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6화 〉한걸음. (196/220)



〈 196화 〉한걸음.

크리칼료프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저도 알아요. 안다고요."

당장이라도 소녀를 위해 맞서려 하지 못하고 달려가지 못하는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지 누구보다  알고 있단 말이다. 그런 그에게 절걱절걱 어느덧 익숙해진 발소리가 다가왔다.

"네가 그러고 있는 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무서우면 도망치는 게 당연하지."

자신을 타박할  알았던 크리칼료프는 이내 어셔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 어쩌겠냐. 상대는  나라를 주무르는 왕족이고 너는 먼 땅에서 찾아온 별 볼 일 없는 꼬맹이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 말대로였다. 정말 그가 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어째서일까?  말을 들을수록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이 감정은?

"옛말에 그런 말도 있잖냐?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불쾌감처럼 역하고 뜨거운 나머지 잡아먹힐 것만 같아서.

"그러면 너는 지금의 너를 받아들일 수 있냐?"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그 감정은.

"싫어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소녀의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반질반질한 느낌이 남아있는 구두가. 지금도 그녀에게 선물했던 구두를 품에 안고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한심한 꼬맹이가 바로 그였다. 스스로가 역겨워서 미칠 것만 같은데 이런 자신을 이대로 받아들이란 말인가? 어느새 손은 주먹을 말아 쥐고 있었다. 이빨이 빠득빠득 갈렸다. 벨카가 그들에게 범해지는 것을 두고만 보란 말인가?

"죽어도 절대.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지?"

그래,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설령 불가능하다고 해도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저씨,  아저씨가 뭘 하던 사람인지는 몰라요."

크리칼료프라는 사내는 보면 볼수록 이상한 사내였다.  한결같이 낡은 천으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맨살은커녕 얼굴조차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가 싸맨 천은 맨몸에 붕대처럼 둘렀다기엔 비정상적으로 품이 큰데도 꼼꼼하게 몸을 가리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붕대를 감고 있어서  이질감을 더 크게 느낄  있었다. 게다가 그의 무기를 다루는 솜씨나 힘은 더욱 이상했다. 무기를 잘 다루는 것은 사냥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어셔는 그와 잠시나마 검을 대었을 때 알 수 있었다.

 사람은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무척이나 익숙하다는걸.

"그래도 도와준 건 정말 고마웠어요."

하지만 그런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셔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할 기회조차도 없었을 테니까. 그가 어디에서 왔건 무슨 일을 했던. 자신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염치없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뭔데 그려."
"칼  자루만 빌려주세요."

다른 건 없었다. 지금 그에게 남은 건 그동안 노력해왔던 의미가 있을지 모르는 검술 하나뿐이었고 크리칼료프에게는 검이 한 자루 정도는 있을 것 같았으니까.

"죽으러  생각이냐?"
"...구하러 갈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이대로 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꼬맹이가 될 뿐이다.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건 확실하게 무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몰래 숨어들어 벨카를 빼내올 것이다. 검은 단지 최후의 수단이었다.

"성의 구조도 모르는데 말이냐?"
"어쩔 수 없잖아요."

그에게 남은 방법은 이런 것밖에 없으니까.

"들키면 어쩌려고."
"죽어도 벨카만은 빼내고 싶어요."
"아니, 죽기만 하면 다행이것다. 어휴."

크리칼료프는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역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어셔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벨카만은 그곳에서 빼내고 싶었으니까. 그런 그에게 크리칼료프가 말했다.

"그럼 기왕 목숨 거는 김에 주변에 모여든 녀석들부터 어떻게 해봐라."
"주변이라니."
-키르르르륵!

그의 말에 의아해하고 있는 찰나 들려오는 소리에 어셔는 뒤늦게 알 수 있었다. 한  전, 그를 사냥하려 했던 것들이 지금 그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는걸. 그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는 변함없이 귀를 파고들었다. 사방의 수풀에서 사브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녀석들은 예전에 봤던."
"그렇게 예전도 아니지. 너 이 녀석들을 통째로 구운  잘만 들고 다녔잖냐."
"그게 무슨 소리..."

하지만 어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크리칼료프가 그의 발치에 검을 하나 던져준 것이다. 어셔가 쓰던 장검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길이가  검이었다.

"우선 살아남고 생각하라고."

