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03화 〉한걸음. (203/220)



〈 203화 〉한걸음.

"뭐, 가르친다고 하지만 적어도 검술 같은  네가 배운  조금 복습하는 것밖에 안될 거다."

공기를 베어 가르는 소리가 매섭게 들려왔다. 크리칼료프가 목검을 들고 실험이라도 하듯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왜요?"

어셔는 그가 시키는 대로 자신이 배운 검술을 기억이 나는 대로 선보이고 그것을 크리칼료프가 관찰한 뒤였기에 의문이 들어 물으니 그가 침음을 흘린다.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스승, 파시페니아 출신이냐?"
"네, 어떻게 아셨어요?"
"키야, 어쩐지. 오랫동안 단절된 국가에서 왔다는 애가 익숙한 검술을 쓰고 있어서 혹시나 했지."

크리칼료프는 질린다는  몸을 떨었다.

"넌 파시페니아라는 나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냐?"
"그, 이름만 아는 거라 잘은 몰라요."

단지 드래곤들에게 맞서 싸울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기사들로 가득한 나라라는 것만 얼핏 들은 기억은 있었다. 괜히 기사국이라 불릴 정도였을까?

"그럼 됐고. 다른 건 몰라도 그곳의 검술은 쓸만하니까. 그것만 끈덕지게 연습해도 한 몸 건사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진절머리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궁금하지 않던 것도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파시페니아가 어떤 곳이길래 그래요?"
"기사들의 무덤."
"네?"

어셔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묻고 싶었지만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어지간해서는 파시페니아에  생각은 하지 마라. 그나마 타국에 대해선 관대한 편이지만 그래도 연관되지 않는 편이 니 인생에 도움이  거다."

크리칼료프는 더 이상 말하기도 싫다는 듯 훈련이나 하자며 말을 돌렸다. 어셔는 궁금하긴 했지만 그래도 벨카를 구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조금이나마 더 힘을 기르고자 그의 말을 따랐다.

"꼬마야. 너는 장검을 어떻게 생각하냐?"
"그냥 길이가 긴 검 아니에요?"
"그건 너무 있는 그대로잖냐. 무기로서 말이다. 무기로서."

무기라. 어셔는 자신이  장검 형태의 목검을 바라보았다. 분명 다른 검에 비해 길이가 훨씬 긴 검은 상대를 찌르거나 공격하는  알맞아 보이지만 도나르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자신이 상대해 왔던 로기도 함께 떠올라 기분 나빴지만.

"방패, 같다고 생각해요."

장검은 그저 보기엔 긴 검이었지만 그 검을 상대하고자 하면 그만한 지름의 방패를 상대하고 있는  같다고 매번 느꼈었다.

"꽤나 예리하구만 하지만 좀 아쉽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목검을 몽둥이처럼 손바닥에 탁탁 부딪혔다.

"아무리 장검이 방어에 용이하다고 해도 검은 검이다. 하다못해 그냥 방패도 둔기로 쓰이는데 검을 그냥 막는데만 쓸 거냐?"

그의 말을 듣고 나면 확실히 그랬다. 그가 항상 연습해왔던 건 적의 공격을 막는 것과 동시에 적을 공격하는 방법이었으니까. 비록 성공한 적은  없지만 당해본 적은 많았기에 그것이 상대하는 입장에서 얼마나 성가신지 알고 있었다.

"단순히 막기만 해서는 그대로 이어지는 공격들에 죽는다. 전투에서 공격과 방어는 일체. 함부로 떼어 놓을 수 있는  아니다."

그건 도나르가 항상 당부하던 것과 같은 말이었기에 어셔는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장검은 꽤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 봐라."

그는 한 손가락만으로 목검의 아래를 받쳐 평형이 이루도록 만들었는데.

"손이 손잡이 쪽에  가깝네요?"
"그래, 이건 목검이긴 하지만 최대한 장검의 특징을 가져왔으니까."

크리칼료프가 손잡이에 더 가까운 곳에 손가락만 받치고 있음에도  길게 뻗어 나온 검날 부분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목검을 제대로 쥐며 말을 잇는다.

