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한걸음.
그들은 곧 파시틸라 위에 떨어진 청회색 기둥을 중심으로 갑자기 물의 높이가 낮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 뭐예요?"
"녀석이 식사를 시작한 거뿐이다."
"그러면 저게 입이라고요?"
그럴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저렇게 긴 주둥이로 주변의 물이건 모래건 할 것 없이 전부 빨아들이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저희도 빨려 들어가는 건 아니죠?"
갑자기 빨라진 물살에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파시틸라들과 함께 잡아먹힐까 봐 불안했다.
"그건 쟤한테도 봉변이여. 입이 빨대 같아서 목이 막힌다고."
"저렇게나 큰데요?"
크기만 보면 다른 몬스터는 물론이고 커다란 동물들을 먹어치워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저렇게 크면 오히려 작은 먹이를 최대한 많이 먹는 게 효율적이다."
크리칼료프는 그러면서 물살에 휩쓸려가던 주먹 만한 무언가를 손으로 낚아챘다.
"마침 잘 됐구만. 기가노토게투스가 있다는 건 이곳이 비옥하다는 증거다. 생각보다 목표를 빨리 찾을 수 있겠어."
그의 손안에서 구부정한 몸을 파닥거리며 발버둥 치는 그것은 투구처럼 단단한 껍데기를 가진 벌레처럼 보였지만 그나마 파시틸라보다는 덜 징그러웠다.
"설마 그것도 몬스터는 아니죠?"
"트리옵스라고 하는 새우 비슷한 녀석이다. 트리와비드와 함께 별미로 통하니까. 챙겨둬야지."
그는 등 뒤에 매어둔 통에 트리옵스를 던져 넣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셔는 기가노토게투스의 아래를 벗어나면 또 파시틸라들이 달려들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이 녀석 아래에 오래 있는 건 추천하지 않는데. 녀석이 먹이와 함께 빨아들인 모래나 물을 어쩌겠냐?"
그가 그렇게 말하며 가리키는 곳에는 웬 구멍이 보였다. 분명 머리 부분으로 보였는데.
"콧구멍으로 뱉어내니까. 빨리 피하자고."
"...왜 콧구멍이 아래에 있는 건데요."
"쟤가 저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수. 알아서 피해야지."
어셔는 갈수록 파르즈가 익숙하기는커녕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게 기가노토게투스의 아래를 빠져나오자 곧 드넓은 하늘이 펼쳐졌다. 빽빽하게 자라있던 맹그로브 나무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 몇몇이 섬처럼 하늘을 떠다니는, 잔잔한 물 바다가 하늘의 경계와 맞닿아 비추고 있었다. 그 광경에 이전에 있었던 일도 잊고 바라만 보고 있으니 크리칼료프의 목소리가 그를 깨운다.
"사냥감 찾았다."
"네? 어디요?"
그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리면 풍경에 정신을 빼앗겨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하늘의 가운데 덩그러니 자라난 맹그로브 나무 위를 날아다니며 맴도는 작은 생물들과 물 위로 뻗어 나와 우거진 갈대 숲, 그 위로 보이는 거대한 말과 같은 형체들이 크고 작은 다른 생물들과 어울려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역시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덩치, 파충류의 비늘과 같은 피부와 몸의 곳곳에 조금씩 나있는 구사크랍토르와 비슷한 깃털까지.
"설마 저희가 사냥해야 하는 게 힐디스비니에요?"
비록 비늘과 깃털의 색이 어셔가 아는 것과 달랐지만 힐디스비니가 분명했다.
"정확히는 길들이는 거다. 너도 기사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쯤은 알고 있잖냐."
기사들에게 있어서 전투능력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건 힐디스비니의 존재였다. 그야 제아무리 날고 기는 기사라 해도 힐디스비니를 탄 기사와 타지 않은 기사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그래서 창과 활을..."
특히 힐디스비니의 성미는 까다롭기로 유명해서 조금만 심기를 거슬러도 큰일이 날 수 있다는 건 도나르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지만 설마 사람이 쓰는 무기까지 알아보고 가릴 줄은 몰랐다.
"게다가 파르즈에 서식하는 힐디스비니는 사납기로 유명한 브랜타 종이지."
"브랜타는 또 뭐예요?"
깃털 색이 다른 것이 연관이라도 있는 것일까?
