 크리칼료프가 답했다.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냐. 이렇게 해서라도 들어와야지. 그리고 딱히 속인 것도 아니고."

그는 장난이라도 치듯 자신의 가슴 중심, 붉은 보옥을 가리는 판을 달칵달칵 소리를 내며 붙였다 떼기를 반복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거.  성기사 누나를 만날 때는 문양이 안 보였던 거 같은데요."

혹시 특정한 상황에서 문양이 사라지는 마도구라도 되나 싶었는데.

"그냥 바꿔 끼운 거다."
"...그거 그런 용도였어요?"

금세 문양이 새겨지지 않은 판으로 간단하게 바꿔 끼우는 크리칼료프의 모습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어찌나 빠르게 바꾸는지 그의 갑옷을 입는 걸 도와주지 않았었다면 모를 뻔했다.

"아무튼 여기까지는 순조로운데 왕성으로 들어가는 게 문제구만."
"방법이 있다면서요?"
"나야 간단하지만 문제는 너다."

그러면서 그가 보여준 건 구석에 숨겨져 있던 손잡이 부근이 뚫린 나무 상자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상자는 어셔가 앉으면 들어갈  있을 정도의 크기였는데.

"설마 들어가라고요?"
"그려, 혹시 좁은 곳에 못 들어간다던가 그러지는 않지?"
"상관은 없는데요. 그럼 누가 옮겨줘요?"
"들어가면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걱정 마라. 그 사람의 안내만 받아도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어셔는 대체 뭐길래 그런 사람이 있나 싶었지만 일단은 그가 시키는 대로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건 구해야 할 이들을 구하고  뒤에 물어도 늦지 않으니까. 그가 몸을 웅크리자 바로 닫히는 뚜껑. 그리고 똑, 똑,  정확히 세 번, 느리게 반복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소리가 상자를 두드리면 똑같이 두드려라. 그전까지는 절대 나오지 말고 소리도 내지 마."
"윽, 네."

좁은 상자에 갇혀 괴로웠지만 어떻게든 참고 있으니 상자를 옮기는  들어올려지는 느낌이 났다. 상자의 구멍으로 희미하게 비쳐들어오는 빛과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 속에서 좁고 어두운 공간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 불편했다. 언뜻 코로 파고드는 맹그로브 향이 평소보다 역하게 느껴지고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어떻게든 참아내야 했다. 그저 참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어둠 속에서 자신이 대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이 상황이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참아냈다.

크리칼료프가 제대로 된 곳에 상자를 두기 바라면서 기다리니 겨우 상자의 움직임이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이나마 상자 밖에서 비쳐들어오던 빛도 보이질 않아 짙은 어둠만이 눈앞에 가득했다. 상자의 밖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어지럽고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토할 것 같아서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이런 좁고 답답한 곳에서 그런 걸 했다간 큰일이었다.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입을 틀어막고 최대한 천천히 숨을 내쉬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침묵. 창고라도 되는 것일까? 쿰쿰한 먼지 냄새가 손가락 틈으로 새어들어왔다. 그 먼지처럼  상자 안에서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당장이라도 이 상자를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크리칼료프의 말이 떠올랐기에 어떻게든 참아내었다. 잘못하면 그 때문에 벨카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 도움은 되지 못하더라도 방해하면 안 되었다. 그랬다간 소녀를 영영 구하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롭고 힘들었지만 상자 속에 계속 숨어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가늠할  없는 상태로 계속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끼이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다각다각 걸어오는 소리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이윽고 똑, 똑,  정확하게 세 번, 상자를 울리는 노크 소리. 그는 침착하게 노크 소리를 따라 세  상자를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상자의 뚜껑이 열리는 것에 어셔는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 좁은 곳에 잘도 숨어 있었다냐."

그곳에는 하녀복을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캐트시 여인이 그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가 어떻게  일인지 몰라 굳어 있으니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이 나에 대해선 이야기해 주지 않았냥?"
"그 사람이라면, 혹시 누나가?"
"알았으면 얼른 따라오라냥. 성지의 사절도 곧 떠나니까 빨리해야 한다냥."

어셔는 그녀의 재촉에 떠밀려 상자 밖으로 나왔다. 상자의 밖은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상자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어두컴컴한 창고였다. 하지만 의외였던 건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온 곳이 햇빛이 드는 복도였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가장 낮은 곳이었지만 이곳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다.

태양은 이미 중천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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