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1화 〉나아가야 하는 이유. (191/220)



〈 191화 〉나아가야 하는 이유.

나우시카의 여관은 파르즈에서 나름 유명한 편이었다. 특히 그녀가 겸업하는 식당은 여관 손님이 없는 때에도 단골들로 붐빌 정도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굳이  가지를 꼽자면 고급 식재료라 할  있는 구사크로 만든 요리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즐길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우시카의 요리 솜씨도 일품이라 덕분에 근처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에겐 한 번이라도 안 들릴 수가 없는 곳이다. 그런 그녀의 식당은 한 화제로 떠들썩했다.

"오, 아가씨. 새로운 종업원이야?"

바로 좀처럼 종업원이 고용되는 일이 없었던 그녀의 식당에 새로운 종업원이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뭐 어때 여기 구사크 들어왔다며! 구사크 통구이 하나!"

손님들은 직접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주문하며 가까이 다가온 종업원을 슬쩍 관찰하거나 음식을 옮기는 그녀를 힐끔힐끔 구경했다. 노란빛에 가깝지만 빛을 받아 빛나는 금발은 어깨까지 간신히 내려왔고 밝은 갈색의 눈동자는 순해 보였지만 손님들의 주문을 받으면서도 인상을 찌푸린 상태로  한마디 하는 일 없이 일만 하는 모습은 앳된 얼굴임에도 차가운 인상이다. 때문인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면서도 사적인 일로 직접 말을 거는 경우는 없었다.

여성용 유니폼은 원래 종업원이 입던 것과 같았지만 가느다란 팔과 다리 전체를 감싸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아래까지 삐져나온 붕대 때문이었다. 걸을 때마다 붕대의 틈으로 살짝 엿보이는 피부와 그나마 가리지 않은 얼굴의 창백함은 누가 봐도 아프다는 걸 알 수 있게 만들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걷고 있었지만 발이 조금씩 비틀거리고 손은 작게 떨리고 있어서 불안해 보일 지경이다.

"야, 크리칼료프 또 어디서 저런 아가씨를 만났냐?"

오늘도 찾아온 단골들 중 낡은 천을 두른 장의사들도 그녀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테이블 하나에 자리 잡고 술과 안주를 앞에 두고 졸고 있던 크리칼료프에게 물었다.

"아가씨라니 뭔 소리여?"

정작 그는 알아듣지 못한 듯 그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러니까 새로 구한 저 종업원 아가씨 말이야!"

그들 중 하나가 몰래 손짓하며 그녀를 가리키자 크리칼료프는 그곳을 보고 그제야 눈치챈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는 무슨 남자애다."
"뭐?!"
"...농담이지?"

그래, 그들이 아가씨라 착각했던 종업원은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녀는 사실 그녀가 아닌 그였던 것이다.

"그럼 저 옷은 왜 입고 있는데?!"
"치마는 기사나 군인들도 가끔 입잖아."
"그건 전투용이니까 편의성 위주라 그런 거고! 저건 그냥 여성용 유니폼이잖아!"

그 이야기를 얼핏 듣게 된 어셔는 수치심에 죽을 것만 같았다.

"여기 2 번 테이블에 수프 갔다 줘."

그러거나 말거나 들려오는 나우시카의 목소리에 돌아보면 그녀는 주방에서 그를 지켜보며 웃고 있었다. 어셔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그녀가 만든 수프를 쟁반에 담아들었다.

"다쳤다고 봐주는 일 없으니까. 조심해서 가져가. 정 힘들면 대신 들어줘?"

나우시카의 목소리는 친절했지만 어셔는 알고 있었다. 이게 친절함을 가장한 짓궂은 놀림이라는걸.

"필요 없어."

어셔는 그녀에게 소리라도 치고 싶은 것을 최대한 소리를 죽여 받아치고 음식을 옮겼다. 잠깐 쉬는 시간은 있었지만 점심때부터 혹사당한 다리가 걸을 때마다 이곳저곳이 아프고 손이 저렸지만 그는 악을 쓰고 꿋꿋이 버텼다.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그녀의 놀림을 감당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가 왜 여성용 유니폼을 입고 일을 하고 있느냐 하면 나우시카에게 다시 유니폼을 받았을 때로 돌아가야 했다. 두 번째로 받았던 유니폼은 확실하게 남성용이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사이즈가 너무 커."

