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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화 〉멈춰버린 발걸음. (182/220)



〈 182화 〉멈춰버린 발걸음.

점심에 왔던 손님들의 숫자 이상으로 쌓여 있는 접시들을 닦으며 그녀는 나우시카가 괜히 도와달라고 했던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있었다. 이 정도라면 소규모 영지의 가신들이  끼에 먹어치우는 접시의 양과 비슷할 것 같았으니까. 혼자서도 하라면 할 수는 있겠지만 무척 고되고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살았어요. 언니!"

마지막 접시를 닦고 나니 나우시카가 헬레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에이, 헬레나 언니가 아니었다면 저녁까지 빠듯했다고요."

그녀는 많이  수 있다며 헤실헤실 웃었다.


"평소에도 이 정도 양을 혼자서 하시는 겁니까?"
"그랬다면 전 진작에 쓰러졌을걸요? 원래는 서빙이랑 잡일을 도와주는 분도 계셨어요."

그렇다면 지금은 왜 혼자서 일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헬레나를 눈치챘는지 나우시카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작게 줄이며.


"그게 말이죠. 하필이면 그분이 이주 전에 갑자기 그만뒀거든요."
"갑자기 말입니까?"
"네! 제법 오랫동안 일하신 분이었는데. 일손이 갑자기 줄어서 얼마나 곤란했다고요."

나우시카는 투덜거리며 수건에 손을 닦고 그녀에게도 수건을 내밀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보니까 결혼한다잖아요! 설마 여기서 손님이랑 눈이 맞았을 줄은 몰랐죠! 묘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누구는 연애는 꿈도 못 꾸고 있는데!"

헬레나는 혹시 예민한 주제를 잘못 물어본 것은 아닐지 고민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아닌 듯했다. 내심 안심하고 손을 닦고 있으니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아무튼 그 후로 사람을 구해보려고 하긴 했는데 좀처럼 구해지질 않아서요. 지원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나우시카는 볼을 부풀리며 심통이 난 얼굴로 크리칼료프가 있는 곳을 흘겨보았다.

"그렇게 구했던 사람도 아저씨가 쫓아낸  있죠?"

그렇게 불평하면서도 그녀는 딱히 그의 행동에 대해 불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크리칼료프 씨는 어떤 사람입니까?"


헬레나는 그에 대해 묻고 있었다.

"음, 요프 아저씨요?"


나우시카라면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자 그녀는 무어라  잘라 이야기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문득 깨달았다는 듯.


"서, 설마 관심 있는 거예요?! 저 아저씨한테?!"


어째선지 이상한 오해를 받고 말았다.


"안돼요! 언니가 훨씬 아깝다고요! 힘만 쓸데없이 강해서 사냥이나 좀 할 줄 알지 일은 또 얼마나 귀찮아한다고요! 요리는 또 얼마나 못해! 분명 결혼하면 고생만 할걸요?"


나우시카는 당황했는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컸다. 때문에 통발을 만들던 크리칼료프가 테이블에 엎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애초에 그런 쪽으로는 관심도 없습니다."
"앗."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는 나우시카를 보며 어쩐지 그에 대해 과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나름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 뿐인데. 헬레나는 수건을 다시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건 당사자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하는 편이 좋습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


나우시카의 뒤에는 소리 없이 다가온 크리칼료프가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챈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하하. 아저씨. 다 농담인 거 알지? 그렇지?"
"그려? 그럼 나도 농담 하나만 하자."
"어, 어떤?"
"니 볼은 고무로 만들었냐!!"
"우아아!!"

헬레나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 걱정스러웠던 일들이 전부 먼 이야기 같았다. 평화로운 오후의 한때였다.

"끄으응, 내 볼."

나우시카가 빨개진 볼을 문지르고 있으니 크리칼료프가 입을 열었다.


"너는 손님들한테 왜 이리 관심이 많냐?"
"내가 할 소리거든. 헬레나 언니랑 아기 토끼한테 유독 친절한 게 누군데."

그건 오히려 그녀가 궁금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그와 함께 꽤 오랫동안 살아왔던 그녀는 그가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경우를 보긴 했었지만 그가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게 구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나우시카는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그가 친절하게 구는 모습이 더 신기했다. 지금은 벨카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는 헬레나를 확인하고 말했다.


