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나아가야 하는 이유.
"드바야카 구이 추가!"
"아라크 세 병!"
"여기 바클라잔 파이 하나!"
여관의 일은 어셔의 생각보다 더 고되고 바빴다. 파르즈의 음식들은 처음 보는 것투성이라 이름을 외우기도 힘들었지만 손님들은 매일 같이 이곳저곳에서 주문을 외쳐댔고 어셔는 그들의 주문을 받아 적고 주방으로 보내고 음식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었다. 일을 하다 보면 몸을 찌르는 아픔도 잊힐 정도였다.
"응? 이거 내가 주문한 게 아닌데?"
"윽, 죄송합니다."
그래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아무리 집중해도 가끔 벌어지는 실수는 어쩔 수가 없었지만.
"하하하! 됐어! 바쁘면 실수할 수도 있지!"
어째선지 관대하게 용서하는 사람들이 어셔는 낯설었다. 분명 좋은 일일 텐데 찝찝하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인지 모를 일이다.
"야, 그 소식 들었어? 성지에서 사절이 왔다던데?"
"뭐야. 하피들을 쫓아낸 뒤로 대외 활동은 안 하는 거 아니었어?"
"몰라. 이제 좀 내부 정리가 됐나 보지."
손님들은 대부분 일행끼리 잡답을 하느라 바빠서 그 외에는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점심보다 저녁, 가끔 오는 이상한 손님들이었다.
"시간 나면 같이 한잔하자고."
술에 잔뜩 취한 사람이 주정을 부리며 그의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뿌리치느라 일이 늦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돈이 필요하지 않냐며 꼬드기기도 했지만 그런 수상한 사람들과는 아예 말을 섞지도 않았다.
"흐흥, 우리 아가씨 인기 많네?"
때문에 가끔 그를 놀리는 나우시카가 얄미웠지만 어쨌든 그녀가 그를 고용해 주었기에 어셔는 입을 다물고 일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어떻게든 여관의 일에 적응해 나가다 보니 어느새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때마저 지나가 손님들이 떠나가면 겨우 마련된 여유 시간에 어셔는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아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신발을 벗었다. 하루 종일 혹사당한 발이 공기를 만나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래를 보면 그의 다리를 가리는 연녹색의 유니폼 치마가 보였다.
"돈이 모이면 빨리 유니폼부터 새로 사던가 해야지."
일이 바빠서 깜빡하고 있었지만 이럴 때마다 찾아오는 자괴감이 너무 크다. 그나마 치마 아래로 들어오는 공기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어도 덥다는 느낌은 덜 들었지만 그래도 이건 뭔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치마를 걷으려 하면.
"뭐, 뭐 하는 짓이야!?"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어셔의 손을 잡아챘다. 그의 손을 잡아챈 건 얼굴을 붉게 물들인 나우시카였다.
"왜?"
"왜냐니? 너무 조심성이 없잖아!"
어셔가 손목을 죄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그녀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나우시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다리의 상태를 보려는 것뿐인데 왜 조심성 같은 게 필요하단 말인가? 어셔가 시큰둥하게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나우시카는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아차 하는 표정을 짓다가도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안 되니까! 할 거면 방에서 해!"
"그럼 손부터 좀 놔."
겨우 참았지만 그녀의 힘이 강한 건지 아니면 그가 약한 건지 나우시카가 잡은 손목이 꺾일 것처럼 아팠다.
"앗, 미안!"
그러자 황급히 손을 놓는 그녀의 모습에 어셔는 한숨을 삼켰다.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보는 나우시카에 먼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모질게 굴 것이라면 끝까지 모질게 굴면 될 것을. 그는 그녀를 뒤로하고 자신이 머무는 방으로 돌아가 누워 나우시카가 잡았던 손을 감싸고 있는 붕대를 풀어보자 자잘한 흉터들과 함께 퍼렇게 멍든 자국이 드러났다. 그녀가 좀 세게 잡았다고 통증을 호소하는 자신의 손목에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분노를 삼켰다.
겨우 식당 일에 익숙해졌는데. 그의 몸은 아직도 이전만도 못했다. 그 손으로 눈을 가리고 비어져 나오는 눈물을 틀어막고 있었을 때였다.
"자냐?"
똑똑,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크리칼료프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하지만 어셔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대로 침대에 몸을 눕힌 채 잠들듯 사라지고 싶었다.
"흠, 진짜 자는 겨?"
그는 그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가려는 것 같았다.