그와 동시였다. 자신의  뒤에서 모래를 박차는 소리가 들려와 허겁지겁 허리를 숙여 뒹굴어 간신히 검을 잡아채면서 자리를 피했다.

-키륵!

원래 있던 곳을 확인하자 그때 보았던 것들과 같은 녀석이 하얀 깃털을 세우고 파충류의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키르르르르.
-키르르르.
-키르르르륵.

놈의 머리 주변의 날카로운 갈기 깃털들이 성가시다는 듯 떨리자.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인지 사방에서 그와 같은 소리가 주고받듯 울린다. 그리고 수풀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녀석들. 놈들은 다섯 마리로 어셔가 전에 쫓겼던 숫자보다는 적었지만 그럼에도 어셔에겐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그에겐 검이 있었다. 비록 익숙하지 못한 한 손 검이었지만 배운 것을 써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셔는 짧은 손잡이를 대신해서 검신 아래에 손을 올리고 검을 끌어안듯 쥐었다. 조금 어색한 감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검은 그가 쓰던 장검과 비교해도 될 정도로 꽤 긴 편이었으니까.

-키릭?
-키르륵

그래도 그런 사소한 차이는 어느 정도 무시할  있었다. 다만 놈들이 계속 주고받는 신호가 신경 쓰이던 차였다. 다시 뒤쪽에서 모래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어셔는 곧바로 몸을 돌리며 검신을 앞세웠다.

-키이이익!

그러자 입을 벌려 포효하며 뾰족한 갈기 깃털을 위협적으로 흔드는 것이 어셔의 행동이 상당히 성가신 것 같았다. 그리곤 천천히 뒷걸음질 치는 모습에 그들이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눈치챘다. 그러기 무섭게 주변에서도 키익! 하고 위협하는 놈들의 소리들이 들려온다. 어셔는 놈들이 또 달려들 것이라는 생각에 긴장하며 신경을 곤두세우니 오른쪽과 뒤에서 모래가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셔는 바로 검을 반대로 돌려 쥐며 자신의 오른쪽 뒤에서 왼쪽 대각선 방향으로 찔러 넣었다.

-키이익!

검에 무언가 닿아 무게감이 실리는 것이 손에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놈들 중 하나의 비명이 들리고 어셔는 그대로 베어내는 것처럼 오른쪽에서 주춤하던 녀석을 위협하듯 검을 휘두르자 오른쪽의 녀석도 깃털을 몇 개 떨어트리며 물러나는 것이 보인다. 보통은 머리를 가리면서 싸우는 게 맞겠지만 놈들은 아무리 커봐야 그의 허리춤에 닿는 정도였고 그렇다면 검을 살짝 내린 상태에서 싸우는 것이 나을 것 같았는데. 다행히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던  같았다.

-키리리릭!

몸을 슬쩍 돌리며 뒤쪽에 있었던 녀석을 확인해보니 상처가 그리 크지 않았다. 보지도 않고 놈이 자신의 몸을 공격하는 경로를 막는 느낌으로 검을 가져다 둔 것이나 다름없다 보니 놈의 목 근처에 사선으로 상처가 벌어진 수준이었다. 그래도 피가 흐르는 꼴을 보면 마냥 가벼운 상처도 아닌 것 같았다.  더 깊었다면 치명상을  수도 있었을 텐데 놈들의 비늘과 그 겉면을 감싸는 하얀 깃털이 생각 이상으로 검을 방해했다.

놈들은 계속 쉭쉭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그를 노렸지만 어셔는 검을 이용해 최대한 자신을 노려오는 녀석들을 쳐내었다. 자신이 상처 입는 것은 최대한 막아야만 한다는 게 도나르가 가르쳐준 것이었으니까. 놈들은 몸을 무기로  수밖에 없지만 어셔가 들고 있는 검은 하나의 무기고 방패였다. 놈들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검으로 놈들의 움직임을 막으면서도 꾸준히 상처를 주며 얼마나 대치하고 있었을까?

-키이이익!

놈들 중 하나가 소리치자 놈들은 주춤주춤 그에게서 물러나더니 곧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어셔가 겨우 긴장을 풀고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면서 자리에 주저앉으니 때마침 크리칼료프가 다가왔다.

"하아하아, 아저씨가 쫓아낸 거예요?"