"캐트시들이 정말 납득이  가는 이유로 쫓아내는 건 아니라고 말했던 건 아저씨였잖아?"

실제로 어떨 땐 진상을 부리며 나우시카에게 시비를 걸던 사람도 더러 있었기에 크리칼료프가 새로운 손님을 데리고 오면 유독 예민해지는 시기였다. 그들 중에 범죄자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그렇다고 너무 적대적이거나 호의적이지도 않은 그런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게 두 사람의 규칙이었다. 그래도 친해지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그건 나우시카의 이야기지 크리칼료프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외국에서 온 사람이 며칠 있었다고 캐트시들한테 밖으로 쫓겨났겠냐. 어느 칠칠맞은 캐트시가 조절을 못해서 그렇지."
"그럼 문제가 없는 거 아니야?"


그와 함께 오는 이들의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그에 대해 물어본 적은 드물었지만 이번 손님은 구름 지대의 너머에서 왔다니 다른 곳의 이야기를 듣는 취미가 있는 나우시카에겐 특히나 흥미로웠다.


"아이고야. 그렇다고 너무 친해지지는 마라."
"어째서!"


그녀가 불만스럽게 물었지만 크리칼료프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저 아가씨들이 여기서 오래 머무를 것 같지는 않거든."
"우, 그건  아쉬운데."
"왜 그렇게 저 아가씨들이랑 친해지고 싶은 겨?"
"응? 이유가 따로 필요해?"


나우시카의 날개가  늘어지는 모습을 보며 물으니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이상하다는  쳐다보는 모습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너는 지나가던 딘가랑도 친하게 지내는 녀석이었지."
"귀엽잖아!"

참고로 그가 아는 딘가는 결코 귀엽다고 부를 만한 생물이 아니었다.

"저 아가씨는?"
"예뻐!"
"저 꼬마 아가씨는?"
"귀여워!"


결국 크리칼료프가 두 손을 들었다. 그로선 그녀의 감각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으니까.


"넌 나중에 나 없이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잘  건데! 돈도 많이 모았고 친구도 많거든!"
"어휴. 너 알아서 해라."
"그럼 허락한 거다!"


그와 동시에 헬레나와 벨카가 있는 곳으로 탓하고 달려가려다 끼익하는 소리가 나도록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까 아저씨. 오랜만에 일도 일찍 끝난 거 같은데 식당은 쉬면 안 돼? 같이 놀러 가자!"


그러면서 부탁한다는 듯 손을 마주 잡고 그를 바라보는 모습이 애절해 보일 지경이다.


"그냥 네가 놀고 싶은 거 아니여?"
"에헤헤."
"그러던가. 하루 안 한다고 망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말을 들은 나우시카는 곧바로 헬레나와 벨카에게 달려갔다.

"저랑 같이 놀러 나가실 분!"
"예?"
"?"


헬레나와 벨카가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의아해하니 크리칼료프가 다가와 나우시카의 등을 쳤다.

"너무 들이댔잖아. 이 가시나가!"
"꺄악! 아파!"

나우시카가 그에게 맞은 등의 아픔을 삭히기 위해 끙끙거리는 동안 그가 대신 말했다.


"이 녀석이 아가씨들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겸사겸사 파르즈가 어떤 동네인지 소개해 주고 싶나 벼."


헬레나는 그의 말에 어셔를 치료할 생각만 했지 파르즈를 돌아볼 생각은 못 했다는 걸 깨달았다. 주드와 돌아다니긴 했지만 그와 함께하면서 좋았던 적이 없으니 파르즈에 대해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일단 그녀들에게 돈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약 값이 비쌀 것을 대비해서 많이 챙겨오기도 했거니와 크리칼료프의 도움으로  세 배는 늘어난 상태였으니까. 어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일이었다.

"저야 상관은 없습니다만."


헬레나는 그들의 모습에 고민하다 벨카를 바라보았다.


"응, 좋아."


소녀 또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나우시카는 어느새 아픔을 잊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와! 진짜?! 그럼 빨리 준비하고 나올게!"

그러면서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헬레나는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와도 그리 나이 차가 많아 보이진 않는데 밝은 소녀 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기하기도 했다.

