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멈춰버린 발걸음.
그들이 따로 나설 필요는 없었다. 경비병으로 나온 캐트시들이 파시틸라의 시체를 처리하고 그녀를 데리고 돌아갔으니까. 그 잠깐의 소란을 끝으로 마을은 관심을 갖는 이들 하나 없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매번 비명이 들릴 때마다 달려가는 것도 안 지치냐?"
"그래도 혹시 누가 도와주는 게 늦으면 어떻게?"
"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너나 좀 챙겨라."
"메롱! 알아서 하거든!"
헬레나는 벨카를 데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크리칼료프와 나우시카의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이곳에 적응하는 건 꽤나 힘든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어셔가 정신을 차리고 나면 가능하다면 란투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건너온 구름 지대를 다시 건너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녀들이 구름 지대를 건너올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마법사의 마법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니까. 어쩌면 주드의 뒤통수를 치지 않았다면 돌아갈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랬다간 어셔를 치료하기는커녕 그녀들만 혹사당하는 상황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에게 소녀가 유린당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과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일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런 헬레나를 생각 속에서 끄집어낸 건 나우시카의 목소리였다.
"저기, 있잖아요? 헬레나 언니랑 벨카는 어쩌다가 파르즈까지 오게 된 거예요?"
나우시카는 직접 말해놓고도 예민한 질문을 한 것이 아닐까? 그녀들에게 미움받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듯 힐끔거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녀의 옆에 있었을 크리칼료프를 찾아보면.
"에헤이. 한 푼만 좀 깎아달라고. 마진도 많이 남으면서 뭘."
그는 웬 돌덩이들을 쌓아놓은 상인과 흥정하며 씨름하고 있었다. 여전히 믿기진 않지만 그 역시도 마법사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 또한 그녀들을 집으로 데려다줄 순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녀들을 과하다 싶을 만큼 도와주지 않았나? 나우시카 또한 낯선 그녀들을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 문득 벨카를 보면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어차피 바닥에 굴러다니던 거 아무거나 주워온 거면서 까탈스럽게 굴고 있어."
마침 상인과의 흥정에 성공해서 자루를 매고 돌아온 크리칼료프는 뒤늦게 그녀들의 분위기를 읽은 것 같았다.
"엉? 뭔 일 있었수?"
"...어셔 님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그는 잠시 그녀들을 번갈아 보다 나우시카의 머리에 꿀밤을 놓았다.
"으윽! 좀 살살 때려!"
"어휴. 그새를 못 참고 물어보고 있냐? 안 그래도 제레미아네 갈 생각이었는데."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어셔가 있는 움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변방에 있다고 해도 마을과 그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움집 안으로 들어서자 활기차게 인사하는 나우시카를 볼 수 있었다.
"레미 아저씨! 오랜만!"
"나우시카? 웬일로 크리칼료프가 널 데리고 온 거냐?"
그녀와 제레미아는 이미 아는 사이였던 듯했다. 그가 이상하다는 듯 묻자 크리칼료프는 방금 전 시장에서 상인과 흥정 끝에 구매한 돌덩이들이 가득 들어있는 자루를 내려놓았다.
"별 건 아니고 오랜만에 놀러 나갔다가 시장에서 파편을 파는 걸 찾아서 전해주려고 왔지. 겸사겸사 환자 상태도 보고."
"오오. 마침 잘 됐군. 안 그래도 네가 예전에 주었던 파편의 해석도 끝난 참이다."
그들의 대화에 헬레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파편이라 하면 무언가의 조각일 텐데 해석한다고 하면 고대의 문자가 새겨진 벽의 조각이나 유물을 말하는 것일 테니까.
"고대어를 해석하실 수 있는 겁니까?"
"별건 아니고 저 녀석 취미가 고대 문자를 해석하는 거라서. 가끔 이렇게 시장에 나도는 걸 갖다주면 알아서 보더라고."
