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나아가야 하는 이유.
"이제 좀 진정했냐?"
한참을 울고 나니 크리칼료프가 물어온다. 하지만 어셔는 지금도 뜨거운 감정에 머리가 끓어오르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계속 그러고 있는 것도 없어 보이니까. 그쯤하고 들어가자고."
"하지만 여긴..."
이곳에는 벨카가 있지 않은가? 대체 무슨 얼굴로 그녀를 보아야 하는지 두렵기까지 했는데 나우시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기 토끼랑 헬레나 언니는 방을 비우고 떠났어."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네 물건은 놔두었으니까. 전해달래."
그는 생각보다 먼저 일어서서 자신이 벨카와 함께 잠시나마 머물렀던 방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기 위해 다리를 올릴 때마다 다리 이곳저곳을 파고드는 듯한 상처의 감각에 두르고 있는 담요를 꽉 쥐고 계속 계단을 올라 도착한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를 반기는 것은 텅 빈 방 안의 풍경이었다. 그 어느 곳에도 붉은색 한올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겨우 소녀가 떠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무얼 기대한 걸까? 어차피 마주할 용기도 없었으면서.
비틀거리며 침대에 주저앉으니 다시 방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본적으로 배치된 가구들을 제외하면 숲에서부터 들고 왔던 가방과 몇몇 그가 쓰던 물건 밖에 보이질 않는다. 벨카와 헬레나의 것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그것이 그녀를 보기 불편해할 그를 위한 배려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벨카가 그에게서 확실하게 떠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어이없고 제멋대로인 마음이다. 이별을 통보한 것은 그였을 텐데. 스스로가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또 우는 거야?"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어보면 문가에 선 나우시카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나와. 아침 먹으래."
어셔는 그녀를 따라 식당으로 내려가 식탁 앞에 앉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부에 쓸리는 꺼슬꺼슬한 붕대의 감촉과 틈의 맨살에 닿는 의자의 느낌이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 완성! 오늘의 메뉴는 구사크 스튜야!"
나우시카는 커다란 냄비를 통째로 들고 와 그들의 중심에 놓았다. 테이블이 쿵 하고 묵직하게 울리는 것이 냄비 안에 꽉 차있는 것 같았다.
"이것 때문에 어젯밤에 요란을 떨었구만."
그의 앞으로 접시가 다가와 고개를 들고 보니 이미 나우시카의 몫을 챙겨준 크리칼료프가 스튜가 담긴 접시를 내밀고 있었다.
"일단 좀 먹어놔라. 그래야 좀 살 거 아니냐."
접시에는 갈색의 육수가 가득했고 이곳저곳에 녹아든 채소의 흔적이 엿보였다. 언뜻 예전에 먹었던 랍스카우스가 떠오르지만 그보다 더 좋은 냄새가 코를 찌르니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며 밥을 달라 아우성쳤다. 그렇게 한 스푼을 뜨니 구수한 냄새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에 담으니 고기의 진한 육즙이 채소의 단맛과 섞여 입안 가득 차올랐다. 이곳에서는 보통 간이 안 된 밍밍한 음식만 먹었었기에 그 맛이 더 각별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의 접시는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어제는 차라리 죽었으면 했는데도 이상한 것들에게서 도망치기 바빴고 음식이 안 들어갈 것 같으면서도 뻔뻔스럽게 잘만 넘어갔다.
"그래서 꼬마야.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모르겠어요."
이곳은 그에겐 낯설고 처음 보는 것투성이였다. 무엇 하나 시작해보려고 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것 하나 없었다.
"당장 그 아가씨들을 따라가서 사과할 것도 아니잖냐?"
무어라 변명하고 싶어도 그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런 몸으로 돈은 벌 수 있겠냐?"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그는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능하고 한심해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정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어제 놈들에게 그대로 잡아먹히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땅 파고 들어가겠다. 고개 들어."
그때 크리칼료프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이대로 쫓아낼 생각은 없어 인마. 그랬다가 어디서 또 객사하려고."
"하지만 지금 저는 돈이..."
"걱정 말라고 직접 일하면 되니까."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어셔를 바라보았다. 천에 가려져 보이지 않음에도 그의 시선이 뚜렷하게 느껴져 긴장하고 있으니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체력이나 힘은 아팠으니까 그렇다 쳐도 너 사냥 같은 건 해본 적 있냐?"
