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한걸음.
어셔는 손을 뻗어 조심스레 붉게 빛나는 꽃잎을 매만졌다. 그는 이 꽃을 알고 있었다. 이처럼 밝게 빛나지는 않았으나 숲에서 살 무렵 가을이면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마을의 어른들이 말하기로 상사화라 했던가. 아이들은 때때로 이 어여쁜 꽃을 꺾으며 놀곤 했었지만 어셔는 소녀를 닮은 이 꽃을 도저히 함부로 대할 수 없어서 그저 꽃잎이 짓무르지 않도록 어루만지다 놓아주었다. 이내 고개를 들어 저편을 보면 걷혔다고 생각했던 어둠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꽃만이 제 빛을 간직하고 있는 이상한 세상.
"여기는 대체."
[이곳에 대해 지나치게 알려고 하지는 말아 줘.]
다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없어도 있는 것처럼. 너희에겐 그 정도의 인식만 가지고 있어도 문제가 없는 곳이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찾아 고개를 돌렸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보는 거야? 여기에 있는걸.]
때문에 의아해하고 있으니 어셔는 자신의 발등을 콕 찍는 작은 무게감에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제야 그 목소리의 주인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제대로 보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너는?"
그의 턱에 겨우 닿을 정도로 하얀 그녀는 분명히 소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몸을 그리는 여린 선과 팔과 다리,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까지 모든 게 소녀라 주장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확신할 수 없는 이유는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얼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응, 좋아.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가르쳐줘.]
그녀의 몸 전체가 마치 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면서도 흐릿하게 지지직거리는 탓에 간신히 또래의 소녀라는 것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냥 하얗게 보이는데."
[...그렇구나.]
소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입술 부근을 톡톡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이럴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쉬운걸.]
대체 뭐가 아쉬운 건지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돌아서는 것이 먼저였다.
[네가 원하는 곳으로 안내해 줄게.]
그리곤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하는 새하얀 소녀의 뒤를 홀린 듯이 따라 걸었다. 끊임없이 펼쳐진 붉은 꽃들이 어디선가 불어온 산들바람에 살랑이며 스치고 그들은 그 중심을 가로질렀다. 정처 없이 걸어가는 동안 붉은 꽃들은 타오르기라도 하듯 반딧불 같은 빛무리를 피어 올리고 있었다. 그때 앞서 걸어가던 소녀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래서는 안되겠지. 너의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
이윽고 걸음을 멈춘 소녀가 그를 뒤돌아 보았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왜 이렇게 쓸쓸해 보이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였다.
"묻고 싶은 게 있다면 물어봐도 되잖아."
그도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그녀의 물음에 답해주고 싶어서.
[안돼. 1분 1초가 소중한 시간이야. 너희는 그 시간을 신중하게 여겨야만 해.]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냉엄하고 단호한 소녀의 대답이었다.
[그러니 나 또한 의무를 다 해야겠지.]
그와 동시에 새하얀 소녀의 뒤에서부터 펼쳐지듯 기나긴 책장들이 나타나 그들을 둘러싼다.
[이제 너의 의무를 떠올리렴. 너는 무엇을 위해 이곳으로 찾아왔어?]
어셔는 그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자신이 성배의 물을 마신 기억을 떠올렸다. 대체 왜 잊고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제야 잠에서 깬 기분이었다.
[이곳은 도서관, 본디 너희의 것이었어야 할 열매를 머금은 곳.]
사방을 에워싼 책장에는 수많은 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열매를 돌려주고 싶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럴 권한이 없으니 너에게 쥐여줄 수 있는 것 또한 찰나뿐.]
그의 눈앞으로 책장에서 쏟아져 나온 종이들이 스쳐 지나가며 시야를 가렸다. 무슨 글자나 모양이 그려진 것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조차 일순간이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의 염원을 말해줘]
새하얗게 물들어가는 세상 속에서 고아하지만 가련하고 엄숙하지만 다정한 목소리, 마치 그가 아는 소녀를 떠오르게 만들지만 조금은 다른 목소리에 그는 무어라 말했던가?
[그게 너의 염원이구나. 하지만 그런 말은 그녀에게 직접 전해주렴. 분명 기뻐할 거야.]
떠올릴 새도 없이 흐릿하게 흩어져 내렸다.
[이것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떠올려줘. 이건 너의 마음을 모방했을 뿐. 결국 진정한 힘이 될 수는 없다는 걸.]
타닥타닥, 등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주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파르즈의 거리는 수많은 등불과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뒤섞여 밤이 찾아왔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밝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거슬리는군."
구름 지대를 곁에 두지 않고 땅에서 솟아나는 수원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나라는 때때로 찾아오는 이방인들로 가득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나라 간의 거리도 멀고 제대로 된 길조차 드문 황야를 사이에 둔 수많은 나라들은 먼 나라와 교류하기 위해서 구름 지대를 빙 둘러 가는 것보다 파르즈를 경유해 교류하는 것을 선호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뭔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그는 자신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묻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는 시타의 남편 마틴이 있었다.
