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3화 〉멈춰버린 발걸음. (183/220)



〈 183화 〉멈춰버린 발걸음.

성지, 락 사리아란 어떤 곳인가? 성지는 대마도시대라 불리었던 고대의 유산, 그중에서도 마법을 사용할  있는 마도구들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유적이었다. 때문에 대마도시대의 마도구를 손에 넣기 위해. 수많은 나라, 혹은 집단이 거리가 멀거나 전쟁을 하기 힘든 상황임에도 원정을 보내면서까지 모여들어 전쟁을 벌였던 곳이다. 유적에 잠들어있는 수많은 마도구들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에. 그러나 그 전쟁에서 성지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왕 바르가제트가 쓰러졌다는 말입니까?"

바르가제트, 적어도 이 근방에선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성지를 차지하고자 했으나 아무도 성지를 차지할 수 없었던 건 다름 아닌 그자 때문이었으니까. 이르기를 깃털은 검과 같으며. 이르기를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이르기를 혼자만의 힘으로 날  있는 유일한 하피이며. 이르기를 수백  동안 성지에 군림했다는 하피들의 왕. 많은 군대가 성지를 손에 넣고자  번이고 쳐들어갔었지만 매번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전멸시켰다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심지어 구름 지대로 인해 단절된 란투아에서도 마왕이라는 이름으로 입을 타고 동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유명했다. 하피들이 쫓겨났다는 건 그가 쓰러졌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헬레나는 크리칼료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우왕,  겁나 쪽팔렸겠다."

정작 그녀의 말을 들은 크리칼료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오래된 소식이긴 혀. 그래도 하피들이 이렇게 파르즈에 있는 걸 보면 사실이라는 건  수 있지 않냐?"

하지만 대체 어떤 괴물 같은 자가 500년 동안 수많은 침략자들을 학살하며 군림해온 바르가제트를 쓰러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냐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에 대해 물을 수는 없었다.

"오, 시작하는구먼."

신호와 동시에 절벽 위에 서있던 하피들이 일제히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으니까. 사람의 키보다도 큰 날개들을 좌우로 활짝 펼친 하피들이 하늘을 활강하는 모습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하피들의 날개는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어서 구경하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길마저 사로잡았다. 다만 그중에서도 눈에 띄었던 건 바로 나우시카였다. 평소에는 접고 있어서 알지 못했지만 활짝 펼친 그녀의 회갈색 날개의 안쪽은 에메랄드빛이었다. 날개가 만들어내는 어두운 장막 아래에서도 빛이 나는 듯한  모습은 수많은 하피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이었다.

"야호~!"

심지어 대부분의 하피들이 날면서도 불안정하게 흔들리거나 나는 것에 비해 혼자서 여유롭게 외치며 크리칼료프와 그녀들이 있는 곳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그리곤 가장 높은 건물에 착지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다시 날개를 펼치고 지붕과 지붕을 넘나들며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른 하피들 또한 질 수 없다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건물 위를 달려가는 것이 보인다.

"슬슬 이동하자고."

헬레나가 생각을 잊고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크리칼료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경기 중이 아닙니까?"
"미리 결승점으로 출발해야 도착하는 걸 볼 수 있을 거 아니여."

비행 시합을 구경하던 이들이 하나둘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을 보면 익숙한 일인 듯했다. 착지를 제대로 하지 못해 넘어지거나 휘청이기도 하고 건물을 덮은 덩굴에 발이 걸리거나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고 부딪히는 하피들의 모습을 구경하며 광장에 도착하자.

"늦었잖아!"

어느새 도착해 있던 나우시카가 허리에 손을 짚고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헬레나 언니랑 아기 토끼가 같이 있었으니까 봐줄게."
"거 눈물 나게 고맙구먼."

크리칼료프의 심드렁한 대답은 안중에도 없는지 나우시카는 그를 제치고 그녀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히히! 저 어땠어요? 무려 1등이라고요!"

에헴 하고 가슴을 펴는 모습이 어지간히 자랑하고 싶었던  같다.

"얼씨구. 언제는  1등을 안 했던 것처럼 군다?"
"악! 누르지 마! 누가 아저씨한테 물었어?! 난 헬레나 언니한테 물어본 거거든!"

그런 나우시카를 크리칼료프가 타박하며 그녀의 머리를 꾹 눌렀다. 그러다 겨우 빠져나온 나우시카는 벨카를 껴안았다.

