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8화 〉나아가야 하는 이유. (188/220)



〈 188화 〉나아가야 하는 이유.

그건 그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러니까 조금 더 그를 붙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를 원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에게 왜 그러는지  번쯤은 물어도 되었을 텐데도 받아들이는 벨카의 모습에 어셔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와의 이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지 않은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받아들여버렸다.

"솔직히 나보다 좋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잖아. 나보다  잘나고 너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그는 자신을 붙잡고 있던 소녀의 손을 뿌리치고 말았다. 자신의 손에 치여 허공을 방황하는 여린 손을 외면해버렸다. 그토록 사랑스러운 저 머리카락 한올마저 그의 아픔이었다. 그렇게 그는 어떤 대답도 들려주지 못하는 소녀를 뒤로하고 걸어갔다. 차마 그녀의 얼굴을 직접 볼  없어서 끝까지 외면하고 걸어가던 그는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면 다시 돌아가 저 작은 몸을 안아버릴까 봐.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그녀의 곁엔 헬레나란 사람이 있었으니까.

적어도 자신보다 소녀를  확실하게 지켜줄  있을 테니까. 언제나 그만을 바라보던 소녀의 금빛도 언제나 그를 좋아한다며 속삭였던 말들도 모두 묻어버리면서.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외면했다.

"...괜찮으십니까?"

어셔가 달려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벨카의 뒤로 헬레나가 묻자 소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응, 그래도 어셔가 살았으니까."

그녀의 물음에 돌아본 소녀의 금빛에선 눈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있잖아. 히끅. 언젠가는... 흐윽.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가슴을 부여잡는 소녀를 지켜보며 헬레나는 어셔가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기 전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어셔 님에게는 어떻게 말씀하실 생각입니까?"
"어셔에게는 전부 말할 거야."

주드에 대한 일이 있었음에도 감추고 싶었을 치부임에도 벨카는 그렇게 다짐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건."
"응, 어쩌면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어셔를 속이고 싶지 않은걸."

헬레나는 그런 벨카를 말려보고자 했다. 때문에 그 결과가 어떨지 이미 예상 정도는 하고 있었을 텐데도 소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서로를 위해 해야만 했던 마음이, 행동이 결국 상처를 낳고 말았다. 발갛게 물든 작은 손을 지켜보다 그녀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이런 일을 막고 싶었던 것인데. 그녀가  수 있었던 건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헉, 헉!"

어셔는 계속해서 달렸다. 이곳이 어딘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끝을 정해두지도 않고 그저 달렸다. 그가 깨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어셔는 대체 왜 자신이 파르즈에 있는지 왜 도나르와 시프도 없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특히 가장 의문이었던 건 대체 어떻게 구름 지대를 넘어왔냐는 것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그가 알기로 구름 지대를 건너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도나르의 일행과 함께 구름 지대를 건너보았던 어셔지만 메디아와 류드밀라에게 구름 지대를 건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듣고 나서야 자신이 그런 험난한 곳을 지나왔다는  깨달았다. 사람들이 힘을 합쳐 지나가려 해도 사람 한 명 빠져나오기 힘든 지옥 같은 곳. 그런 곳을 헬레나와 벨카가 단둘이서 그를 데리고 지나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이야기가 길어질 거야."

그의 말에 소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그가 걸린 병은 알다시피 파르즈에서만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었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구름 지대를 건너야만 했다. 그러나 란투아에는 구름 지대를 뚫고 함께 건널만한 이들이 없었다. 결국 그를 치료할 방법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그때 주드라는 마법사가 나타나 제안했다고 한다. 그라면 그녀들을 데리고 구름 지대를 건널 수 있다고 어셔를 치료할 수 있다고. 그러나 그에겐 조건이 있었다.