"활기찬 아이군요."
"너무 기운이 넘쳐서 탈이지. 언제쯤 철이 들려나 몰라."

크리칼료프는 그녀들과 동석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헬레나는 더 이상 궁금증을 참기 힘들었다. 종족부터가 다른 두 사람인데 아무리 봐도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


"두 분은 무슨 사이입니까?"
"엉? 무슨 사이냐니. 저 녀석이랑?"

그는 헬레나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는  턱을 매만졌다.

"원수?"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으레 하는 장난스러운 말이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뭐 그냥 양딸쯤 되겠지."
"준비 끝! 우리 빨리 나가요!"

마침 나우시카가 방에서 나오고 그들은 함께 여관을 나섰다. 크리칼료프가 두꺼운 사슬과 자물쇠로 문을 잠그고 팻말을 닫힘으로 바꾸었다.


"히히, 우리 아기 토끼는 어디부터 가보고 싶어? 마침 다른 나라에 왔으니 신기한 게 많지 않아?"
"그런 건  모르겠어."


그러는 사이 나우시카는 벨카를 뒤에서 꼭 껴안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에 얼굴을 파묻고 얼굴을 비비는 그녀의 행동에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손만 꼼지락거렸다.

"그럼 내가 소개해 줄게! 아저씨랑 언니도 빨리 따라와요!"

소녀를 이끌고 앞장서는 나우시카를 따라 크리칼료프와 걷고 있으니 그녀가 은근히 거리를 벌린다는 걸 눈치챈 헬레나가 나우시카를 보면 한쪽 눈을 찡긋하고 깜빡이는 모습을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오해받고 있군요."

아까 설거지를 하고 크리칼료프에 대해 물었던 게 원인이리라.

"그보다 볼 게 있겠수? 어차피 안에서 봤던 거랑 별 차이도 없을 텐데. 굳이 있다면 좀  후졌다는  정도다만."


그의 말대로였다. 나우시카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리 특별한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파르즈의 내부에서도 보았던 방식의 놀이나 음식들이고 축제가 있었을 때 볼 거리 자체는 많았으니까. 즐길  있었던  아니지만 그래도 아는 것을 다시 보는 느낌이라 그렇게까지 새롭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가씨가 제대로 웃는 모습을 보는  처음입니다."


어셔가 쓰러진 후에 만났기 때문인지 헬레나도 벨카가 웃는 모습을 보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도나르나 시프와 함께 있을 때는 웃었다. 애써 슬픔을 감추기 위해 짓는 미소라도 웃음이라 부를  있다면. 그러니 이번이 헬레나가 처음으로 본 소녀의 제대로 된 미소였다.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절벽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나우시카를 올려다보게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앗! 뭐야! 오늘이 비행 시합 날이었잖아!"

그녀가 지나가는 길에 게시판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외친 말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가 신청했던 시합 날이 오늘이었는데 일을 하느라 깜빡하고 있었다는 모양이다.


"굳이 저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겁니까?"


위험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종족이 하피라는 걸 생각하면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옆에도 같은 하피들이 날개를 최대한 넓게 펼치며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 하냐는 의문은 어쩔 수 없었지만.


"안전장치도 확실하니까 뭐. 그리고 저게 하피들의 전통인데 어쩌겠수."


캐트시들도 그들의 전통을 인정하고 매번 벌이는 시합을 승인하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헬레나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주드 때문에 지금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 하피들이 파르즈에 있는 겁니까? 그들의 고향은 분명 성지가 아니었습니까?"

파르즈에 아무리 많은 인간과 수인들이 모인다고 해도 하피들은 나름의 고향이 있었다. 란투아가 이곳에 속했던 시절 성지를 다스리며 통치해 왔던 게 바로 하피들이었으니까. 일부가 성지를 나와 독립했다면 이해할 수 있었지만 지금 절벽에 서있거나 구경을 나온 하피들은 척 봐도 너무 많았다.


"엉? 언제 적 이야기를... 아니, 란투아가 구름 지대로 단절된  100년은 더 됐었지."


그리고 듣게 된 이야기는 놀라웠다.


"하피들이 성지에서 쫓겨나서 이곳에 눌러 앉은 게 14년 전쯤이었나 그랬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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