"아기 토끼는 어땠어? 내 나는 모습 말이야."
"무척 즐거워 보여서 멋졌어."
"꺄아! 어쩜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말만 골라서 하나 몰라!"

소녀의 말을 듣곤 방방 뛰며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은 주변에서도 눈에 띄었다.

"뭐야, 또 나우시카가 1등이야?"
"따라잡을 수가 없네."
"정말 비법이라도 따로 있나?"

조금씩 몰려드는 시선을 느끼고 벨카가 움츠러들자 그제야 깨달은 것처럼 핫! 하고 주변을 둘러보던 나우시카가 볼을 긁적였다.

"시합도 끝났으니까 먼저 다른 곳으로 가죠!"

그리고 도착한 곳은 간단하게 음료를 마실  있는 노점 앞이었다.

"푸하! 이제 좀  것 같아."

그곳에서 산 건 음료수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무언가의 커다란 열매에 단순히 구멍만 뚫어놓고 갈대 줄기를 꽂은 것이었는데 나우시카는 그것을 꿀꺽꿀꺽 잘도 마셨다. 헬레나는 무어라 하기 힘든 미묘한 맛에 한 모금 마셔보고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건 크리칼료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애초부터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열매를 흔들어 안쪽의 액체가 출렁이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넌 이걸  맛으로 먹냐?"
"왜? 나 말고도 아르부스를 찾는 사람은 많잖아? 달다고 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건 보통 말라죽기 직전에 아르부스를 마시고 하는 소리라고 몇 번을 말 혀. 정말 단 것도 아니고 밍밍헌디."
"아저씨의 요리에 비하면 훨씬 맛있거든!"

확실히 단맛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 아르부스라는 열매의 맛은  맛있다고 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헬레나는 다시 한번 갈대 줄기에 입을 대고 마셔 보았다.

"생각보다 괜찮군요."
"뭐시여?!"
"거봐! 아저씨가 이상한 거라니까!"
"솔직하게 좀 말해 봐봐. 괜히 애 눈치 보지 말고."

크리칼료프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그녀에게 소곤거리듯 물었지만 헬레나는 진심이었다. 첫맛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다시 마셔보면 밍밍한  달면서도 담백했는데 단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그녀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맛있어."
"아기 토끼도 그렇다잖아!"
"끙, 그럼 너나 더 마셔라.  못 마시겠다."

벨카마저 입맛에 맞았는지 마시며 이야기하자 기세등등한 나우시카의 모습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아르부스를 나우시카에게 주었다.

"아싸! 안 그래도 모자랐는데."
"하피들은 비행 시합을 자주 합니까?"

헬레나는 갈대 줄기에 입을 대고 아르부스의 내용물을 마시는 나우시카를 지켜보다 물었다. 하피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새처럼 날아다니고 집을 넘나드는 모습은 장관이었으니까. 그녀가 알기로 하피들은 성지의 꼭대기에서 바람을 타고 나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라 듣기도 했고 성지에 가면 하늘을 나는 하피들을 심심치 않게  수 있다는 이야기도 오랜 이야기였다.

"그런 건 아니에요.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피들은 생각보다 나는  안 좋아해서."

때문에 나우시카와 크리칼료프의 말은 더 의외의 것이었다.

"하피들은 하늘을 나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게 아니었습니까?"
"정확히는 자신들의 날개를 자랑스러워하는 거지. 날개를 꾸미는 걸 좋아하는 하피들은 꽤 많아."

조금만 주변을 둘러봐도 날개에 색을 칠하거나 장신구를  하피들은 쉽게 찾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날개를 펼쳐서 날고자 하는 하피들은 얼마 없다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비행 시합 때 참여한 하피들보다도 멀리서 구경하던 하피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 같았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니까요! 멋진 날개도 있으면서 왜 날려는 생각을 안 하는 건지."
"너무 그렇게 못마땅하게 여기지는 마라. 하피가 몸이 가벼운 편이라도 잘못해서 떨어지면 죽거나 다치는 건 마찬가지잖냐."

나우시카는 그런 하피들이 동족이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그런 하피들을 감싼 건 크리칼료프였다.

"그래도!"
"가족을 부양하는 하피들도 있는데 날다가 실수해서 다치거나 죽으면 어쩌게?"
"...그것도 그렇네."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깨달았는지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고 크리칼료프에게 받은 아르부스를 마저 마셨다.

