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09화 〉결단. (209/220)



〈 209화 〉결단.

"큼큼, 저는 현재 주교  성녀 대행을 맡고 있는 대행관 레이첼이에요. 이단 심판관이 아니라요!"

그들이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못하자 결국 그녀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 대행 중에 이단 심판관도 슬쩍 끼어 있는  아니여?"

그녀의 말을 들은 크리칼료프가 제레미아에게 속삭였다. 속삭인다고 하기엔 구석에 있는 어셔에게 들릴 정도로 컸지만.

"그러니까 저는 이단 심판관 같은 게 아니라고요!"

물론 그걸 레이첼이 못 들을 수가 없으니 그녀가 허리에 손을 짚고 불만스레 말하는 것도 당연했다.

"저는 그냥 캐트시들과 대면하기 전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흑목병의 치료제를 구하러 온 거뿐이에요."

애초에 저에겐 이단 심판에 대한 권한도 없고 권한이 있어도 남용할 생각도 없으니 그렇게 아시라고요! 덧붙이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크리칼료프는 안심한 듯했다.

"에잉, 그럼  하러  겨."
"왜 아쉬운 기색인 거냐!"

제레미아와 투닥거리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첼이 말했다.

"아무튼 제레미아 씨. 부탁했던 치료제는 가지고 오신 거겠죠?"
"그래, 여기 있다. 하지만 캐트시들이 간 크게 성지의 사절을 건드리지는 않을 텐데."

제레미아는 그녀가 치료제를 구하러 온 것이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다 사정이 있으니까요. 여기 약 값이에요."

그렇게 제레미아에게서 약들을 받아낸 그녀는  일이 끝났기에 밖으로 나갔다.

"후우,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목소리는 그 자를 닮았으면서."

레이첼은 움집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수상한 자라고만 생각했는데. 그에게서 발견한 익숙한 모습에 그녀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분명 목소리는 증오스러운 자의 것과 놀랍도록 같았지만, 레이첼은 입술을 깨물고 제 가슴팍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쥐었다.

"그럴 리가 없겠죠."

그녀는 우울한 마음으로 자신의 힐디스비니의 옆에 섰다. 내일은 그녀가 사절로서 캐트시들의 왕성에 들어야 하는 날이었다. 개인적인 이유로 여기서 더 지체할 수는 없었으니까.

"벌써 가세요?"
"아, 너는 그때의."

어셔가 힐디스비니에 올라타려는 그녀를 보고 묻자 레이첼이 묘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왜 그러니?  스승님이 뭐라고 했어?"
"그런 건 아닌데요."

어셔는 단지 레이첼이 여인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성기사라는 사실이 신기해서 마법에 대한 힌트를 얻을  있지 않을까 싶어 따라나온 것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우울한 모습을 발견하고 말문이 막혔다.

"혹시 힐디스비니를 길들이는데 참고할만한 게 있어요?"

그러다 그녀가 데리고 있는 힐디스비니의 모습이 보여 그에 대해 물어버렸다. 그야 그녀의 옆에 있는 힐디스비니에게 약간이지만 자라 있는 하얀 깃털들은 도나르의 것과 같은 종의 것이었으니까. 크리칼료프는 브랜타 종이라 불가능하다고 했으니 다른 종들이라면 가능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레이첼은 쓰게 웃으며 어셔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갑자기 다가올 줄은 몰랐던 어셔는 코 끝에 닿는 상큼한 과일향에 굳어버렸다.

"힐디스비니를 길들이고 싶은 거니?"
"네."

그리곤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의 감촉에 얼굴을 붉혔다. 코앞에서 마주한 여인의 맑은 하늘 같은 눈동자와 밤바람에 흩날리며 닿는 푸른 머리카락이 볼에 스치는 느낌은 어쩐지 시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조급한 모양이구나."

레이첼의 말이 그의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네 나이 대면 웬만하면 노는  좋아하지 진지하게 힐디스비니를 길들이려고 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장난이라도 치듯 어셔의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쥐었다 놓았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어른에게 의지하는 것도 방법이야."
"하지만!"

그런 어셔의 마음을 안다는 듯 레이첼의 말이 들려왔다.