-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대체 무엇으로 문을 두드리면 문이 갈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나는지 경악하면서 시끄러운 소리가 방안을 울리니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벗어나 문을 열었다.
"역시 일어나 있었구만."
"으으, 무슨 일인데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자는 척까지 하던 그를 깨웠는지 의문이 들어 물으면 그는 자신이 든 것을 척 내보였다. 그는 한 손에는 작은 구멍이 송송 뚫린 나무 통발과 실을 매단 나무대 두 개를 들고 있었다.
"별 건 아니고 낚시하러 가자고."
"내일이요?"
"아니, 지금, 당장, 바로."
"이 밤에?"
대체 어떤 사람이 자려는 사람을 깨우고선 낚시를 가자고 한단 말인가?
"원래 밤에 낚시가 더 잘 돼. 어차피 내일은 너도 쉬는 날 아니냐."
"...저 피곤한데요."
사실 그렇게까지 피곤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체력이 조금씩 늘기는 늘어서 이젠 눕자마자 곯아떨어질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어셔에게 크리칼료프가 물었다.
"여기 사장 누구야?"
"나우시카 누나요."
"이 여관 만들어준 사람은?"
"...아저씨죠."
그건 가끔가다 나우시카와 그가 주고받는 말을 주워듣다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어셔는 조용히 풀었던 붕대를 손에 다시 감았다.
"나와."
"네."
그와 함께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가면 때마침 가게 정리를 끝낸 나우시카와 마주쳤다.
"낚시하러 가게?"
"그래, 너도 같이 갈 겨?"
평소에도 있는 일인지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오늘은 됐어. 잘 다녀와."
그렇게 방으로 올라가려던 나우시카는 어셔를 보더니 팔짱을 꼈다.
"설마 그 상태로 가려던 건 아니겠지?"
"아."
어셔는 자신이 아직도 유니폼 차림이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지금 내 옷이 없는데."
그에겐 따로 입을 옷이 없어서 붕대만 감은 채 자거나 유니폼도 디자인만 같은 것을 번갈아 입고 있던 상태였으니까. 어셔는 마침 잘 됐다 싶은 마음으로 말했다.
"그럼 낚시는 됐으니까. 이만 자러."
"여벌이 더 있으니까 상관없겠지! 혹시 더러워지거나 찢어지면 네 월급에서 뺄 거야?"
"...."
행패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신세 진 것이 많으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셔는 크리칼료프와 함께 여관을 나섰다.
"드바야카도 좋지만 테브라니도 많이 잡아와!"
"그럼 테브라니가 비싼 이유가 없잖냐."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말이!"
한밤중의 파르즈는 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밝았다. 파르즈의 땅은 모래 하나, 바위 하나, 건물들까지 전부 하얘서 달빛과 별빛을 받으니 오히려 낮만큼이나 밝은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모습으로 밖까지 나돌아다닌 일이 없었기 때문일까? 치마 밑으로 숭숭 들어오는 바람이 새삼 낯설어 수치스러웠지만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도착했구만."
"여기는..."
크리칼료프가 그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어셔가 이곳에서 처음 깨어났던 곳이었다. 그의 복잡한 마음도 모르고 크리칼료프는 함께 가져온 간이 의자들을 설치하며 앉았다.
"뭐 혀? 냉큼 앉아."
크리칼료프의 재촉에 마지못해 빈자리에 앉으니 그는 들고 온 낚싯대를 어셔에게 쥐여주었다.
"미끼는 끼울 줄 아냐?"
"미끼요?"
"그러니까 물고기 잡을 때 쓰는 거 말이다."
"미끼가 뭔데요?"
"직접 봐."
어셔는 그가 내미는 작은 통을 보자마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미끼라고요?!"
"조용히 해. 물고기 다 달아난다."
어셔는 그의 타박에 입을 손으로 막으면서도 인상을 찌푸렸다. 그야 그가 내민 나무 통에는 몸 표면이 꺼슬꺼슬해 보이는 지렁이들이 꾸물거리며 서로 뒤얽혀 있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끼우는데요?"
"어떻게 끼우긴 봐라."
그는 어셔에게 보란 듯이 낚싯대에 달린 실의 끝에 달린 바늘을 끌어왔다. 그리고 그 바늘에 그대로 지렁이의 입에 끼워 넣으니 지렁이의 몸이 바늘 모양으로 휘어지다 결국 옆구리로 바늘이 튀어나왔다. 그 광경에 어셔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그는 그대로 물을 향해 던졌다. 바늘의 약간 위에는 동그란 모양의 빛나는 돌이 있었는데 그 돌은 물에 조금도 빠지지 않고 허공에 둥둥 떠있었다. 그 모습에 어셔는 그것이 보통 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저거 부유석이에요?"