어셔는 그 조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모를 리가 없었다. 겨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는 소녀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알겠으니까.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고. 그러나 그는 목이 매여 말하는 타이밍을 놓쳤고 벨카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그는 내가 자신의 것이 되길 원했어."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상단을 구성할 여건은 주어지지 않았고 도나르에겐 책임이 있으며 그대로 있다면 어셔는 병을 앓다 죽는 선택지 밖에 남지 않은 상황. 결국 그가 파르즈에서 깨어났다는 건 벨카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결국엔 주드에게서 벗어나 그를 치료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그에게 몸을 내어주어야 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소녀는 주드를 속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의 위에서 아양을 떨고 그의 것을 빨고 핥으며 정을 마시고 받아들였다.

자신의 죄를 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괴로워하며 말을 토해내는 소녀에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안아줄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벨카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나 노력하고 애를 썼는데. 변함없는 현실이 그에게 들이닥쳤다.

"끅!? 악!"

어셔는 달리고 달리다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 뒤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넘어지면서 입안에 들어온 모래는 짜고 까슬까슬하면서도 축축해 기분이 나빴다. 그는 멍하니 몸을 돌려 누웠다. 축축한 땅에 숨어있던 물기가 그대로 그의 옷과 뒷머리로 스며들었다. 겨우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할  없는 무력하고 한심한 꼬맹이일 뿐이다. 그에게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이제 너무나도 무거워서 벗어던지고 싶은 짐일 뿐이었다.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서 지낼 곳을 알아보아야 했다. 그러다 자신이 지나온 길이 보였다. 대체 어떻게 지나왔을까? 싶은 수목이 빽빽이 우거진 이상한 숲은 이리저리 꺾이고 뜯겨서 말이 아니었다. 그가 지나온 길에는 하얀 꽃 하나가 즈려밟혀 낙엽처럼 형편없이 땅을 나뒹굴고 있었다.

"윽...!"

그리고 뒤늦게 자신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바지는 곳곳이 찢어져 그 틈으로 긁힌 상처들에선 피가 새어 나와 바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렇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스러진 꽃을 주워들고 보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가슴을 두들겨 깨부숴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하염없이 땅에 엎드려 운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정신을 차렸을 무렵엔 이미 날이 저물어 주변은 어둠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찌르르찌르르르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적막한 밤을 채운다. 나뭇잎 사이로 달빛이 새어들어오지만 빽빽한 나뭇잎 사이로 숲 아래를 밝히기엔 너무 희미했다. 그가 딛고 있는 곳은 땅이라기보다는 나무의 뿌리와 잔해들로 이루어진 더미 같았고 그 아래로는 물이 흐르는 것 같다. 그가 아는 숲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젖어버린 옷과 차가운 밤공기에 몸도 으슬으슬 떨려온다.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그에겐 돈도 돌아갈 곳도 없는데.

결국 그는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배는 고프고 몸은 피곤하고 아프지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텅 비어버린 것만 같은 가슴이 생각조차 지워버린 것만 같았다. 낯선 나무의 밑동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감싸 안은  추위를 잊어보려 하지만 땅에 닿는 바지는 이미 전부 젖어있었다. 그에게 남은 건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 때였다.

-키르르르르륵

어디선가 낮고 조심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마 주변이 조용하지 않았다면 놓쳐버렸을지도 모르는 울음소리에 어셔는 소름이 돋았다. 분명 조심스러운 울음소리였지만 그건 누군가를 위한 상냥한 것이 아니었다. 사냥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날카롭고 은밀한 비수와도 같은 소리. 그 소리는 분명 어셔의 옆,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그는 터질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느끼며 팔에 묻고 있던 얼굴을 조금씩 틀어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확인했다.

그러나 어셔가 볼  있었던  숲의 아래로 진득하게 깔린 어둠만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경 쓰이지 않았던 어둠이 순식간에 공포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소리가 그를 노리는 무언가에게 들릴까  가라앉혀보려 하지만 그런다고 심장이 뛰는 것을 멈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숨을 쉬는 것마저 잊고 그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곧 익숙해진 눈으로 소리를 낸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새의 종류일까? 얼핏 깃털이 엿보였던 것 같다.