"그냥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서 말입니다."
"아마 성지의 사절 때문일 겁니다. 최근에는 찾아온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안팎으로 바쁜 모양입니다."
"성지?"
주드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그 녀석들이 사절을 보냈나."
그야 성지는 여러모로 마법사인 그에게 성가신 존재였으니까. 아니, 단순히 성가시기만 했다면 다행일까? 서로 연관되어서 좋을 일이 없었다. 그 유적 아래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존재는 특히. 마왕이라는 우스운 이름 아래에 얼마나 끔찍한 것이 숨어있는지 알기에 그 어떤 마법사도 성지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 크리칼료프라는 놈과 연관이 있는 건가."
성기사들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들과 연관이 없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성기사의 몸으로 마법사와 대적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는가? 그것이 의문이었다. 고작 성기사가 허락받을 수 있는 힘으로는 마법의 직접적인 간섭을 피하는 것이 한계일 텐데. 어디서 그런 게 툭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시타의 방패를 단순히 두꺼운 식칼을 던지는 것만으로 우그러트린 그 힘은 마법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설마 그 녀석이?"
그러다 문득 떠오른 건 새로운 마왕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란투아에 있는 동안 성지의 지배자가 바뀌고 500년간 성지를 지켜온 마왕이 패퇴했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마왕이 성지의 지배자이자 수호자를 자처하며 그 뒤를 이어가야 하는데.
"그럴 리가 없나."
하지만 그는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부정했다. 연관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가정이 사실이라면 크리칼료프는 적어도 파르즈에 있어야 할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다 그는 자신의 아래에서 불만스러운 시선을 느꼈다.
"츄우웃, 손님 집중해 달라냥."
그 시선과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식탁의 아래에서 그의 자지를 빨고 있던 시타였다. 바로 앞에 그녀의 남편이 떡하니 있는데. 오감이 인간보다 예민한 캐트시의 앞에서 참으로 대담하다 못해 뻔뻔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 대해 신경 쓰는 기색은 없었다.
"혹시 제 아내가 실수했습니까?"
오히려 마틴은 제 아내가 대놓고 외간 남자의 좆을 쪽쪽 빨며 탐하고 있어도 오히려 그녀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 모습에 주드는 복잡한 생각은 미루기로 했다.
"아아, 아닙니다. 아내분의 혀놀림이 너무 좋아서 잠시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부럽군요. 제 아내는 저에게 그런 일은 영 해주질 않아서 말입니다."
오히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마냥 부러워하는 모습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으나 본인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야 주드는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내에게 밤 시중이라도 시켜서 극진히 모셔야 하는,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되는 귀빈이라는 설정이었고 또한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 여기게끔 해놓았으니까.
"하움, 츗. 정 아니면 손님과 교미할 때 손으로라도 쳐줄까냥?"
시타는 그런 마틴의 앞에서 주드의 자지를 날름날름 핥아대다 위로 올라오며 그를 놀리듯 손을 말아 쥐었다.
"되, 됐어! 손님분이나 잘 모시라고!"
마틴은 마치 아내의 어필을 부끄러워하는 남편처럼 얼굴을 붉히며 술을 들이켰다. 그 아내가 다른 남자의 좆 기둥에 보지를 비비고 있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오히려 타박하면서. 주드는 자신이 만든 광경임에도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너무 즐기는 거 아니야? 시타?"
"냐하앙, 날 이런 암컷으로 만든 건 주드가 아니냥."
물론 이미 그의 포로가 된 시타는 주드와 함께 마틴의 꼴을 즐기고 있었다.
"그럼 남편에게 저런 말도 들었는데 힘내지 않을 거냥?"
시타가 자신의 균열을 벌리고 좆을 조르는 모습에 주드는 곧바로 그의 물건을 집어넣어 채워주었다. 성지 놈들이 오건 말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벨카를 손에 넣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래서 저는 언제쯤 왕성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성지도 그렇고 여러 곳에서 손님들이 찾아오셨다 보니 일정을 정하는 것이 늦어지는 모양입니다."
"하, 그렇습니까?"
마틴을 통해 그들의 왕자를 데려다준 은인으로서 접근하려고 했는데도 그를 초대하는 것이 늦는 것을 보면 아직도 그 콧대는 여전히 높으신 모양이었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끝내고 그들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냐냥~ 그럼 내일 보자냥."
"그래."
물론 마틴은 혼자서, 시타는 당연하다는 듯 주드를 따라온 상태였다. 그들은 오늘도 한 침대에 누웠다. 그는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밤이 없는 것처럼 끊이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의 어린 시절은 아직도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립고도 그립지 않으며 추억이라기엔 추억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이 방울방울 터져 나오는 가운데 한순간이나마 행복을 꿈꾸었던 때가 있었다.
"...시타.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해?"
"츄웃, 냐항? 무슨 소리냥?"
그러나 돌아오는 건 여전히 그의 아래에서 그의 것을 빠는 여인의 천박한 되물음 뿐이다. 하기야 이제 와서 이런 것을 추억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