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한걸음.
"으으으."
어셔가 깨어나자마자 느낀 건 머리를 깨부술 듯 찔러오는 격렬한 두통이었다. 때문에 눈도 뜨지 못하고 이마만 짚고 있으니 그의 얼굴에 철퍽 부딪히며 감싸는 무언가가 있었다.
"윽, 이건."
손을 들어 만져보니 물에 적신 뒤에 짜내지도 않은 건지 차가운 것만으로 모자라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수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두통을 가라앉히는 것 같아 가만히 있으니 크리칼료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일어나라. 계속 그 안에 있으면 그대로 타버린다?"
"조금만 더... 잠깐, 뭐라고요?"
조금만 더 자게 해달라 하려 했지만 그의 말을 이해하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물에 젖은 수건이 앞으로 떨어져 옷을 적셨지만 그보다 눈에 들어온 건 그가 잠들어있던 곳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파르즈의 모래처럼 하얀 흙벽과 그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간단하게 만들어진 나무 지지대들이 받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고 있으니 위에서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드디어 일어났구만 안 일어났으면 불을 피워야 했는데."
고개를 들면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쭈그려 앉아 어셔를 내려다보는 크리칼료프가 보였다.
"저를 이대로 태우실 생각이었어요?!"
그제야 어셔는 이곳이 자신보다 큰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네모나게 파여진 구덩이라는 걸 깨닫고 소리쳤다. 산 채로 화장당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새파랗게 질리자 그가 큭큭 웃는다.
"내가 성배의 물을 마실 때 뭐라고 했었냐?"
"...아무리 죽을 수도 있다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각오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묫자리를 미리 만들어두는 것은 좀 아니지 않은가? 괜히 소름이 돋아 하얀 흙벽이 꺼림칙했다. 마치 돌처럼 굳어있는 것 같으면서도 축축한 물기와 만지면 우수수 부서지는 것이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여기가 네 자리가 아니면 됐지. 일어났으면 빠릿빠릿하게 올라와."
그의 재촉에 자신의 키보다 높은 구덩이에서 어떻게 빠져나가느냐 묻고 싶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크리칼료프가 있는 쪽에 사다리가 있었으니까. 그대로 타고 올라가니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제레미아의 움집을 발견했다. 분명히 이 근처에는 아무런 구덩이도 없었는데 자신이 잠든 사이 이런 구덩이를 파낸 것을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녀는 만났냐?"
"그녀라니... 윽!"
그가 다시 머리를 찌르는 두통에 이마를 짚자 크리칼료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셔가 들고 올라온 수건을 내밀었다.
"당분간 계속 그럴 테니 이마에 대고 있어."
"으으, 원래 이런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 어쩔 수 없지."
어셔는 젖은 수건으로 아픈 머리를 진정시키며 가장 중요한 사실을 생각해냈다.
"이제 저도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예요?"
목숨을 걸고서라도 성배의 물을 마셔야만 했던 이유가. 그러나 크리칼료프에게서 돌아온 건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그건 좀 두고 봐야 할 거다."
"뭐예요. 그게."
"성기사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마법사의 것처럼 편리한 게 아니라서 말이다."
어셔가 허탈해 하건 말건 크리칼료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마법사가 정식으로 권한을 허락받은 거라면 성기사들의 마법은 고작 편법에 불과하다. 그만큼 사용하기 까다롭고 사용할 수 있는 힘도 적다고."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요. 벨카를 구할 수 없으면 의미가 없단 말이에요."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벨카를 구하고 싶은데. 지금 당장 마법을 써야만 하는데.
"그러니까 사용할 수 있게 훈련을 해야지."
"훈련이라고요?"
어셔는 그 말을 듣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래, 훈련."
"그럼 벨카는 언제 구하고요!?"
그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성배의 물을 마신 건 모두 벨카를 구하기 위함이었는데. 지금 그녀를 구하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마법을 얻는다면 당장이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마법만 있다면 일이 쉬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마법조차도 훈련을 해야만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 하니 절망스러웠다. 그가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쳤는데도 소녀를 지키지 못했는데. 그래서 마법을 원한 것이었는데. 어셔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는 있다는걸.