"장검의 무게 중심은 손잡이에 있다. 이런 양손검의 가장 큰 특징은 양손의 중심을 기준으로 원을 그린다고 생각하면서 반대로 움직이면."

그가 손잡이를  손을 엇갈리도록 움직이자 어셔의 키와 엇비슷한 크기의 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순간 정도는 웬만한 한 손 검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검날이 마치 뱀처럼 휘어지는 것을 보고 있으니 그와 잠시나마 검을 맞대었을 때와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어셔는 혹시나 싶어 그의 행동을 따라 자신이 쥔 목검을 움직여보자 그리 많은 힘을 준 것이 아니었음에도 검신이 빠르게 회전하며 검격을 그리는 것에 감탄했다.

"대충 이론은 여기까지 하마 시간이 여유로웠다면 제대로 가르쳐 보던가 했겠다만."
"그럼 지금부터는..."
"대충 짐작이 가나 보구만."

크리칼료프는 보란 듯이 그에게 목검을 휘둘렀고 어셔는 급하게 검을 머리 위로 올려 그의 검을 막았다. 최대한 머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건 도나르에게서 항상 듣던 말이었으니까.

"그렇지. 적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검은 높이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의 검이 어셔를 찍어누르려 하는 것이 느껴져 인상을 찌푸렸다.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한 손으로 검신을 쥐어보았지만 결국 검을 쥔 손이 밀려나려는 순간 그가 힘을 뺐다.

"말했잖냐? 막기만 해선 의미가 없다고.  스승은 상대가 힘으로 밀어붙이려 할  어쩌라던?"

이미 크리칼료프의 검은 팔 안쪽으로 꺾여들어와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그의 검은 여전히 어셔의 검과 맞닿아 있었다.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은 삼류 중에 삼류지만 그렇다고 방어만 하면 그것대로 샌드백이 따로 없어."
"그럼 이럴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계속 검을 맞대면서 공격할 기회를 엿보거나 검면으로 공격을 흘려내야지."

그는 곧이어 어셔가 든 목검을 잡고 뺐어들었다.

"어떤 싸움이던 상대와 가까워질수록 더욱 치열해진다. 여기선 경험과 감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지만."

그와 동시에 어셔는 발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크리칼료프가 그의 발목을 걸어 넘어트린 것이다. 그의 검은 또 어셔의  옆에 있었다.

"기사는 검사 같은 게 아니다. 검술은 소양에 불과해. 그걸 명심해라."

너는 기사를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지킬  있어. 어셔는 목에 닿는 싸늘한 감촉에 침을 삼켰다. 단순한 목검일 뿐인데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카롭게 느껴졌다. 이게 기사였다.

"제가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네가 지키고자 한다면 말이다."

어셔는 다시 한번 벨카를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다시 검을 연습하는 일은 없었다.

"정말 계속 연습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그들은 지금 사냥에 필요한 장비를 사기 위해 마을로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검술은 소양일 뿐이라고 했잖냐."
"그건 알고 있지만요."

그가 그나마 자신 있는  장검을 다루는 것인데. 그것마저 게을리하면 문제가 있는  아닐까 싶었지만 크리칼료프는 발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너는 사흘 동안 뭔가 유의미한 발전이 있을  같냐?"
"...아니요."

사흘, 힘을 기르기엔 너무나 짧고 소녀를 구하러 가기엔 기나긴 시간.

"이렇게 단기간이라면 계속 하나만 물고 늘어지는 것보다. 잡기술이라도 여러 개 익혀두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거다."

그렇게 아무  없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을 때였다.

"어? 종업원 아가씨 아니야?"
"아."

그들이 마을에 들어섰을 무렵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어셔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유니폼 차림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따로 입을 옷도 없으니 갈아입지도 못하겠고. 괜히 붕대를 감은 팔만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나우시카의 여관에 찾아왔던 손님인지 그는 어셔를 기억하는 것 같았지만 정작 어셔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의 시선이 크리칼료프를 향했다. 그는 그의 겉모습을 보고 긴장한 듯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기사 나리십니까? 나우시카네 종업원은 왜?"

그는 약간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우시카의 여관에 들렸다면 그와 안면이 있을 법한데도.