"그래, 이렇게 해놓고 부유석이 좀 튕긴다 싶으면 낚싯대를 당겨서 물고기를 낚아."
부유석처럼 비싼 물건을 겨우 낚시에 써도 되나 싶었지만 파르즈니까 다를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미끼는 끼울 수 있겠냐?"
어셔는 크리칼료프의 말을 듣고 다시 그가 든 통을 보았지만 바글거리는 것들을 보고 있으니 괜히 소름만 돋았다.
"만지지도 못하겠는데요."
"그려? 그럼 잡고만 있어."
그는 물에 던져둔 낚싯대를 어셔에게 건네주며 제 낚싯대에 미끼를 끼운다. 얼떨결에 낚싯대를 받아든 어셔는 그가 제 낚싯대로 낚시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물이 조금씩 흘러가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고요한 수면 위를 은은하게 빛나는 두 개의 부유석들만이 둥둥 떠다닌다. 그들 중 누구 하나 물고기를 낚는 일 없이 침묵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럴 거면 뭣하러 자신을 데리고 왔는지 의문이었다. 슬슬 지루하다 못해 잠이 와서 하품을 하니 크리칼료프가 바구니를 뒤적거리며 도자기 병을 꺼내들었다.
"그거 술이에요?"
"그래, 아라크다."
나우시카에게 듣기로 아라크는 꽤나 비싼 술이었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파르즈를 비롯해서 여러 국가에 제조법이 널리 퍼져있다는데 가장 유명한 곳은 파시페니아라고 한다. 어셔가 다시 우울해져 고개를 숙이면 크리칼료프가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왜요?"
"너도 한 잔 마셔 볼테냐?"
고개를 드니 코앞에 그가 내민 잔이 보였다. 아라크라는 술은 어셔가 보기에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었다. 숲에서 실수로 마셔보았던 술같이 물처럼 투명하지만 코를 대보면 톡 쏘는 듯한 독한 냄새와 함께 올라오는 짙은 거부감이 똑같았다.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어셔는 오늘따라 그 냄새에 대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받아들고 있었다. 눈을 딱 감고 한 번에 들이키자 목을 차가운 기운이 타고 내려가는 듯하다 홧홧하게 타오른다.
"...어른들은 이런 걸 왜 마시는 거예요?"
마치 뜨거운 불을 삼킨 것만 같은 감각에 속이 쓰리고 매스꺼웠다. 옐처럼 과일 맛이 나면서 달지도 않고 코를 마비시키는 알싸한 향이 괴로울 정도라 대체 어른들이 돈을 주고 이런 것을 마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거 같다만."
"몰라요. 제가 어떻게 알아요. 이렇게 기분 나쁜 거."
머리가 빙빙 돌고 입은 저절로 열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의 일들이 제멋대로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머리를 헤집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역시 그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작은 잔에 따라 마셨을 뿐인데도 이렇게나 기분이 나쁜데 대체 뭐가 좋다고 실컷 마셔대는 걸까. 어셔가 제멋대로 지껄이려 하는 입을 어떻게든 막고 있으니 크리칼료프가 말했다.
"넌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거구만."
"그건 아니에요."
"아니면 뭔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그래야 힘도 세지고 덩치도 커져서 벨카를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
그래, 그래야 다른 녀석들이 소녀에게 상처 입히려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벨카가 울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돼요. 키는 아직도 작고 힘은 더 약해지고 또 벨카를 지키지 못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발악해도 녀석들은 아무렇지 않게 소녀를 범했다. 심지어 겨우 노력해서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병에 걸려선 지켜주기는커녕 벨카가 희생해서야 그는 목숨을 부지했다.
"그래놓곤 뻔뻔하게 벨카를 차버렸어요."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바보처럼 소녀가 자신 때문에 희생했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워서 무력한 자신이 싫어서 그녀를 버리고 도망쳐버렸다.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여전히 사랑스러워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그녀의 손을 내치고 말았다. 그 사실이 자꾸만 떠올라서 괴로웠다. 모두 놓고 도망쳐버리고 싶다는 마음에 놓치지 말았어야 할 소녀까지 놓아버리고 말았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어떻게 해야 소녀를 지킬 수 있었는가? 애초에 그는 소녀를 지켜주기는 했었는가? 그 의문과 후회들이 자꾸만 그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