그런데 만능이라 생각했던 마법조차 사용하는데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대체 얼마나 걸려야 벨카를 구하러 갈 수 있을 만큼 강해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사흘 뒤다. 그때 그 꼬마 아가씨를 구하러 가기로 했다."
그의 말을 들은 어셔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왜요! 왜 지금은 안 되는 건데요! 고작 사흘 동안 훈련해서 뭐가 달라지는데요?!"
도와주기로 했으면서. 구해주기로 했으면서. 대체 어째서 지금은 소녀를 구할 수 없단 말인가?
"얼씨구. 그러다 한 대 치겠다. 마."
크리칼료프는 버럭 소리치는 그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그는 정말 가볍게 때렸을 뿐인데 핑 도는 감각에 어셔는 휘청였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경계도 삼엄한 곳에 정면으로 쳐들어가서 나 죽여줍쇼라고 소리칠 생각이냐?"
"그건, 그렇지만."
마법이 있다면 모든 걸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성기사가 사용하는 힘이 마법사에 비하면 부족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어셔는 실망스러웠다. 겨우 벨카를 구하고 지킬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자, 그럼 슬슬 네가 어떤 마법을 그녀로부터 부여받았는지 찾아보자고."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그려."
"왜 하필이면 사흘 뒤에요?"
실망이 너무 커서 생각하지 못했지만 왜 하필이면 사흘 뒤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날 왕성이 사절을 받기로 했으니까. 경계는 더 삼엄해지겠지만 침투하는 것 자체는 오히려 쉬워질 테니 그때를 노리는 거다."
어셔는 그 말을 듣고 난 뒤에야 초조함에 부글부글 끓는 것 같던 머리를 진정시키고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행동을 했는지 깨달았다.
"죄송해요.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무작정 구하러 가고 싶다는 생각에 그를 도와주겠다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이는 어셔를 보던 크리칼료프는 정작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일단 반성할 거면 요것 좀 들고 반성혀."
"이건 포도 주스 아니에요?"
심지어 담고 있는 컵은 어셔가 마셨던 성배였다. 혹시 다시 한번 마시라는 뜻인가 싶어 크리칼료프를 쳐다보니 그의 말이 이어졌다.
"안에 있는 포도 주스를 움직인다고 생각해 봐라."
"이렇게요?"
대체 왜 움직이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움직인다는 생각으로 손으로 성배를 흔들어 포도 주스를 움직이니 크리칼료프가 고개를 저었다.
"몸은 움직이지 말고 생각만 해보라고 생각만."
어셔는 그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다 가만히 성배 안의 포도 주스를 바라보았다. 상상만으로 물을 움직인다는 건 한때 마법사를 꿈꾸며 가장 많이 떠올렸던 것이기도 했다. 란투아처럼 수도시설이 없던 시골에서 물을 뜨려면 항상 우물로 가야 했으니까. 자신은 가만히 있고 물만 집으로 움직여 오는 그런 것 말이다. 때문에 란투아의 수도시설을 신기해하던 자신을 메디아가 놀렸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는 부끄러운 마음에 버럭 소리치면 메디아가 놀라는 척 벨카를 데리고 도망치는 걸 쫓았었다.
이제는 그마저 그리운 기억이라 생각하며 성배에 담긴 포도주스를 노려보듯 했지만 역시나 흔들리지 않는 성배의 안에서 포도주스는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비출 뿐이었다.
"으음, 요건 아닌가 보구먼."
그것을 확인한 크리칼료프는 어셔에게서 다시 성배를 받아들고 포도주스를 홀짝였다. 정말 웬만해선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거 정말 그렇게 막 써도 되는 거예요?"
분명 성배는 그냥 마도구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지만 성지에서도 특별히 취급하는 귀물일 것이다. 그런 게 이런 사람의 손에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런 물건을 저렇게 막 취급하는 그를 보고 있으니 뭐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뭐 어때서 그려. 어차피 성기사를 만드는 것만 빼면 평범한 컵인데."