보통 유적이라고 한다면 성지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가끔씩 다른 곳에서도 유적의 존재를 찾을 수는 있었다. 단지 락 사리아가 유명하고 다른 나라에도 강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마도시대의 유물이 온전하게 남아있었던 데다가 마왕 바르가제트의 명령을 따르는 성기사들의 힘과 신을 섬긴다는 명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유적은 오래전에 붕괴되고 소실되어 제 기능을 할 수 없기에 그저 오랜 흔적으로만 남은 유물들일 뿐이었으니까.
"다만 지금 구할 수 있는 건 어쩌다 가끔 지상에 드러나는 풍화된 것들이 전부다. 유의미한 유물을 찾기는 힘들어."
제레미아는 크리칼료프가 가져온 자루에서 돌을 하나하나 꺼내어 살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아무리 오래전에 남은 흔적일 뿐이라도 과거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었다. 사람들은 대마도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만 있지 그 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멸망했는지 추측만 무성하고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혹시 해석한 내용을 조금이나마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음? 그런 건 왜... 아, 연금술사라고 했던가. 그럼 궁금할만하겠군. 하지만 고작해야 일부일 뿐일 텐데 괜찮겠나?"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을 뿐인데 제레미아가 순순히 가르쳐주겠다고 하니 헬레나는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
"그냥 알려주셔도 되는 겁니까?"
보통 대마도시대의 흔적이라고 하면 기를 쓰고 모으려 하거나 자신만의 비밀로 남겨두려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누구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는 고대는 연금술사가 아니라고 해도 마법사처럼 한 번쯤 꿈꿔 보는 것이었다. 대신 그만큼 그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성지를 제외하면 유적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접근하기도 힘들거나 접근하기 쉽다고 해도 누군가 이미 중요한 자료들을 가져간 상태일 테니까.
헬레나가 그나마 대마도시대의 기록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그런 식으로 숨겨두었던 연금술사의 자료를 훔쳐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가를 바랄 가치도 없지. 어차피 땅에 나뒹굴던 걸 상인이 기념품으로 팔던 것일 정도가 대부분이고. 그만큼 제대로 된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길을 가다 이상한 바위가 좀 보인다 싶어 파보면 유물인 경우가 꽤나 많아서 파르즈에선 그리 가치 있게 여기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유물은 유물이기에 파르즈가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상인들은 기념품으로 값을 부풀려 판다는 듯하다.
"그래서 이번에 해석한 말은 뭐였는데?"
"끙, 그게 말이다."
"말해 준다며? 나도 좀 듣자."
"...터."
제레미아는 입을 열었지만 정작 그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말만 그렇게 했을 뿐 들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고 헬레나는 납득하려 했지만 크리칼료프의 말이 빨랐다.
"좀 크게 말해봐. 무슨 내용이었는데?"
"...운터."
"엉?"
"카운팅 카운트 카운터다."
그의 재촉 끝에 기어코 들을 수 있을 만큼 커진 제레미아의 말은 정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크리칼료프는 잠깐의 침묵 끝에.
"너 그거 해석하는 데 몇 달 걸렸다고 했냐?"
"세 달이었지. 처음 보는 형식과 말이라 중요한 말 같아서 해석하는 데 골머리를 앓았는데."
"...세 달을 낭비해서 고대의 흑역사를 끄집어내셨구먼."
"닥쳐라! 이걸 가지고 온 건 네놈이잖냐!"
제레미아가 그 말을 해석한 것으로 보이는 돌을 크리칼료프에게 집어던지는 것을 시작으로 투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헬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유물에 대한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지만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나우시카에게 그녀들이 파르즈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이니까. 하지만 딱히 그녀가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이 애가 흑목병에 걸려서 치료받으러 온 거야?"
"응, 란투아에는 마땅한 치료제가 없었으니까."
헬레나가 유물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이 벨카는 이미 어셔를 자신의 무릎에 눕히고 있었고 나우시카는 그 옆에서 잠든 것처럼 숨만 내쉬는 어셔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벨카는 이 애를 좋아하는 거지?"
"응, 정말로 좋아해."
"부럽다. 나도 그런 사람이 생길까?"
"어쩌면."
그녀는 그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보답받지 못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부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헬레나의 귀에 처음 들어보는 소년의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온 건.
"벨...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