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한걸음.
"그 목소리..."
여인은 대장간에서 마주친 기사를 떠올리며 생각에 빠졌다. 왜냐하면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있어서 잊지 못할 아픔을 새겼던 자의 것과 너무나 비슷했으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혹시 정말 그 자인 것은 아닐까? 돌아가서 확인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였다.
"레이첼 님."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거는 한 사람만 아니었다면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죠?"
그녀가 되묻자 그가 조용히 속삭인다.
"파르즈의 왕께서 내부 구역에 들라 하십니다."
"이제서야 말인가요?"
그녀는 꽤 오래전에 도착했음에도 내부 구역은커녕 바깥 구역에 방치해 두었던 왕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이곳의 성당을 정비하고 확인하느라 오래 머무를 필요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동안 축제까지 벌였으면서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 괘씸하기까지 했다.
"저희가 확실히 만만하게 보였던 모양이군요."
그들이 성지를 차지하게 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이건 지나쳤다. 그녀는 성당으로 돌아가기 전 다시 한번 대장간을 돌아보았다.
"...."
그녀가 아는 자와 너무 비슷한 기사의 목소리 때문에 더 경계심이 든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혹시라도 성당에 노란 금발에 몸 전체에 붕대를 감은 아이가 찾아오면 특히 신경 써달라고 해주세요."
푸른 여인이 떠나고도 한동안 대장간의 물건을 찾아보던 크리칼료프가 들고 온 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 같은 판 몇 개였다.
"이거 보호구에요?"
보호구라면 입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가 들고 온 것은 어셔가 아는 것과 좀 달라 보였다. 원래 알고 있던 보호구는 약간 두께가 있는 상의와 하의에 필요한 부분에다 두터운 가죽을 여럿 덧대놓은 것이었다면 그가 들고 온 것은 가죽을 따로 떼어놓아 만든 작은 방패들처럼 보였으니까.
"정확히는 보호판이라고 부르는 거다."
여전히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그가 어색했지만 어셔는 그가 내민 보호판을 받아들었다.
"너무 가벼운 거 아니에요?"
가죽을 여럿 덧대어서 나름 단단하긴 했지만 아무리 여러 조각처럼 나누어져 있다고 해도 가죽 부분이 어셔가 원래 사용했었던 보호구보다 얇고 가볍게 느껴졌다. 몇 번 공격을 막거나 하다 보면 가죽이 뜯길 것 같다.
"아마 네가 말하는 건 가죽 갑옷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건 조금 다르다."
그러면서 그는 어셔에게 준 것과 같은 보호판을 들어 뒷면을 보였다. 그곳에는 몸에 묶어 고정시키는 용도인지 면이 넓은 천이 둘둘 말려있었다. 이내 크리칼료프는 어셔의 팔꿈치에 작은 보호판 하나를 붙여 감아주었다. 그러자 붕대 위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붙어 있는 보호판은 이렇게 보니 확실히 보호구처럼 보였다.
"이건 보통 사냥꾼들이 사용하는 물건이니까."
"그러고 보니 사냥하러 간다고 했었죠."
그런 게 정말 벨카를 구하는 일에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일단 따르기로 했다. 다른 방법도 보이질 않았으니까.
"두께도 얇고 안에 있는 철판도 구색만 맞춘 느낌이라 애매하지만 편의성 하나는 다른 갑옷보다 뛰어날 거다."
"확실히 움직이긴 편하네요."
그가 주는 보호판을 전부 덧대 입고 보니 원래 입었던 보호구보다 움직이는 걸 방해하는 느낌이 훨씬 적었다. 최소한 가슴께와 어깨, 팔꿈치와 무릎 같은 부위만 가리는 보호판은 그 효용성이 의심스러운 건 둘째치고 움직이기는 정말 편했다. 하지만 다른 부분이 문제였다.
"이 유니폼은 대체 언제까지 입어야 해요?"
어셔는 여전히 유니폼 차림이었으니까. 유니폼 위에 보호판들을 덧대니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느낌의 옷이 되어버렸다.
"흠, 확실히 계속 유니폼을 입는 건 좀 그렇구만. 옷 가게를 들리긴 해야겠어."
어셔는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환호했다. 나중에라도 그에게 옷값을 갚아야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 옷을 벗는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얼마나 불편했던가?