그마저도 나뭇잎 사이로 새어들어온 달빛이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그럼에도 확실한  그것이 그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과.

-키르르륵

그와 같은 것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번엔 그의 뒤편에서 그것과 비슷한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희미하게 땅을 대신한 나무의 잔해가 스치는 소리가 났으니까.  희미한 소리를 들을  있었기에 어셔는 뒤늦게 풀벌레들이 울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침묵이 그의 귀로 파고드는 것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동시에 그는 자리에서 곧바로 뛰쳐나갔다.

-키이이익!
-키리익!

그러자 잽싸게 그를 노리던 무언가들이 그가 있던 자리를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큰 놈들은 아닌지 나무를 밟는 놈들의 발소리는 스치듯이 가볍고 날렵하다. 그를 노리고 달리는 속도도 그만큼이나 잽싼 듯하다. 아마 미리 그들을 눈치채고 뛰쳐나가지 않았다면 그대로 놈들에게 붙잡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빨리 달리며 놈들이 쫓아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몸에 나무의 뿌리가 걸리며 부러지거나 하는 소리가 섞여 듣기 힘들지만 아직도 살고 싶다고 말하는 몸은 놈들이 그를 따라 달려오는 소리를 잡아내고 있었다.

놈들의 숫자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다섯에서 여섯 마리. 어쩌면 그보다  많은  같다. 그래도 덩치가 작아서 그런지 그를 쉽게 따라잡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약해진 체력이 문제였다.   달을 앓았다는 그의 몸은 그의 생각보다 너무 약해져 있어서 얼마 달린 것 같지도 않은데 숨이 벅차올라서 어지러워 중심을 잡기도 어려웠다. 결국 중심을 잃고 넘어져 버린 순간. 첨벙하고 얕은 물에 몸을 내던진 자신을 발견할  있었다.

"큽, 퉤!"

입에 들어온 물은 아까 입에 들어왔던 모래보다도 짰지만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보았을 때 그가 숲을 빠져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신 그가 마주한 것은 드넓은 밤하늘이었다.

"이건."

광활한 호수가 밤하늘을 비추어 밝게 빛나는 별들과 달빛의 가운데 그는 덩그러니 내던져져 있었다.

-키르르륵!

그 광경에  말을 잃은 그를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다시 현실로 끌어내렸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그가  빠져나온 숲의 아래다. 밤하늘에 발을 내딛는 것이 두려운지 아니면 숲 밖으로 몸을 내비치는 것이 싫은지 숲의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밖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아직 그를 노리고 있는 듯 들려오는 소리는 그것들이 숲의 경계에 있다는 것을 알린다. 그것들이 숲을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다행이었다.   숲에서 멀리 떨어지면 그들이 쫓아오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밤하늘 위에서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키르륵!

그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결국 그것이 숲의 경계에서 빠져나와 같은 밤하늘 위에 섰다. 그것의 크기는 작았다. 기껏해야 그의 허리 정도밖에 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셔는 결코 안심할 수가 없었다. 밤하늘에 발을 담그기 전 언뜻 보였던 그의 손가락보다도 크고 날카로운 갈고리처럼 생긴 발톱과 파충류의 비늘을 갖추었으면서도 부드러운 피부처럼 주름진 발목 그 위로 이어지는 근육질의 다리 또한 비늘이 엿보이는 동시에 크고 작은 깃털이 나있다.

새라고 보기엔 부리 대신 기다랗고 날카로운 주둥이가 군침을 흘리며 입안에 빼곡히 들어찬 날카로운 이빨을 자랑하고 세로로 찢어진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를 응시한다. 전체적으로 겨울의 힐디스비니를 작게 줄여놓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다르다. 결정적으로 그것은 두 발로 걷고 있었고 새처럼 작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날개는 날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상대를 사냥하기 위함인지 손에 가까운 모습으로 날카로운 손톱을 보이고 있었다. 놈의 등 뒤로 이어지는 기다란 꼬리가 즐거운 듯 살랑살랑 흔들렸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보이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