 유니폼이 어셔에겐 너무 커서 바지는 입을 수도 없었고 상의는 아무리 걸쳐 봐도 원래 덮고 있던 담요만도 못했다. 결국 그가 옷을 입는 것을 포기하고 그 사실을 말하니 나우시카가 푸흡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하긴 너처럼 작은 애는 일했던 적이 없으니까."
"윽."

어셔는 여전히 키와 관련된 문제에 약했다. 그동안 좀 자라긴 했지만 그럼에도 또래에 비해 작은 키는 그를 어려 보이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큰일이네 유니폼을 입어야 일을 시키든가 할 텐데."
"유니폼을  입어야 해?"
"당연하지!"

그게 정말 중요한가 싶었지만 저렇게 단호하게 말하니 뭐라 하기가 힘들었다.

"정 안 되면 따로 주문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건  때문에 맞춰야 하는 거니까. 값도 네가 내야 한다고?"
"유니폼이 얼마길래."
"적어도 은화 2 전 정도?"
"윽!"

어셔는 그녀의 말에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옷이 비싸다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정도나 할 줄은 몰랐다. 그는 문득 벨카가 남겨두고 간 가방을 떠올렸다. 분명 가방 안에는 소녀가 넣어둔 것으로 보이는 돈들이 가득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가 대체 무슨 염치로 그것을 써버린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그에게 저런 유니폼을 살만한 돈은 없었다. 있었더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럼 다른 옷은."
"안돼. 유니폼 안 입으면 일 안 시켜줄 거야."

어셔는 차라리 다른 곳에서 일할 것을 고민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만큼 그를 친절하게 대해주는 곳이 드물 것이라는  알았다. 누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선뜻 일을 시켜줄까? 결국 어셔는 어쩔 수 없이 몸에 맞기라도 하는 여성용 유니폼을 입었던 것이다. 그것마저도 헐렁해서 끈으로 살짝 조여야 했지만. 그나마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수치심이 덜 든다는 게 어쩌면 다행이었다.

"제레미아, 왔냐?"

그때 문을 열고 식당으로 들어온 뼈를 엮어 만든 옷을 입은 사내가 그런 어셔를 발견하고 어처구니 없이 보고 있는 것을 크리칼료프가 발견했다.

"...저 녀석 남자가 아니었나?"
"치료해 줬으니까. 대충  거 아니여."
"그렇기야 하다마는."

제레미아가 크리칼료프의 앞에 앉자 근처에 있던 이들이 슬그머니 물러나는 것을 힐긋 보고 말을 이었다. 때문에 기분이 나빠질 법해도 제레미아에겐 잘 된 일이었다. 이 북적거리는 이들 사이에서도 조금만 목소리를 낮추면 간단한 이야기 정도는 나누어도 상관이 없었으니까.

"예언에 따르면 낙원의 아이는 둘. 남자아이 하나와 여자아이 하나였다."
"꼬마 아가씨를 제외하고?"
"그래, 그런데 어째서 남자아이뿐인가 했는데."
"아니면 그냥  다 남자아이였겠지.  명이 예쁘장하게 생겨서 착각했다던가."

제레미아는 그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다시 어셔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렇다 해도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낙원의 아이는 어디에 있는 거지? 둘은 함께 낙원을 떠나왔을 텐데."
"그건 네가 직접 알아봐야지. 어쩌겠수."
"쯧, 그 금기라는 건 불편하기 짝이 없군."
"그걸 직접 달고 사는 나만 하겠냐."

제레미아는 크리칼료프가 따라주는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해석해온 고대어들을 떠올렸다. 애초부터 해석할  없게 만들어진 언어들을 제외하면 나름대로 고대어를 읽을 줄 알았기에 지금까지 외워둔 예언들이 꽤나 있었으니까. 그러나 예언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굵직한 예언들은 어떻게든 외웠지만 그것을 전부 외우기엔 한계가 있었다. 지금으로선 크리칼료프가 가끔 찾아오는 유적의 파편에서 유의미한 것을 찾아보는 것이 전부지만 그건 너무 잡다한 것뿐이었으니.

"결국 모든 진실을 알아내려면 성역으로 내려가야 하는 건가."
"사교도 놈들에게 들키지 않을  있다면 말이다."
"하, 빌어먹을."

그렇게 여관에 가득한 손님이 전부 빠져나갈 때까지 그들은 대작을 계속했다.

"윽,  냄새!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대충 다섯  정도 되나?"

뒤처리까지 대충 끝마쳤을 즘 주방에서 나온 나우시카는 테이블에 엎어진 제레미아를 앞에 두고 조용히 술을 홀짝이는 크리칼료프에게 다가갔다가 훅 풍기는 알코올 향에 코를 막았다.

