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5화 〉나아가야 하는 이유. (185/220)



〈 185화 〉나아가야 하는 이유.

고요한 어둠 속이었다. 발끝 하나 닿는 일이 없어 두렵지만 어쩐지 그 품에 몸을 맡기고 싶은 충동이 드는 암흑 속에서 떠돌고 있으니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와 그를 깨운다.

[또다시 이곳으로 돌아왔구나.]

목소리일까?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하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그립고도 따스한. 자신을 감싸는 편안한 어둠과 비슷한 소리는 그가 아는 목소리와도 어딘가 닮아있었지만 정말로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가엾은 전능자여. 우리를 너무 가까이하지 말거라.]

무슨 소리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그저 자고 있었을 뿐인데.  생각에 닿자마자 이질감이 들었다. 대체 언제부터 잠들어 있었던 거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영원히 떠지지 않을 것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자 애썼지만 눈이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떼어지지 않아 인상을 구기니 여린 손길이 그의 눈에 닿으며 그가 눈을 뜨는 것을 막던 것들을 떼어낸다. 그 익숙한 손길에 겨우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소녀의 금빛이었다.

달큼하고 따사로운 빛을 가득 머금은 금빛이 그의 시선과 마주하고 놀란 듯 피어오르다 이윽고 눈물을 머금는 순간에 놀라 입을 열었다.

"벨...카?"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자신이 기억하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거칠게 갈라진 그 목소리는 정녕 자신의 목소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가 의아한 마음에 몸을 일으켜보려 하지만 그의 손은 땅을 짚지 못하고 헛손질만을 반복했다. 아무리 힘을 줘봐도 일어나지 못하는 그의 손을 소녀가 붙잡는다.

"잘 잤어?"

이어서 들려오는 벨카의 나긋한 목소리는 그를 안심시켰다.

"어, 뭔가 너무 오래  것 같은데."

그제야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풍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무두질이 어설퍼 바깥의 빛이 스며든 물결무늬가 새겨진 표면이 거친 가죽 벽, 용도를 알 수 없는 유리병들과 뼛조각,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진 돌조각들까지. 그가 알고 있던 성 내부의 광경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리고 뒤늦게 처음 보는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앗, 일어났다! 다행이야!"

이어서 그와 눈을 마주친 여자가 놀란  동글동글한 눈을 크게 뜬다. 진한 흑발과 그와 같은 색의 눈동자는 흑요석처럼 반짝이며 호기심을 가득 품었다. 여인과 소녀의 중간에 서있는 생기가 넘치는 그녀였지만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다른 것이었다.

"날개?"

인간의 등에 달려 있다는 것에 위화감이 느껴지는 커다란 회갈색 날개가 그녀의 신체라고 주장하듯 파닥파닥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낯선 사람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이제 일어났구만."
"몸이 많이 상했을 테니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좋을 거다."

낡은 천으로 몸을 감싸 피부의 어디 하나 드러내지 않은 사내와 짐승의 머리 뼈를 모자처럼 쓰고 뼈를 엮어 갑옷처럼 입고 있는 남자.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분홍색과 보라색의 사이에 있는 독특한 색의 단발과 날카로운 인상의 여인이 그를 보고 안도한다. 그나마 그녀의 복장은 성에서도 자주 보았던 것이기에 그녀가 하녀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지만 코에 닿는 공기마저 낯설게 느껴지는 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밸카? 이 사람들은 누구야? 여긴 어디고? 도나르 아저씨랑 시프 누나는 어디 있어?"

그러나 무엇보다 혼란스러웠던  익숙하고 친근했던 사람들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말을 끝으로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날개를 가진 소녀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고 낡은 천으로 몸을 감싼 사내는 말없이 지켜본다. 뼈를 입은 남자는 고개를 저었으며 하녀복을 입은 여인은 눈을 감는다. 아무도 그의 의문에 대답하지 않으니 어셔가 의지할 수 있는  소녀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자신을 향하자 벨카의 입술이 옅은 호선을 그렸다. 금방이라도 흩어져 사라질  흐릿한 미소로 소녀가 말했다.