"같은 힐디스비니라도 종은 나뉘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특징은 있다."
검은 깃털 힐디스비니는 브랜타, 회색 깃털 힐디스비니를 앤서, 하얀 깃털 힐디스비니를 친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제가 힐디스비니를 길들일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지."
혹시나 하긴 했지만 곧바로 돌아오는 그의 대답에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니 크리칼료프가 말을 이었다.
"다른 종이라면 몰라도 브랜타 종이니 말이다."
"종이 문제인 거예요?"
"종마다 다르다고 했잖냐. 개체마다 성격 차는 있겠지만 브랜타 종은 특히 사납고 고고하다. 자기를 이기지 않으면 절대 등을 내주지 않거든."
"그 정도예요?"
어셔는 힐긋 저 멀리 보이는 힐디스비니들을 바라보았다. 검은 비늘로 이루어진 피부와 회색과 검은색이 섞인 윤기나는 깃털을 자랑하는 힐디스비니들은 주변에 작은 동물들이 끼어 있음에도 배척하는 일 없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러면 왜 길들인다고 한 건데요?"
"너는 기사가 사람하고만 싸운다고 생각하냐?"
"그건..."
"이러니저러니 해도 현재 기사들의 주적은 몬스터다. 그러니까 나라끼리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드물지."
크리칼료프가 나뭇가지로 힐디스비니들을 가리켰다.
"힐디스비니는 몬스터도 아니면서 웬만한 몬스터보다 강한 녀석들이다. 그리고 나름 말도 통하지. 여러모로 인간이 아닌 것들의 연습 상대로는 저만한 녀석들도 없어."
어셔는 그 말에 깨달았다. 그럼 힐디스비니가 기사가 되는 최소한의 조건인 것도.
"어쨌든 그런 이유도 있는 거다. 알아 들었으면 시작하자고."
"네? 지금이요?"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는 걸 까먹은 거냐?"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었지만 크리칼료프의 말에 지금 자신이 그의 제자가 된 이유를 다시금 떠올렸다. 그가 도와주기로 한 것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소녀를 구하고 지킬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어셔가 그에게 받은 검을 쥐고 힐디스비니들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하자 뒤따라오는 물소리와 함께 크리칼료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천천히 천천히, 힐디스비니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다가가라. 놈들에게 모습을 대놓고 보여주고 다가가야 녀석들이 너를 포식자로 인식하고 다굴을 때리진 않을 거다."
"뭐라고요?"
어셔는 지금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힐디스비니를 만만하게 보지 마라. 웬만한 포식자는 주제도 모르고 덤볐다가 저 발에 짓밟혀 죽는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더욱 긴장되는 느낌에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검은 힐디스비니 하나와 눈을 마주친 건. 그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고 입가를 부풀리는 행동에 침을 삼켰다. 저 행동만큼은 어셔도 알고 있는 행동이었으니까. 저건 힐디스비니가 포식자를 발견하고 주변에 경고하려는 것이었다. 힐디스비니가 나팔소리 같은 것을 낼 때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실패한 것일까 싶어 검을 더 세게 쥔 순간.
-쿠륵.
녀석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다 부풀렸던 입에서 바람을 뺐다.
"후, 아슬아슬했구먼."
크리칼료프의 말에 돌아보니 그가 신호를 보내듯 한 손을 받치고 높이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포식자라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만 혹시 모르니 계속 천천히 다가가라."
그렇게 그들은 계속 힐디스비니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중간에도 몇 번 그들을 발견한 녀석들이 입을 부풀리다 멈추거나 무시하는 것을 보면서 드디어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자 생각보다 더 박력 넘치는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저, 길들이는 건 고사하고 죽지는 않겠죠?"
척 봐도 검은 비늘 아래로도 엿보이는 울퉁불퉁한 근육질과 덩치는 흉기에 가까워 보였고. 윤기가 흐르는 검은 깃털과 비늘은 웬만한 검은 들어갈 것 같지도 않으니. 그가 어떻게 해보려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연습이잖냐. 연습. 마음 편하게 먹어. 내가 보고 있으니 죽지는 않을 거다."
"...알았어요."
어셔는 그의 말을 믿고 눈앞의 힐디스비니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그와 동시에 눈앞에 하늘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물에 얼굴까지 빠졌다 간신히 일어났다.