생각해 보면 놈들은 마치 그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어셔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가 무언가 수를 쓴 게 아닌가 싶었지만 크리칼료프는 고개를 저었다.

"난 아무것도  했다. 그냥 네가 만만해 보여서 사냥하려고 했는데. 쉽게 잡히지도 않고 자기들만 상처가 나니까. 이득이 적다고 판단한 거지."

그의 말에 어셔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생각하기에 마치 그를 끝까지 물어뜯을 것 같았는데 그게 전부 착각이었단 말인가? 무엇보다 의아한 건.

"...몬스터가 아니었어요?"

그건 몬스터의 행동방식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상한 생김새와 위협적인 모습 때문에 분명 몬스터라 생각하고 필사를 각오했던 것인데.

"생긴 게 좀 야비하게 생겼어도 엄연한 야생동물이여. 착각하는 게 무리가 아니긴 한데."

그는 땅에서 돌멩이를 하나 주워들더니 그대로 놈들이 도망친 수풀을 향해 던졌다. 쌔액하고 섬뜩한 기세로 날아간 돌멩이가 수풀 속으로 파고들더니 무언가  하고 맞는 소리와 함께 수풀이 푸드득 떨린다. 황급히 도망치는 것처럼 사라지는 소리들에 어셔가 보고만 있으니 크리칼료프는 수풀에 손을 집어넣어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목이 꺾인 녀석 하나를 불쑥 꺼내들었다.

"구사크랍토르. 파르즈에선 골칫거리인 녀석들이지. 지금도 도망치는 척하면서 기회를 보고 있었고."

놈들 하나하나가 교활하고 가학적인 사냥꾼이라 숙련된 사냥꾼이 아니면 오히려 도망치기 바쁘다고 한다. 개체 수도 많아서 파르즈에선 항상 골치거리지만 맛은 또 기가 막히게 좋아서 비싼 식재료로 유명하다고.

"구사크랍토르... 설마 구사크라는 게."

어셔가 멍하니 그가 목을 쥐어 들고 있는 녀석을 보았다. 익숙한 단어 때문에 설마설마했지만.

"네 생각이 맞다. 이 녀석들이 여태까지 니가 서빙해 온 것들 중 하나지."

차라리 그것만이라면 다행이었을 텐데 그는 그들과 같이  구사크를 먹어본 기억이 있었다. 분명 맛은 있었지만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충격적이라 머리를 짚고 있으니 크리칼료프의 말이 들려왔다.

"그나저나 나쁘지 않구나."
"네? 나쁘지 않다고요?"

어셔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지금은 상대가 교활하고 약삭빠른 야생동물들이라 그렇지 단순한 징집병 정도라면 가볍게 상대할 수 있었을 거다."

자신은 그저 지금까지 배워왔던  토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는데.

"배운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정도치곤 쓸만해. 시간만 좀  있다면 훌륭한 기사가  수도 있었겠는데 아쉽구만."

어셔는 그 말을 듣고 주저앉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건 그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으니까. 그건 구원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절망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왜, 왜? 저는 왜!!!"

그렇다면 그는 왜? 벨카는 왜 괴로워해야 했단 말인가? 어셔는 그대로 무너져 주저앉고 말았다. 그 어느 때보다 지독한 절망이 그를 짓눌렀다. 눈물로 흐릿한 시야에 하얗게 빛나는 모래바닥이 일그러져 보였다. 이대로 쓰러져 파묻힐 것처럼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무너져 내린 그의 앞에 누군가 선 듯 일그러진 시야로 보이던 하얀 모래가 그늘에 가려졌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내리쬐는 햇볕을 가리고 선 크리칼료프였다.

"꼬마야. 뭐든 노력하는 것도 좋은데. 너를 돌봐주던 사람은 뭐라고 하더냐."

어셔는 그의 말에, 모습에 도나르를 떠올렸다. 메디아, 류드밀라, 시프 누나와 함께 언제나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도나르는 항상 무리하는 그에게 말했었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마라. 시프도 있고 나도 있잖냐."

언제나 앞만 보고 달려가던 그를 옆에서 지켜봐 주며 어색하게 말을 걸어오던 그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고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 까슬까슬한 모래가 이마에 쓸려 따갑지만 그런  아무래도 좋았다.

"제발 도와주세요! 벨카를 구하고 싶어요!"

그저 소녀를 구해주고 싶었다.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그의 한계였고 그의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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