"이게 뭐예요!!?"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대장간에서 보호판을 구매하고 옷 가게에 들렀지만 크리칼료프가 옷 가게에서 사 온 건 유니폼과 비슷한 느낌의 치마였으니까.
"한동안 그러고 다녔으니 익숙하지 않냐? 싸울 땐 더 편할 텐데."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어셔는 그가 옷 가게에 들어갈 때 따라들어갔어야 했다고 한탄했다. 이미 옷 가게를 나와 제레미아의 집 근처에 와있으니 뭐라 할 수도 없어 결국 어셔는 어쩔 수 없이 그가 사 온 옷으로 갈아입고 그 위에 보호판을 덧입어야 했다.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게 기분 나빠 괜히 붕대만 더 세게 감았다.
"그래서 뭘 사냥하는 건데요?"
"일단 보고 나면 뭘 하려는 건지 바로 감이 올 거다."
어느새 원래 목소리로 돌아온 크리칼료프는 어셔에게 이전에도 주었던 길이가 긴 한 손 검과 단검 한 자루를 건네주었다.
"화살이나 창은 안 챙겨도 되는 거예요?"
단검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보통 사냥이라 하면 활이나 창을 챙기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싶어 물으니 그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그런 걸로 도전하려 했다간 비겁하다고 생각해서 진짜 죽이려 들 거다."
"대체 뭘 사냥하길래 그런 것까지 고려하는 거예요?"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애초에 동물을 사냥하러 가는 게 맞는지도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리칼료프는 가방 하나를 챙겨 숲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니 어셔도 군말 없이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들어선 맹그로브 숲은 여전히 어셔에게 낯설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위로 뻗은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햇빛을 가리고 있는데 나무의 뿌리들은 그의 무릎까지 올라오는 물에 있음에도 그 위로 나뭇가지처럼 뻗은 뿌리를 보이고 있어서 더 으스스했다.
이런 곳이라면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을 텐데 물에 젖어 무거워지고 물에 닿지 않은 곳까지 타고 오르는 축축한 물의 감촉에 붕대 정도는 풀고 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면 아래로 어떤 것이 지나다녀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아서 다리에 무언가 스치는 느낌마저 들어 몸을 떠니 크리칼료프가 걸음을 멈춘다.
"뭔가 찾았어요?"
혹시 사냥감을 찾았나 싶어 그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날카로운 무언가 바람을 찢는 소리였다. 어셔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 소리는 그의 다리 근처에서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멎었다.
"쯧, 벌써부터 파시틸라가 노리다니 너 몸에 무슨 미약이라도 발랐었냐?"
"네?"
어셔가 의아해하니 크리칼료프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소리가 빠진 곳으로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게 뭐예요?"
그건 어셔도 처음 보는 생물이었다. 크리칼료프가 던진 것으로 보이는 단검에 찔려 죽은 듯 축 늘어져 있는 그것은 보기만 해도 미끄러워 보이는 질감의 하얀 표피를 가진 지렁이처럼 보였으나 그 두께는 어셔의 팔뚝보다 두꺼웠고 길이는 어셔의 키만큼이나 길어 보였다.
"파시틸라라고 하는 파르즈에서 자생하는 몬스터다."
"몬스터라고요?"
"이렇게 보면 잘 모르겠구만."
그는 다른 손으로 녀석의 몸을 잡았다.
"보통은 지금처럼 물 아래를 헤엄쳐 다니는 녀석이지만 목표물을 발견하면."
그리곤 녀석의 하얀 표피를 벗기자 곧바로 드러나는 붉은 몸체는 어셔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남자의 물건처럼 생긴 그건 저런 생물에게 있을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 이질적인 것이라 그것이 몬스터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바로 파고들면서 구속하는 거지. 다만 이번에는 네가 남자다 보니 물속으로 끌어들여서 익사시킨 뒤 잡아먹을 생각이었나 보다."
"그런 게 여기 득실거린다고요?"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닌 수면 아래에 저런 것이 스멀거리며 헤엄치는 곳이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 두 달쯤 전에 일이 있어서 요 녀석들을 구석구석 뒤져가며 토벌한 적이 있었으니 그렇게 득실거리진 않을 거다."
"저런 게 있다는 사실부터가 끔찍한데요."
어셔는 오소소 돋는 소름을 느끼며 팔을 쓸고 있으니 크리칼료프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일단 도망치긴 해야것다."