"괴롭지? 내가 해결해야 하는데 어떻게든 해야만 하는데 아무것도 할  없으니까."

어셔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야 지금도 그는 그랬으니까.

"너는 아직 어려. 세상에 처음부터 혼자서 뭐든지 할 수 있고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의지할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도나르와 시프는 만날  없었고 크리칼료프는 겨우 스승이 되었다 뿐이지 아직까지 믿을  있는 사람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지금 네가 무력하다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렴. 나도 어릴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러나 그녀의 말이 어셔를 타일렀다.

"누군가 너를 할  아는 게 없다고 한심하다고 욕해도 신경 쓰지 말렴. 그런 사람은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뭐든지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어른이 되어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은 넘치는데 말이야. 레이첼은 씁쓸하게 중얼거리다 마지막으로 그의 머리를 가볍게 정리해 주고 일어섰다.

"그러니까. 마음껏 어리광 부려도 좋아. 적어도 네 스승님은 아이의 어리광마저 받아주지 않는 못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으니까."

그녀는 힐디스비니에 올라타며 어셔에게 손을 흔들었다.

"가능하다면 다음에 또 만나자. 꼬마 아가씨."

이내 떠나가는 레이첼의 뒷모습을 보며 어셔는 중얼거렸다.

"...전 남자인데요."

이미 멀어져 버린 그녀의 등에 그의 말이 닿았을 리는 없지만.

"성지의 사절이니만큼 자만할 법도 한데. 철저하군."

어느새 움집 밖으로 나온 제레미아의 말이었다.

"뭐, 여전하구만."

크리칼료프가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에 어셔는 의아했다.

"혹시 아는 사이였어요?"

가만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어쩐지 그들이 레이첼을 아는  같았으니까. 특히 크리칼료프가.

"아는 사이라고 해야 할까. 모르는 사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애매하구먼."

정작 돌아오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도 성기사였으니 확실히 아는 사이인 것 같아  물어보고 싶었지만 크리칼료프가 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움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부외자도 사라졌겠다. 우리는 우리끼리 해야 할 게 있잖냐."

어셔가 설마 하며 그를 보자 크리칼료프가 고개를 끄덕인다.

"꼬마 아가씨의 구출 작전이지. 제레미아. 정보는?"
"점심쯤에 전달받았다."

제레미아가 양피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펼쳐 보이자 커다란 건물의 지도처럼 보이는 그림이 나타났다.

"설마 이건."
"왕성의 지도다. 그래봤자 왕족 소유의 지도는 아니라서 비밀문이나 길 같은  없지만 대략적인 길은 파악할 수는 있을 거다."
"이런 건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그냥, 이래저래 아는 녀석이 많아서 운 좋게 구한 거다."

그렇다 해도 이런 걸 함부로 구할 수 없다는 것쯤은 메디아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기에 알  있었다. 영지의 지도는 물론 성 내부의 지도는 더욱 엄격하게 관리되었다고 했으니까. 특히 영지의 지도라면 몰라도 어셔는 성 내부의 지도 같은 건 본 기억도 없었다.

"한 번 구출 계획을 세워보자고."

그럼에도 크리칼료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고.

"후우, 결국 캐트시들과 척을 지겠군."
"걱정 마. 우린 원래부터 걔들이랑 사이가 좋지는 않았어."
"자랑이다.  자식!"

푸념하는 제레미아와 투닥이는 모습을 보며 어셔는 몰래 울음을 삼켰다. 그렇게 그들은 지도를 가운데 두고 모여 앉았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다만 역시 침투할만한 곳이 그리 많아 보이진 않는군."

제레미아는 팔짱을 끼고 지도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왜요?"

때문에 어셔가 묻자 그는 침음을 삼키며.

"꼬마야. 너는 파르즈의 왕성을 본 적이 있냐?"
"아니요."

이렇게 지도로 보기만 해서는 거대한 사각형의 구조물 같기는 했다.

"지도로 보면  모르겠지만 파르즈의 왕성은 거대한 절벽을 조각해 안쪽에 묻혀있는 형태다."

