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나아가야 하는 이유.
어셔의 말을 들은 크리칼료프는 가만히 있다 입을 열었다.
"나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잖냐. 그냥 사과하러 가라고."
그래, 당연한 것이었다. 그건 순전히 그의 잘못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럼 넌 이대로 이곳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꼬마 아가씨와 영영 헤어지고 싶냐?"
"그건 아니에요!"
"그럼 왜 이렇게 질질 끌고 있냐? 벌써 한 달 째여."
"...아니란 말이에요."
어셔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벨카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은 아직도 소녀를 지켜줄 힘이 없는데 오히려 상처만 주었던 그가 과연 다시 그녀를 만나러 가도 되는가? 잘난 것 하나 없는 그에게 그녀와 함께할 자격이 있는가? 자꾸만 떠오르는 의문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되도록이면 빨리 생각하라고 아니면 설마 꼬마 아가씨가 평생 기다려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런 건 아니었다. 그건 소녀에게 너무 가혹한 것일 테니까. 하지만 역시 벨카를 만나고 싶어서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까지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만 있었다.
"이 기회에 차분하게 생각해 보라고 지금 그게 무슨 꼴이냐."
다시금 침묵이 주변에 내려앉았다. 환하게 빛나는 밤, 나무의 그늘 아래로 칠흑에 잠긴 물 위를 은은하게 빛나는 부유석들이 떠다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을 헤집던 생각들이 고요한 밤처럼 가라앉았다. 오늘처럼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날 소녀와 함께 몸을 씻었던 호수도 이랬다. 생각보다 발과 물의 거리는 가까워서 신발을 벗고 발을 담그면 그 모습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몸을 들이면 더럽힐 것처럼 혼탁해 보이는 검은 물은 사실 여느 때처럼 투명했으니까.
차가운 물의 감촉이 붕대에 스며들어 조금씩 다리를 타고 오르는 감각이 흐릿한 듯 또렷했다. 크리칼료프가 쪼르륵 아라크를 잔에 따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잔만 더 주세요."
"허참. 이거 비싼 술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셔가 들고 있던 잔에도 아라크를 따라주었다. 투명한 술이 밤의 기억처럼 달빛을 머금었다. 한 손에 전부 가려질 잔을 기울여 마시며 어셔는 입을 열었다.
"저는 사실 여행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원래 살던 곳에서는 그렇게 그곳을 떠나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여행을 떠나고 싶었면서 정작 도나르와 시프를 만나고 벨카와 함께 메디아와 류드밀라와 어울려 다니면서 란투아에 머물고 있으면 여행에 대한 생각이 사라져갔다. 그때는 그것이 참 무서웠는데 이제 와서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고향은 왜 떠나고 싶었는데그려?"
그의 말에 어셔는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은 왜 마을의 진실을 알기 전에도 그곳을 떠나고 싶었을까? 문득 마을에서부터 챙겨왔으면서 정작 가방 한구석에 처박아두고 꺼낼 생각도 하지 않았던 반지들이 떠올랐다.
"부모님을 찾고 싶었어요. 저 고아였거든요."
마을에서 살다 보면 항상 듣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가 부모님이 마을에 버리고 간 고아라는 이야기. 그에 어셔는 항상 고아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건 한때 그를 돌봐주셨던 촌장 할아버지가 언젠가 부모님이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뻔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거짓말을 믿고 아무리 기다려도 찾아오지 않는 부모님을 먼저 찾겠다는 마음으로 여행을 꿈꿨다. 그들이 나를 잊어버렸다면 자신이 찾아가자는 그런 생각이었는데.
"그러다 벨카를 만났어요."
처음 소녀와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커다란 느티나무의 뒤에 숨어 놀란 금빛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던 자그마한 소녀.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부드러워 보였고 하얀 피부는 눈에 새겨질 것처럼 눈부셨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서 멍하니 있다 저도 모르게 다가갔지만 소녀는 그대로 숨어버렸다. 그녀를 찾아보고자 했지만 그날 하루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아서 다음 날에야 같은 장소에서 소녀를 찾을 수 있었다. 어셔는 그녀가 어제처럼 도망쳐버릴까 천천히 다가갔지만 그날도 소녀는 도망쳐버렸다.