"그냥 종자 삼아 키워보려는 거다."

이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셔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크리칼료프에게서 들려온 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무겁고 위압감 넘치는 사내의 목소리였으니까.

"볼 일이라도 있는 건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약간은 위협적인 그의 말에 그는 기겁하며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아는 얼굴이라서 그만."

그러면서 그는 지나가던 길이었다는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셔를 안됐다는  쳐다보는 것에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했다.

"아저씨, 방금 그건..."
"그냥 기억하는 목소리를 따라냈을 뿐이다. 그보다 역시 그 녀석 목소리야. 성능 확실하구먼."

다시 원래 목소리로 돌아와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음을 옮기는 크리칼료프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어느 대장간이었다. 그곳은 파르즈의 다른 곳과 다름없이 새하얀 건물이었지만 곳곳에 묻어난 회색 자욱, 창문과 굴뚝 위로 피어난 검댕으로 자욱하게 물들어 회색에 가까워 보였다. 철제 문은 그럭저럭 닦아놓는지 깨끗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세월을 따라 손자국으로 남아 닳아있는 흔적들을 지우지 못했다.

"주인장 계시오?"

크리칼료프의 목소리가 다시 바뀌었다. 아까와 같은 그 목소리에 어셔가 적응이 되지 않아 미묘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그가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였다. 화사한 하늘빛이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그곳에는 하늘빛의 단발을 뒤로 묶어놓은 한 여인이 놀랐는지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연한 하늘빛의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이 대장간의 주인인 것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어셔는 곧바로 스스로의 생각을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얼핏 봐도 대장장이와는 거리가 먼 갑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이 여자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갑옷은 어셔가 알고 있는 갑옷과 형태가 조금 달랐다. 몸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 피부가 드러난 곳이 하나 없다는 건 똑같았지만 갑옷의 모양과 천의 면적에서 확실하게 차이가 났다. 어셔가 아는 갑옷들보다 철의 면적과 두께가 적고 선이 가늘어 보였으니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그 갑옷의 아래에 덧대어진 새하얀 천이 보통 기사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깔끔하고 세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허리 춤에는 화려한 장식이 가미된 비어있는 검집이 있었다.

"...주인장이라면 지금은 좀 바쁘세요."

그녀는 곧 크리칼료프의 모습을 확인하고 놀란 표정을 지우고 덤덤하게 말했다. 푸른 여인이 힐긋 바라본 곳에는 어떤 노인이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얇은 장검을 숫돌을 이용해 날을 닦아내고 있었다.

"으음, 그런가."

크리칼료프는 근처에 있던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 있어라."

그리곤 어셔에게 권하지만 평소와는 거리가  그의 말투에 어색해져 그곳에 앉으면 살짝 인상을 찌푸린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치가 보여 쭈뼛거리고 있어도 정작 크리칼료프는 필요한 물건을 고르려는 건지 건물 안에 잡동사니처럼 늘어져있는 물건들을 살펴보러 가버렸다. 그렇게 어셔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때였다.

"잠깐 괜찮을까?"

푸른 여인이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와 옆에 있던 의자에 나란히 앉은 건.

"네, 네?! 무슨 일로?"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그냥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니까."

어셔가 바짝 긴장하며 묻자 그녀는 어쩐지 더욱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그를 진정시키려는 것 같아서 어셔는 의아했지만 확실히 대화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실례지만 저 분과는 어떤 관계니?"
"크리칼료프 아저씨요?"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어셔는 그녀의 말에 무어라 대답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조금 애매하긴 했지만.

"스승님이에요."

그는 크리칼료프의 제자가 되기로 했으니까. 그녀는 어셔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혹시 검을 가르쳐 주겠다면서 이상한  요구하지는 않았어? 때린다던가."
"네? 이상한 일이요? 때려요?"

어셔가 어리둥절해서 되묻자 그녀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모른다면 됐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말은 해둘 테니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근처의 성당에 보호를 부탁하렴."

그리곤 곧 노인이 손질을 끝냈다는 말에 그에게서 검을 받아들고 떠나가는 여인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시상에 억울해서 못 살 긋네."

크리칼료프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대장간을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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