그러니까 그 힘이 성배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아니냐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 기능을 그보다 잘 알고 있을 그에게 뭐라 한다고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곤란하게 됐구만."
"뭐가요?"
"일단 가장 눈에 잘 띄는 마법을 찾는 방법으로 시도해봤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니 말이다."
"그럼 실패한 거예요?"
어쩐지 지금은 마법을 못 받았다고 해도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 그처럼 바보 같고 한심한 이에게 마법을 주는 것을 아까워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럴 리는 없다. 너는 어쨌거나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살아돌아왔다는 게 증거지."
하지만 돌아오는 건 오히려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어셔가 얼떨떨해질 만큼 단호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녀라는 건 대체 누구예요?"
"응? 너도 봤을 거 아니냐? 딱 네 또래의 여자애일 텐데."
어셔가 그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니 문득 스쳐 지나가는 기억 속에 새하얀 여자아이를 찾았다. 성배의 물을 마시고 나서 꾸었던 흐릿한 꿈속에서 여자아이를 만난 것 같은 기억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오히려 안개가 짙어지듯 떠오르지 않아서 어떻게 된 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뭔가 만났던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이 잘 안 나요."
"엉? 그려? 그건 좀 의외로구만."
대체 뭐가 의외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기억이 안 난다면 어쩔 수 없지. 우선 기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나."
"기본이라고요?"
크리칼료프는 어셔의 앞에 목검을 꽂았다. 어셔는 모래 바닥을 파고들어가 우뚝 선 목검의 손잡이를 본능처럼 쥐었다.
"마법사가 부릴 수 있는 마법은 다양하고 그 위력도 남다르지."
크리칼료프는 어셔와 같은 장검 형태의 목검을 들고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성기사가 아무리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그 힘은 진짜배기 마법사의 것에 비하면 한참은 약하다."
마법사가 다양한 마법을 마음껏 부릴 수 있다면 성기사는 자신에게 부여된 단 하나의 마법을 마법사보다 허용된 것이 적은 힘으로 최대한 활용할 수밖에 없는 거다. 어셔는 그의 말을 듣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사실 그는 마법사를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분명 도나르와 시프를 처음 만났던 곳에서 벨카를 탐내던 한 마법사가 있었다. 그의 최후는 어떠했나?
"...혹시 마법을 없앨 수 있는 마법도 있나요?"
벨카에게 마법을 봉인 당하고 도나르와 그의 일행에게 제압되어 버려졌던 이. 어셔는 딱히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자였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다. 혹시 자신도 상대의 마법을 봉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꼬마 아가씨에게 들은 이야기냐?"
"아니요. 그냥, 어쩌다 보니."
무엇보다 마녀가 마법사의 마법을 캔슬 할 수 있다는 건 꽤나 유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크리칼료프에게서 돌아오는 건 부정적인 말이다.
"기대했다면 미안하다만 그건 불가능할 거다."
"어째서요?"
"애초에 그건 마법 같아 보여도 메커니즘 자체가 다른 방식이라서 말이다."
그런 게 그렇게 쉽게 가능한 일이었다면 마법사가 압도적인 힘과 권력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이고 세 명의 마녀가 특별한 이유도 없었을거다.
"그러니까 성기사의 힘으로 마법사의 마법을 봉인하는 건 어림도 없다."
"...그런가요."
역시나 헛된 기대였다. 마법사라는 이들은 어셔에게 도저히 좋은 인상을 주지 않아서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을 막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는데.
"하지만 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주마."
"뭔데요?"
"성기사는 마법사의 마법을 캔슬 할 수는 없지만 직접적인 간섭을 받지는 않는다는 거다."
어셔는 그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그렇다는 건.
"그래, 최소한 마법사에게 맞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
이어서 그가 목검의 끝으로 어셔를 가리켰다.
"적어도 내가 아는 녀석들 중에 어쭙잖게 부릴 수 있게 된 마법만 믿고 나대는 녀석은 한 명도 없었어. 그러니까 성기사들이 기사라고 불리게 된 거다."
이제 검을 들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