"하지만 무서워하는 것치고 비행 시합에 참여하는 하피들이 상당히 많았던  같습니다만."

비행 시합에 참여한 하피들이 전체적인 숫자에 비해 적었다고는 해도 결코 적다고 할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하피들의 날개가 크다고 하지만 아래에서 보았을 때 잠시나마 하늘이 가려질 정도라면 위험을 감수하고서 참여한 하피들이 많았다는 뜻이니까.

"으엑, 그건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건 말이지. 이 녀석 때문이다."

그 말에 나우시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피하자 헬레나는 무언가 잘못 물었나 싶었지만 크리칼료프가 그에 대해 알려주었다.

"아앗! 아저씨! 말하지 마!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데!"
"예?"

나우시카 때문이라니 혹시 하피들 사이에서 그녀가 그만한 위치인 걸까? 헬레나가 의아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자 나우시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말이죠."

원래 비행 시합은 이렇게 많은 하피들이 참여하는 대회는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어렸을 적에 하피들 사이에서 따돌림받는 일이 많았던 그녀가 자신들을 무시하는 그들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은 마음에 비행 시합에 참여해서 1등을 차지한 뒤로 그녀를 이기려는 하피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주로 1등 하면 자기랑 결혼해달라는 식이었지?"

크리칼료프의 말대로 그런 하피들이 하나둘 늘더니 어느새 이런 규모가 되었다고 한다. 어쩐지 비행 시합을 하는 대부분의 하피들이 남자였던 건 그런 이유였던 모양이다.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2등으로 만족할 걸 그랬어."
"네 성격에 그게 됐겠냐? 아예 바람을 타는 걸 즐기고 있는 녀석이."
"하지만 너무 재미있는 걸 어떻게!"

원래 1등까지 하려던 마음은 없었지만 날다 보니 흥이 올라서 당시에 자신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하피들조차 제쳐버렸다고 한다. 때문에 지금까지 그녀는 1등을 차지하고 있었고 다른 하피들이 새로 1등을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다고.

"사실 마음에 드는 녀석이 있으면 적당히 봐주고 1등을 넘긴 다음에 청혼을 거절하면 그만인데 말이다. 하피들의 전통이라고 해도 강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래?! 내가 실수라도 해서 졌다면 몰라도 일부러 져주는 건 절대로 싫거든!"
"봤지? 이런 성격이라 좋아하는 녀석은 꽤나 고생할 거다."

크리칼료프가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을 보니 그녀는 평소에도 이랬나 보다. 그런 식으로 음료를 마시며 마음을 놓고 있었을 때였다.

"꺄아아악!"

어디선가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길을 걷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일제히 멈추었다. 그러나 비명 소리를 들은 사람들  몇몇을 제외하면 태연히 걸음을 옮긴다. 설마 몬스터가 쳐들어온 것일까? 하지만 사람들의 너무 여유로운 모습이 헬레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녀가 엉거주춤하게 서있으니 크리칼료프가 물었다.

"한 번 가볼텨?"
"하지만 위험한 게 아닙니까?"
"가보면 알아. 무엇보다."
"아저씨! 빨리 안 오고 뭐해!"

언제 자리를 박차고 달려갔는지 멀리서 손을 흔드는 나우시카가 보였다.

"나보다 오지랖 넓은 녀석이 있어서 말이지."

그들을 따라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상태였다. 비명은 한 공중 화장실에서 들려온 것이었는데  앞에는 어느 한 여성이 훌쩍이며 몸을 떨고 있었다. 문이 열려있는 공중 화장실의 변기에는 남성의 물건을 닮은 형태의 머리, 기둥에 해당하는 몸체는 하얀 촉수 형태의 몬스터가  늘어진 상태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몬스터는 헬레나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파시틸라?"

파르즈로 오는 길에 벨카를 노리던 것을 주드가 처리했던 것과 경비병들이 처리하는 것을  적이 있었으니까.

"오늘 화장실  때는 조심해야겠네."
"저 아가씨도 재수 없지."

하지만 헬레나는 그 몬스터보다도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가씨들도 화장실 쓸 땐 조심하고 써. 경비병들이 막는다고 막긴 하는데. 이런 식으로 기어코 기어들어오는 경우가 있어서."
"...예."

란투아에서는 이런 몬스터가 도시 안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난리가 날 정도였는데 이런 일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란투아가 확실히 평화로운 편이었다는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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