"그렇게나 많이!? 내가  살아!"
"난 한 병도  마셨다.  녀석이 거의 다 마셨지."
"레미 아저씨? ...완전 뻗었네."

그녀는 제레미아를 한 번 흔들어 보았지만 미동도 없이 코를 고는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은 따로 재우면 되니까. 2층으로 올라가자고."
"어휴, 알았어."

크리칼료프가 그를 부축해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나우시카는 따라 올라갔다.

"사람 한번 더럽게 많이 오네."

어셔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침대에  터 앉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게 우습다는 듯 식당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옷대로 짜증 났고 다리가 움직일수록 몸은 아팠다. 그 무엇보다도 화가 났던 건 오랫동안 달려도 문제가 없었던 자신의 몸이 오래 걷기만 했는데도 지쳐가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동안 그렇게 노력했었는데 그 노력들이 저도 모르는 사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무리했던 탓에 다리의 상처가 계속 쑤셔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발을 벗어 상태를 보았다. 다리는 상처가 덧나기라도 했는지 붕대를 감고 있는데도 피가 조금씩 새어 나온 것이 보였다. 그래도 어셔는 내일 아침 근육이 당기는 것을 막기 위해 피투성이가 된 붕대 위로 손을 짚었다.

"끄윽!"

손에 상처가 짓눌려 아팠지만 그래도 꿋꿋이 다리를 주물렀다. 몸을 평소보다 오래 자극하는 훈련을 하고 나면 도나르나 벨카가 꼭 해주었던 일이었다. 붕대가 상처를 쓰는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아서 어떻게든 끝내고 침대에 퍼질러 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만 보고 있으면 낯설고 고요한 침묵이 그의 귀로 파고들었다. 차라리 금방 잠이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항상 그를 안고 잠들던 소녀의 품이 그리웠지만 손을 쥐어 보아도 손에 잡히는 건 차가운 공기와 붕대의 꺼끌꺼끌한 감촉뿐이었다.

"...벨카."

그의 말은 받아주는  없이  빈 방 안을 맴돌며 사라져갔다.

"벌써 자고 있네."

나우시카는 슬그머니 어셔의 방문을 열어보다 그 틈으로 그가 잠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으아, 또 피투성이잖아."

그녀는 붕대만 감은 채 몸을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는 어셔를 발견하고 기겁했다. 그의 몸을 감고 있는 붕대의 이곳저곳이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엉망이었으니까. 그나마 상처가 다시 굳었는지  이상으로 피가 새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붕대를 갈아줘야 할  같았다.

"아저씨 애를 정말 이렇게 부려먹어도 괜찮은 거야?"

나우시카는 그 모습에 자신까지 쓰려오는 것 같아 함께 방으로 들어온 크리칼료프에게 물었다. 그야 어셔를 최대한 부려먹으라고 했던 건 다름 아닌 그였으니까.

"어쩔  없어. 좀 바쁘게 부려먹지 않으면 이 녀석 스스로 제 무덤을 파지 못해서 안달일 거다."
"하지만 이렇게 다쳤는데."
"차라리 몸이 아픈 게 나아.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스스로 새긴 흉터만 할까."
"그래도."

그녀가 걱정해도 크리칼료프는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가씨."

헬레나는 창문을 통해 멍하니 달을 올려다보던 벨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돌아보는 소녀의 금빛은 희미했다. 그 모습에 헬레나는 무어라 위로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우시카와 크리칼료프에게 돈을 맡기고 다른 여관으로 옮겨왔지만 벨카는 혼이 빠지기라도  것처럼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제 그만 주무실 시간입니다."
"응."

소녀는 헬레나의 품에 조용히 파고들었다. 조금이라도 온기를 찾는 것처럼 절박한 몸짓에 그녀는 벨카를 끌어안아주었다.

"헬레나, 내일은 같이 일을 찾아보자."
"예."

그녀의 다짐에 가까운 말과 마르지 않는 소녀의 눈물을 제 품으로 받아주며 헬레나는 눈을 감았다. 어두운 그림자들이 주변을 맴도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목표물 주변에 남은  이제 하나뿐입니다."
"하나뿐이라도 더 신중하라는 명령이다. 괜히 조급하게 행동해서 일을 그르치지 말도록."
"예, 좀 더 상태를 지켜보겠습니다."

파르즈의 밤은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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