"어셔, 쓰러졌던 건 기억해?"
"내가 쓰러졌었다고? 윽...!"

그녀의 말에 겨우 떠올랐다. 비가 쏟아지는 날 도나르와 함께 훈련을 하다 그의 몸 상태를 걱정하고 방으로 돌아가던 길. 어지럽고 매스꺼운 기운이 몸을 채우는 탓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하얀 바닥에 그대로 넘어져 버렸던 마지막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서 지나간다.

"감기 때문이었어? 어쩐지 몸이 너무 무겁기는 했지만 쓰러질 줄은 몰랐는데."

아마 비를 맞으며 훈련하느라 감기에 걸린 탓이라 생각하며 자신을 걱정했을 벨카를 걱정해보지만 그를 쳐다보는 이들의 시선에서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 감기는 아닌데."

날개의 소녀는 예상치 못했던 사실을 알게  것처럼 쩔쩔매고 다른 이들의 기색도 뭔가 이상했다.  그래도 그의 등을 쿡쿡 찌르던 위화감이 더욱 커져가는 것을 느끼며 그가 머리를 짚었을 때. 손 사이로 삐져나오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그가 기억하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이건."

그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집어 눈앞으로 가져오자 노란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이 그대로 눈앞까지 끌려왔다. 이상했다. 평소에 그리 신경 쓰고 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여자아이들처럼 길지 않았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다른 남자아이들과 다르지 않게 상당히 짧은 편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머리카락이 어째서 살짝 당기는 느낌조차 없이 이렇게 간단하게 그의 눈앞까지 끌려온단 말인가? 색감마저 흐릿해진 그의 머리카락이 너무나 낯설다.

"제가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가 멍하니 머리카락을 보고만 있자 입을 연 건 하녀복의 여인이었다. 비록 인상은 날카로웠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온화했고 익숙한 복장이었기에 그나마 부담 없이 그녀와 시선을 마주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누나는 메디아네 성에서 일하시는 분이죠? 도나르 아저씨랑 시프 누나는 어디에 있어요?"

그러자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분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네? 그럼 대체."
"저는 어셔 님, 즉 당신과 아가씨를 따르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어셔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메디아가 아니라 자신과 아가씨라니? 혹시나 하며 벨카를 보면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도련님께서 걸리셨던 병은 단순한 감기 같은  아닙니다. 캐트시들이 옮기는 다른 병이었습니다."
"캐트시라면 설마."

어셔는 도나르가 데리고 왔던 고양이 귀와 꼬리를 가진 소년을 떠올렸다.

"예, 생각하신  맞을 겁니다. 때문에 도련님은 오랫동안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머리카락이 길어진 것도 오랫동안 자고 있었던 것처럼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이나 힘이 없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도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지만 이런 건 지나치게 오래 자면 종종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단 한 가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도나르 아저씨랑 시프 누나는요?"
"그분들은..."
"어디 있냐고요!"

뜸을 들이는 여인의 모습에 어셔는 저도 모르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제대로 머리가 굴러가는 것 같지가 않았다. 사과해야 되는데 그보다 먼저 도나르와 시프의 행방이 신경 쓰였다.

"캐트시들이 옮기는 병은 특수하지."

그때 입을  건 동물의 머리 뼈를 쓰고 뼈갑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뼈와 나무를 엮은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치며 말을 잇는다.

"캐트시들은 자신들의 동족이 파르즈를 빠져나가는  극도로 경계한다."

마치 그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시선을 그들에게 향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그의 말은 확실하게 들려왔다.