제레미아는 작은 나뭇가지로 지도의 세 면을 쿡 찔렀다.

"이 세 면은 완전히 막혀있는 것이나 다름없지."

어셔는 그의 말을 듣고 마을의 한 편을 차지하고 있던 높고 긴 절벽을 떠올렸다.

"그 절벽 안에 성이 있다고요?"
"그 안에는 마을이 또 있으니까. 더 안쪽이지."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았지만 어떻게 생겼으면 그렇게 되는지  수가 없었다. 저 절벽 속에 마을이 하나 더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어떻게 생겼는지 감이 전혀 안 오는데요."
"몰라도 된다. 마을로 들어가는 건 문제가 아니니까. 문제는 어떻게 왕성으로 들어가느냐지."

세 면이 절벽으로 막혀 있다고 한다면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면뿐이라는 말인데. 정면으로 들어가면 들킬 것이 뻔했다.

"벽을 파고 들어가는  어때요?"
"그건 하루 이틀로 될 일이 아니다.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중간에 들킬 확률이 너무 높다."

어셔가 기껏 생각해낸 말이었지만 제레미아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이렇게 간단한 생각을 다른 누가 하지 않았을까?

"그럼 위에서 땅을 파는 건요."
"그쪽은 입구도 있고 경계도 삼엄하다. 성공한다고 해도 소리가 요란하고 목표와도 거리가 너무 멀어."

결국 다시 고민해 보지만 그는 딱히 좋은 생각이라고 할만한 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지금까지 조용히 지도만 쳐다보던 크리칼료프가 입을 열었다.

"하늘로 날아가는 건 어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넌 어디의 하피냐?! 그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너무 눈에  거 같은데요."

제레미아와 어셔의 말에 크리칼료프가 킥킥 웃었다.

"그럼 너희는 오늘 단  번이라도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냐?"
"그건... 아니지만요."

그렇게 말하니 또 설득력이 있는 것도 같아 그가 묘한 표정을 지으니 제레미아가 이마를 짚었다.

"아무튼 그건  된다. 애초에 너라면 몰라도 이 녀석은 하피도 아니란 말이다."
"뭐, 됐다. 그리고 파르즈의 내부 구조상 하늘을 날아도 눈에 띄거든."

크리칼료프는 그렇게 말하며 그들이 올려놓았던 성의 지도 옆에  다른 지도를 올려놓았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한쪽이 치우쳐진 타원형의 지도는 파르즈의 내부 형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애초에 지도를 부탁한  안에서 어떤 경로로 아가씨들을 구할지 보려던 거뿐이다. 안으로 들어갈 방법 같은 건 이미 생각해뒀다고."
"그걸 먼저 말하란 말이다!"

제레미아가 크리칼료프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어셔도 허탈한 마음으로 지도를 바라만 보고 있으니 크리칼료프의 말이 들려왔다.

"계획 자체는 간단 혀. 일단 내가 꼬마 아가씨를 구하러 간다."
"네? 그럼 저는."

분명 그에게 벨카를 구해달라고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셔는 설마 그가 직접 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그를 도와주는 선에서 그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꼬마 아가씨랑 같이 있던 헬레나란 아가씨도 있었잖냐. 그 아가씨는 네가 구해줘야겠다."
"아."

그의 말에 어셔는 겨우 생각났다. 자신을 파르즈까지 올 수 있게 해준 연금술사라고 했던가.

"...알겠어요."
"엉? 꽤나 순순하구먼. 난 네가 꼬마 아가씨를 구하러 가려고 할 줄 알았다만."

크리칼료프의 말대로였다. 어셔는 마음 같아서는 직접 벨카를 구하러 가고 싶었지만 아까 전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던 레이첼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탁드릴게요."

어셔는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가 밤을 타고 들려왔다.

"언제까지 외면할 생각이냐?"

달이 빛나고 별들이 반짝이며 빛을 내리는 새하얀 밤을 지켜보던 크리칼료프를 향해 제레미아가 다가가 물었다. 어셔는 이미 기력을 아끼기 위해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글쎄다. 녀석들이 과연 내가 돌아간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거 같냐?"

밤은 소리도 없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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