"콜록! 콜록! 이게 어떻게 된...?"
코와 입을 침입한 짠맛을 털어내고 크리칼료프에게 물었지만 곧 어셔는 이상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자, 하이파이브."
-쿠륵.
크리칼료프가 손을 들어 힐디스비니에게 손바닥을 보이자 녀석이 어정쩡하게 들고 있던 발로 어색하게 그의 손바닥과 마주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그가 어셔를 돌아본다.
"인마. 아무리 급해도 신호 정도는 듣고 공격해라 진짜로 공격하는 거라 생각하고 발굽을 들었잖냐."
힐디스비니를 길들이는데 그런 규칙까지 있다는 게 놀라울 다름이다. 아무래도 녀석이 발로 그를 차기 전에 크리칼료프가 밀쳤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몇 번 손을 들고 움직이는 것을 힐디스비니에게 보이니 녀석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잘 말해뒀으니까. 신호 정도는 받고 공격혀."
어셔는 뭐라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휘파람을 부는 동시에 어셔는 또 하늘을 마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야 힐디스비니가 머리로 그를 들이받아 날려버렸으니까.
"신호가 있건 없건 똑같...!"
첨벙, 귀를 때리는 물소리와 함께 또 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결국 실패했네요."
그 이후로 몇 번을 일어나며 다시 힐디스비니에게 도전했지만 어셔는 그 숫자만큼이나 녀석의 머리나 몸에 부딪혀 하늘을 날아 물에 빠져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찾아온 밤. 그들은 근처의 작은 육지에 불을 피우고 그 앞에서 몸을 말리고 있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건.
"얘네들은 왜 여기 있는 건데요."
오늘 하루 신나게 그를 날려버린 녀석을 비롯한 힐디스비니들이 그들의 근처에 누워 함께 야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덩치로 좁은 곳에서 부대끼고 있으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뭐, 어뗘. 원래 자기들이 자던 곳에서 자겠다는데."
그러면 할 말이 없었지만 크리칼료프가 이곳으로 오면서 잡았던 트리옵스 같은 것들을 굽다 몇몇을 어셔를 상대했던 힐디스비니에게 던져주자 녀석이 받아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어셔는 멍하니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다 그에게 물었다.
"...벨카는 무사하겠죠?"
"...죽이지는 않을 거다. 다만 무슨 일을 겪고 있을지는 할 말이 없구나."
어셔는 그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약한 탓이었다. 좀 더 강해져야만 했다. 적어도 내일은 저 녀석의 목을 붙잡기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을 때였다. 잠시 힐디스비니들이 웅성이는 듯하더니.
"아, 좀! 미안한데 잠시만 비켜봐."
그들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나타난 건.
"역시 여기 있었네. 아저씨, 어셔."
밤처럼 짙은 흑발과 생기 넘치는 눈동자에 불만을 담은 그녀는 바로 나우시카였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둘 다 연락도 없고! 레미 아저씨도 괜찮을 거라고만 이야기하지! 일은 바쁘지!"
빼액 소리치는 그녀의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든 힐디스비니들은 눈을 끔벅이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몇몇은 아예 이쪽을 구경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단골손님은 새로 온 직원이 안 좋은 일에 엮인 거 아니냐면서 경비대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해서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으휴! 내가 요프 아저씨를 알아서 망정이지!
"아는 사람이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몇 번을 변명해야 했는데! 내가 속이 터져 정말!"
그렇게 따닥따닥 쏘아대는 잔소리는 달이 중천에 떠오를 무렵에야 나우시카가 지쳐 헥헥 거리며 끝이 났다. 어찌나 길었으면 구경하던 힐디스비니들도 질려 슬그머니 물러난 상태였다.
"하이고 골이야. 그 잔소리는 여전히 길구만."
크리칼료프도 관자놀이를 누르며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에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하던 그녀는 곧 한숨을 내쉬며 착잡한 눈으로 크리칼료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저씨, 아직은 아닌 거지?"
"그려."
"흥, 그러면 됐어. 빨리 아기 토끼랑 헬레나 언니나 구하고 돌아와."
그녀는 겨우 만족한 듯 그 말을 남긴 채 떠나갔다. 어셔는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크리칼료프를 바라보았지만.
"그런 게 있다."
그는 그저 어느새 사냥해왔는지 모를 여러 생물을 구워 나눠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