"여기 오기 전에 견습 기사로 있었던 적은 있어요."
"뭐? 거짓말!"
그때 놀라서 소리친 건 나우시카였다. 어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니 어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한다. 나우시카에 비하면 괜찮았지만 크리칼료프도 놀란 눈치였다.
"오메, 그건 또 의외로구먼."
"그게 왜요?"
어쩐지 기분이 나빠 물으니 어깨를 으쓱이는 그.
"아파서 그렇다고 보긴 했는데 손에 물 한 번 묻혀 본 것 같지가 않아서."
"제가 뭐 어때서요!?"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소리치면 크리칼료프와 나우시카가 눈을 마주치곤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에 더욱 기분이 나빠져 뭐라 할라 치면 그가 일어섰다.
"그럼 한 번 시험해 보자고. 뒷마당으로 나와라."
그렇게 나온 뒷마당에서 그가 물었다.
"그래서 넌 뭘 다룰 줄 아냐?"
"...장검이요."
"흠?"
그는 잠깐 의문스러운 소리를 흘렸지만 곧 뒷마당의 한구석에 숨겨진 창고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그건 재질은 다르지만 어셔에겐 익숙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검?"
"목검이다. 지금 네 힘으로도 들 정도는 될 거다."
"나무로 이런 걸 만들어도 돼요?"
어셔가 살던 숲에서는 그렇게 귀한 건 아니었지만 밖으로 나오면서 나무가 무척이나 귀한 재료라는 걸 알았다. 때문에 정말 돈이 많지 않은 이상에야 대부분의 가구나 도구가 쇠나 돌로 만든다는 것도 알았으니까. 그런데 그런 나무를 이런 곳에 썼다는 게 믿기지 않아 물었다.
"가끔 착각하긴 하는데. 맹그로브 나무는 그렇게까지 귀하게 여기지는 않아. 파르즈 근처에 널리기도 했고."
어디 쓰기에 나무질이 영 좋지 않다고 한다. 특히 가구를 만드는 것에 절대 적합한 나무가 아니라고.
"이야기는 이쯤하고 실력 좀 보자."
이제 보니 크리칼료프도 한 손에 아밍소드로 보이는 목검을 하나 쥐고 있었다. 그가 워낙 대충 서있어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를 얕보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그럴만하다고 생각하며 익혀왔던 대로 목검을 어깨 위에 걸치듯 들고 다리를 벌려 자세를 잡았다. 몬스터보다도 신중하게 상대해야 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크리칼료프의 자세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를 물끄러미 지켜볼 뿐. 하지만 어셔는 방심하지 않았다.
그저 배워왔던 대로 해왔던 것처럼 자세를 바꿔가며 그를 향해 목검을 휘두르자 탁, 하고 그의 검을 크리칼료프의 검이 막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검을 부딪힌 다음이었으니까. 그가 그의 검을 타고 흘리듯 검을 내리며 찌르려는 순간. 크리칼료프의 검이 휘어졌다. 아니, 휘어진 게 아니다. 그의 검이 뱀이 기어가듯 어셔의 검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에 그의 검을 타려는 것을 멈추고 앞세웠던 발을 뒤로 빼며 검을 반대로 휘두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목검이 크로스 가드까지 파고들어선 손으로 어셔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으니까. 너무 순식간에 끝나서 그가 어설프게 덮고 있던 담요조차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과연 좋은 스승에게 배운 것 같구만."
그를 손쉽게 제압했으면서 정작 크리칼료프의 평가는 후했다. 그의 말에 어셔는 기쁨마저 느꼈다.
"다만 본격적으로 가르침 받지는 못했구나."
다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그가 견습 기사라도 분명 그가 배웠던 건 제대로 된 검술이었는데. 도나르가 잘못 가르치기라도 했다는 것일까? 처음과는 다른 평가에 의문을 표하니 그는 깜빡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네 스승이 뭘 안 가르쳤다는 게 아니라 전쟁터에 내보낼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서 말이다."
그는 어셔에게서 장검을 가져갔다.
"장검이 대 기사전이나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 안 쓰는 건 아니지만 장검의 주된 목적은 따로 있지."
그리곤 어셔가 했던 것처럼 자세를 잡는다.