"그들이 동족을 아끼는 것도 있겠지만 자신들이 타고나는 질병은 파르즈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식물은 오로지 파르즈에서 자생하고 있으니까. 어셔는 그의 말에 헬레나의 말을 다시 생각했다. 그가 걸린 병은 단순한 감기 같은  아니라 캐트시가 옮기는 병이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다시 한번 낯선 공기가 콧속에 와닿고 기분 나쁜 감각이 등을 찌른다. 그의 눈에 언뜻 움집의 가죽 천이 갈라진 곳으로 빛이 비쳐들어오는 문이 보였다.

"어셔, 지금 움직이는 건...!"

벨카가 그를 말려보려 하지만 그는 이미 몸을 일으켜 움집의 천막을 열어젖히고 밖에 발을 딛고 있었다. 그러자 환한 빛이 잠시 그의 눈을 가리며 멀게 만들었지만 곧 빛이 걷히며 세상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건 햇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모래사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는 하늘을 비추는 물의 거울이 이어지고 그 위를 얽히고설킨 뿌리를 지상에 드러낸 이형의 나무들이 떠다니는, 그가 아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이었다. 코에 닿는 짠 비린내마저 그가 아는 공기와는 달랐다.

그는 밖으로 나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자신이 맨발이라는 것과 다리에 힘이 풀려 땅에 주저앉은 상태라는 걸 자각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곳에는 그를 따라나온 벨카와 사람들이 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가 파르즈라고요?"
"그렇습니다."

그의 발에 다시 하녀복의 여인이 답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여행을 떠나고자 한 것은 사실이었다. 파르즈에도 언젠가 올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생전 처음 보는 곳에 툭 떨어진 듯한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멍하니  낯선 풍경에 고개를 돌리고 있으니 그의 뒤로 사박사박 작은 발소리가 들려오며 곧 익숙하고도 달큼한 꽃향기가 그의 머리를 감싸 안는다. 모든 것이 낯설고 낯선 상황 속에서 단 하나, 소녀가 남아있었다.

"벨카, 도나르 아저씨랑 시프 누나는?"
"지금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어셔는 겨우 안심할  있었다. 하지만 깨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급하게 몸을 움직인 탓이었을까? 뼈 마디마디가 삐걱거리고 근육이 쑤시는 것처럼 아프고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수마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직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이 남아 있었는데 점점 감겨오는 눈을 막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자도 괜찮을까?"
"너무 오래 자지는 말아줘."
"그냥 피곤해서 그래."

그는 소녀의 품에 몸을 맡기고 잠을 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콧소리를 흘리는 그의 모습에 벨카와 어셔를 지켜보던 이들도 하나둘 다가와 살폈다.

"후아, 갑자기 뛰어나가서 큰일 나는  알았어."

나우시카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하자 다른 이들의 말문도 트였다.

"이제 깨어났으니  관리만 잘해주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다. 나도 할 일이 있으니 여관으로 데려가라."

제레미아는 그 말을 끝으로 벨카와 어셔를 힐긋 바라보고 움집으로 돌아갔고 헬레나는 벨카의 뒤로 다가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응, 어셔가 깨어났으니까."

크리칼료프는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 제레미아를 따라 움집으로 들어갔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가 선물 삼아 가져왔던 유물의 파편들을 살피는 제레미아였다.

"그래서 어떤 것 같냐?"

그는 파편에 새겨진 문자들을 해석하는데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크리칼료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레미아는 계속 파편을 살피면서 그를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그건 네가   알고 있지 않나?"
"뭐,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보는 게 더 정확할 거 아니냐."
"그것도 그런가."

그는 파편을 내려놓고  다른 파편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낙원의 아이가 확실하더군."
"...결국 순례자가 이곳까지 오게 된 건가."

크리칼료프는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데리고 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낙원의 아이가 무조건 그녀의 마음에 드리란 보장도 없으니까."
"그렇겠지. 그분의 마음마저 멋대로 조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들은 나란히 앉아 침묵으로 움집을 채우다 크리칼료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순례자는 바다를 되찾을 수 있을까?"
"글쎄.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지."

움집의 거친 벽면에 그려진 바다가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파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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