포기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를 빤히 바라보던 금빛이 자꾸만 떠올라서 매일 같이 느티나무를 찾아갔다. 다행히 소녀는 그 나무 아래에 있었고 어셔는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그녀와 눈을 마주 보았다. 화사한 금잔화 속에 햇빛을 머금은 듯한 금빛은 그저 지켜만 보아도 질리지가 않아서 그렇게 있으면 해는 금방 저물어버렸다. 매일매일 그는 소녀를 만나기 위해 느티나무를 찾아갔다. 늘 그러고 있어도 시간이 더 느리게 갔으면 할 정도로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으니까.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느티나무를 두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는 그런 평소와도 같았던 날이었는데. 소녀가 결심한 것처럼 작게 주먹의 쥐고선 천천히 나무의 뒤에서 몸을 드러낸 건. 진한 검은색에 약간의 붉은 기가 감도는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왔고 그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그저 그 모든 순간이 황홀했다. 대화는 없었지만 그게 그와 소녀의 제대로 된 첫 만남이었다.
"그렇게 계속 지내다 보니까. 언젠가 부모님을 만나면 자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들이 잊고 있었던 내가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녀와 함께 살아갈 것이라고 말이다. 그만큼 소녀와 함께하는 생활은 언제나 즐거웠다.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벨카와 함께 하는 그 모든 순간이 그의 행복이었다.
"그냥 벨카랑 같이 있으면 그걸로 좋았아요."
하지만 아이들의 비밀 장소는 언젠가 어른들에게 헤집어져 들통나기 마련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비밀 장소도 들킬까 봐. 그렇게 되면 그곳에서 숨어지내는 소녀까지 들켜서 마리 누나처럼 되어버릴까 봐. 더 안전한 곳에서 같이 살아가자고 생각했다.
"뭐냐, 결국 그 꼬마 아가씨 때문이었잖냐."
어셔는 심장을 쿡 찌르는 것만 같은 느낌에 가슴께를 붙잡았다. 대체 왜? 대체 왜 이제서야.
"술... 한 잔 더 주실래요?"
울컥 터져 나올 듯한 눈물을 그렇게라도 막고 싶었다. 그에겐 소녀가 전부였는데 그것도 모른 채 내쳐버린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빈속에 술만 마셔서 쓰냐. 마침 안줏거리도 생긴 거 같으니까. 기다려봐라."
그는 어셔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는 대신 낚싯대를 휙 잡아챘다. 낚싯대가 휙 구부러지며 그와 동시에 부유석이 허공에 튀어 오르자 그 아래로 촤악 하는 물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건 긴 원통형의 몸에 다리처럼 생긴 지느러미가 달린 갈색 비늘을 가진 커다란 물고기, 드바야카였다.
"휘익! 대물이구만! 바로 해먹자고."
"여기서요?"
변변찮은 도구도 없는데 어떻게 해먹을 생각이었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는 어디선가 칼을 꺼내들었다.
"여기가 포인트라 물건을 좀 숨겨뒀었거든."
그러면서 그는 거울처럼 하늘을 비출 정도로 평평한 돌 위에 드바야카를 놓았다. 그리곤 그대로 칼로 목을 내려쳤다. 퍽! 하는 소리에 어셔가 인상을 찌푸리건 말건 그는 내장까지 깔끔하게 빼내곤 세로로 두 동강 내더니 껍질을 벗기고 얇게 저민다.
"자, 이제 먹자고."
크리칼료프는 그제야 그의 잔에 아라크를 따라주며 근처에서 꺾어온 나뭇가지 두 개를 내밀어서 어셔는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크! 이 맛이지."
그가 얇게 저며낸 드바야카를 나뭇가지와 함께 따온 맹그로브 잎에 살짝 대었다 먹는 모습을 보고만 있으니 크리칼료프가 묻는다.
"엉? 왜 그려?"
"이거 이렇게 생으로 먹어도 되는 거예요?"
순식간에 살점만 남은 드바야카를 보면 익숙한 것 같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날것을 그대로 먹는다는 건 이상한 느낌이었다.
"좋은 물고기를 잡았을 때는 딱 세 가지다. 튀긴다! 끓인다! 썬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크리칼료프는 계속 말을 잇는다.
"사실은 드바야카는 끓여먹는 게 좋고 튀기거나 회로 만드는 건 테브라니가 좋은데 내가 요리를 못한단 말이여. 그냥 먹어라. 안주가 없는 것보다 낫잖냐."