"네? 왜요?"
"잔말 말고 그냥 튀어!"
그는 그러면서 어셔를 잡아들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셔는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뒤로 방금 크리칼료프가 죽였던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 하얀 것들이 수면 위로 헤엄치는 것이 보일 정도로 꾸물거리면서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적다면서요! 적다면서요!! 적다면서요!!!"
"저것도 전체적으로 보면 적은겨! 지금이 번식철일줄은 몰랐지!"
저것도 적은 숫자라는 것이 놀랄 지경이지만 그다음 말이 신경 쓰였다.
"몬스터의 번식철 같은 건 미리 알아두란 말이에요!"
"평소에는 상관없어! 어거지로 도시에 들어와서 여자 몇몇이 봉변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되긴 하는데 남자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노리진 않는단 말이여!"
그것도 문제가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문제가 중요했다.
"그러면 지금은 왜 저러는데요!?"
"나도 몰러!! 너 진짜 몬스터의 미약 같은 거 바른 적 없냐?!"
"그런 거 바른 적 없다고요!!"
도나르에게 몬스터가 그런 것을 이용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런 것을 바른다는 생각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위로 올라가면 안 돼요?!"
그러다 발견한 건 맹그로브 나무들의 뿌리 사이에 모래와 나뭇조각이 쌓여 만들어진 땅이었다. 그곳에 올라가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저것들 수륙양용이다! 잠깐 정도는 땅 위에 올라와!"
그것마저 답이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이대로 달리기만 한다면 아무리 기사라도 지칠 것 같았는데.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어디선가 귀를 울리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온 건. 어셔는 또 몬스터인가 싶어 무서웠지만 크리칼료프는 오히려 그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뭐 하긴! 방법을 찾았으니까 가는 거 아니여!"
그러자 더욱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그. 어찌나 빠른지 맞바람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자, 도착했다."
"으윽, 도착했다고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그들은 여전히 맹그로브 숲 안이었다.
"도착하긴 어딜 도착해요!"
그들의 발치에는 여전히 물이 차있었고 심지어 더 어두워진 것이 더 깊은 곳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심지어 파시틸라로 보이는 하얀 형체들의 숫자는 어쩐지 더 늘어났고 저 멀리서 그들을 찾는 것처럼 몇 마리가 수면 위로 고개를 쭉 뻗어들고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빨리 도망쳐요! 네? 이대로 가면 진짜 잡아먹힌다고요!"
어셔는 급하게 그를 재촉했지만 크리칼료프는 여전히 그를 들고 서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여차하면 최후의 수단이라도 쓰면 되니까."
"그게 대체 뭐길래."
하지만 어셔가 더 물을 새도 없이 수면 위로 주변을 둘러보던 파시틸라 하나가 그들 쪽을 발견하고 일제히 물속으로 숨어드는 모습이 보여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진짜 이대로 있어도 되는지 의문이었지만 일단 그도 성기사라고 했으니 무슨 수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래도 점점 더 다가오는 놈들의 모습에 정말로 도망쳐도 되지 않을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였다.
-우우우우우웅!
방금 전에도 들었던 귀를 울리는 무척이나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그것들의 위로 무언가 내리 꽂힌 건.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울리고 그 충격으로 하얀 모래와 물이 뒤섞여 높이 솟아오르며 놈들의 하얀 몸체가 조각나 휩쓸리는 것이 보였다.
"우웩! 퉷! 으, 짜!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 모습을 보고 있다 입안으로 들어와버린 모래와 짠맛을 털어내고 물었다.
"위를 봐라."
딱히 설명하는 일도 없이 위를 바라보라는 말이 의문이었지만 어셔는 그제야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예요. 저게?"
땅까지 닿는 거대하면서도 긴 머리와 역수로 쥔 검처럼 안쪽으로 휘어진 거대한 어금니, 청회색의 피부와 하늘을 완전히 가리는 몸까지. 그건 지금까지 어셔가 보아왔던 것 중에서 가장 크다고 단언할 수 있는 생물이었다. 숲이 어두워진 건 단순히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와서 그런 게 아니었다.
"기가노토게투스, 파시틸라를 주 먹이로 삼는 몇 안 되는 녀석이다."
그들은 지금 그 거대한 생물의 배 아래에 있었으니까.
"...저걸 사냥하러 온 건 아니죠?"
"미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