"바로 개인의 호신이다. 때문에 장검의 검술은 공방 일체를 목적으로 하지. 어떻게 보면 가장 효율적인 검술이고."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연약해서 한군데 잘리거나 상처를 입어도 치명적일 때가 많다는 건 도나르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저는 몬스터와 싸우는 법도..."
"당연하지. 사람과 싸워 이기는 건 그렇다 쳐도 몬스터와 싸우는데 지면 아무런 소용이 없잖냐."
확실히 그의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진짜로 널 전쟁 같은 거에 보낼 생각이었다면 몬스터나 갑주를 부수거나 파고들기 쉬운 무기나 간단한 지휘를 가르쳤을 거다. 그런데 넌 그런 기억이 있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중에 도나르가 가르쳐준 것은 없었다. 이런저런 요령이나 위장술 같은 것은 배운 적이 있었어도 그런 걸 가르쳐준 적은 없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네 스승이 널 아끼고 있었다는 거잖냐."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다시 눈물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왜 그 사실을 이제야 알 수 있었을까? 좀 더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이런 여행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을 텐데. 이젠 란투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서러웠다.
"그나저나 넌 사냥은 못하겠다."
겨우 눈물을 참고 있으니 크리칼료프의 말이 들려왔다.
"왜요?"
"왜긴 왜야. 힘이랑 체력이 약해도 너무 약하잖냐."
"그건 아팠으니까 그런 거잖아요!"
"알긴 아는데 그걸 감안해 주는 데가 어디 있겠냐?"
그의 말에 어셔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사정 같은 거 남에겐 알 바가 아닐 테니까.
"그럼 간단하게 체력부터 키우고 보자고."
그러면서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여관의 안쪽, 주방이었다.
"나우시카, 때마침 좋은 일꾼 하나 생겼다."
"으에, 걔를 쓰라고? 너무 빈약한 거 같은데."
나우시카가 그를 못마땅하게 훑어보는 모습에 어셔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런 걸로 체력을 기를 수 있다고요?"
"일하다 지쳐 쓰러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거 같은데. 견습 기사가 맞기는 해?"
그녀는 여전히 그가 못 미더운 듯했다. 하기야 어셔도 스스로가 못 미더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약해 보이는 것이 싫었다.
"됐고 시켜보면 알겠지. 그리고 검을 배운 티가 나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그게 진짜였어?"
나우시카는 미묘한 얼굴로 어셔를 보다 크리칼료프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말이니까 한 번 믿어보지 뭐. 그럼 그 문둥병 환자 같은 모습은 치우고 이 옷이나 입고 나와."
그녀는 서랍에서 옷을 하나 찾아 그에게 내밀었다. 어쩐지 못마땅해하던 것치고 순순히 그를 받아주는 그녀의 모습에 어셔는 복잡한 마음으로 옷을 받았다. 아직도 그의 몸을 가리고 있는 건 담요를 빼면 붕대뿐이었으니까. 그나마 잘 된 일이라 생각하며 방으로 올라가 옷을 펼쳐 보았을 때 이상한 것을 깨닫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뭐예요!!"
"넌 왜 아직도 옷을 안 입고 그러고 있냐?"
책상에 앉아 있던 크리칼료프가 다시 계단을 내려오는 어셔를 발견하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야 그는 여전히 담요만 덮고 있었으니까.
"이런 걸 제가 어떻게 입어요?!"
"엉?"
크리칼료프는 화를 내는 어셔의 모습이 의아한 듯했지만 곧 그가 펼쳐 보인 옷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 옷은 다름 아닌 여자들이나 입을 법한 유니폼이었으니까. 소란을 들었는지 나우시카가 의아한 듯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왜 그래?"
"야, 왜 애한테 여성용 유니폼을 줬냐?"
크리칼료프가 황당하게 물으니 그녀는 무언가 문제라도 있냐는 듯 되묻는다.
"왜?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는 나우시카의 말을 듣고 어셔를 보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래 봬도 남자애다."
"에에, 바쁜데."
그녀는 귀찮다는 듯 다른 옷을 어셔에게 건넸다. 어셔가 붉으락푸르락하며 다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크리칼료프가 물었다.
"너, 쟤가 남자란 거 알고 있지 않았냐?"
"흥, 나는 모르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