그가 나뭇가지로 드바야카의 살점을 계속 집어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어셔도 배가 고파졌다. 나뭇가지들로 드바야카의 살점을 집어 들고 크리칼료프가 그랬던 것처럼 맹그로브 잎에 대었다 먹으니 살짝 짭조름하면서도 풀잎의 향을 머금은 부드러운 살점이 입에 닿았다. 날것이라 걱정했던 것과 달리 무척이나 맛있었다.
"어때, 괜찮지 않냐?"
"맛있네요."
"그럼 또 마시라고."
그가 작은 잔을 내미는 모습에 어셔는 손님들이 함께 잔을 부딪히던 것을 떠올리고 그도 잔을 부딪히고 그대로 들이켰다. 아라크는 여전히 이상한 맛이라 좋아할 수는 없어도 싫지는 않은 맛이었다. 그렇게 그와 함께 아라크를 마시며 낚시를 하다 보면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벌써 아침이네요."
"낚시를 하다 보면 시간은 빨리 가."
아라크와 드바야카는 이미 거덜 나 있었고 물에 담가놓은 통발의 안에는 물 위에서 보아도 물고기가 모여있는 것이 보일 정도로 많았다. 어셔는 크리칼료프와 함께 저 너머에서 고개를 내미는 태양을 지켜보며 말했다.
"다음에도 같이 낚시하러 와도 될까요?"
"계속 이곳에서 지낼 거라면 상관없겠지."
그는 들고 왔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가보자고."
"통발은요?"
하지만 깜빡하기라도 했는지 물고기들을 가둬놓은 통발을 챙기지 않는 그에게 물으니 크리칼료프는 고개를 젓는다.
"거기 놔둬도 꽤 오랫동안 살아있어. 그리고 지금 우리는 따로 갈 곳도 있잖냐."
"갈 곳이라니."
그들은 그냥 낚시를 하러 왔던 게 아니었는가? 어셔가 의아해하니 문득 밤 사이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설마."
"어차피 오늘 휴가 아니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만나러 가야지. 그 꼬마 아가씨."
그는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어셔는 그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황급히 따랐다.
"벨카가 있는 곳을 알고 있어요?"
"아니까 데려다주겠다는 거 아니냐."
"하지만 어떻게."
"그냥 오며 가며 만났지. 네 걱정을 어찌나 하던지."
어셔는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아직까지 그를 기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안심되면서도 미안했다. 그가 한심해서, 못나서, 약해서, 상처를 주었음에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벨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녀가 그를 다시 받아줄지는 모르겠지만 사과하자고 생각하면서 크리칼료프를 따라 걷고 있었을 때였다. 그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것은. 꽤 오랫동안 걸은 상태여서 소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뭐여 이건."
들려오는 건 크리칼료프의 당황한 목소리였다. 그의 말을 듣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어셔는 그의 뒤에서 나와 앞을 보면. 작은 집 하나가 문이 휑하니 열려 있는 상태로 집 안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크리칼료프가 집으로 들어가 안을 살피는 것에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엉망이 된 집 안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저곳에 깨진 유리 파편들과 헤집어진 물건들과 옷이 바닥을 나뒹굴고 곳곳에 커다란 발자국과 흙먼지가 묻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셔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 가운데 그에게 익숙한 물건을 발견하고 주워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그건 어셔가 소녀에게 선물했던 작은 구두 한 짝이었다. 숨이 턱 막혀오는 것 같았다. 차라리 소녀가 버리고 간 것이라 믿고 싶은데. 어디를 보아도 구두의 다른 한 짝은 보이지 않는다.
"나도 몰라. 그제 보러 왔을 때만 해도 멀쩡하게 치료 약을 팔고 있었다고."
크리칼료프는 크리칼료프대로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주드가 찾아왔던 것이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소녀에게는 고통스러울지라도 마법을 없애는 힘이 있었고 헬레나는 힘 싸움에서 지더라도 잠시나마 저항하며 소란을 피워 주변 사람들을 불러올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봐도 이건 개인의 소행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마법으로 여럿을 조종하면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은 제한되어 있기에 불가능했고 효율도 나빴기에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이제야 온 건가? 참 빠르기도 하군."
어셔에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