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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화 〉멈춰버린 발걸음. (179/220)



〈 179화 〉멈춰버린 발걸음.

"정말 그 둘만 보내도 괜찮으십니까?"


변방의 움집에서 어셔를 돌보던 제레미아는 아침 일찍 찾아온 벨카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소녀는 어셔의 곁에서 그의 이마를 쓸어주며.


"헬레나의 곁에는 그가 있으니까."

그리고 제레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 당신이 그렇게 높여 부를 만한 존재가 아니야. 편하게 대해줘."
"알겠... 아니, 그러지."


그 말을 끝으로 움집에는 어셔의 앓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드디어 찾았다. 역시 그 녀석과 같이 있었군. 헬레나."


그곳에 서있는 것뿐임에도 그들이 선 골목에 피비린내가 가득 차오를 정도로 주드의 몰골은 지독했다. 헬레나는 크리칼료프가 손을 보긴 확실히 봤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흐미, 시방.  그게 뭔 꼴이냐?"
"당신이  게 아니었습니까?"
"몰러. 난 그냥 박치기 한 번 한 것 밖에 없어. 그리고 저거 저놈 피가 아니잖아."

그의 말을 듣고 주드를 자세히 보니 확실히 뒤집어쓴 피는 많지만 거의 다 말라붙어 있었고 어딘가 특별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를 죽인 것인가 싶었을 때 떠오른 것은 그 골목에서 주드가 기절시켰던 이름 모를 하피였다.  자 또한 어쨌든 소녀를 범하려 했기에 신경 쓰고 있지는 않았는데.


"당신, 당신과 같이 있던 하피를 어떻게 한 겁니까?"

누군가 특별히 챙기지 않았다면  자도 주드와 함께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뭐야. 그놈 피여? 죽어도 싼 놈이긴 했다만."
"아는 사이였습니까?"
"아는 사이는 아니고.  주변에서 성가시게 굴기로 유명한 녀석이었지. 캐트시들이 쫓아낼까 고민하고 있단 말은 들었는데. 건수 잡기가 어려웠다나."

정상적인 작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평소에도 이곳저곳에 껄떡대고 다니던 자인 듯했다.

"벨카!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


그러나  이상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골목길을 막고 선채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주드가 소리를 지르며 벨카를 찾기 시작했으니까.

"못 찾을 겁니다. 아가씨는 이곳에 없으니."
"나와! 여기 있잖아! 벨카!"

헬레나의 말에도 그는 그들은 보이지도 않는 듯 벨카만을 찾았다. 그녀는 그제야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흰자를 뒤룩뒤룩 굴리며 공허한 칠흑으로 그들의 곁에 숨어 있을 소녀를 찾아 헤매는 눈이 섬뜩하기 짝이 없다. 안 그래도 꺼림칙한 작자였는데 미쳐버리기까지  것일까? 헬레나가 인상을 구기며 다시 말하려 했을 때.


"여기 있잖아.  그래? 그렇지 않으면 마법이 안 써질 리가 없어. 어디다 숨겼지?"

이어지는 그의 말에 깨달았다. 정처 없이 계속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주드의 손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계속해서 룬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계속 마법을 사용해서 마법을 없애느라 고통스러워하는 벨카의 목소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헬레나는 알고 있었다. 소녀가 이곳에 없다는 걸. 그들이 직접 어셔가 있는 움집에 벨카를 데려다주고 왔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그는 지금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가? 소녀의 힘이 아직도 그를 속박하고 있을 거라는 가정도 있었지만 그건 가능성이 낮았다.

"마녀의 힘으로 마법사의 힘을 영원히 봉인할 수는 없는 겁니까?"

헬레나는 그를 제압하기 위해 파르즈로 오는 동안 주드가 잠든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벨카와 함께 그에 대한 대책을 의논해 왔으니까.

"그건 불가능해. 그건 이 몸에는 지나치게 과분해서 근처에 있지 않으면 사용할 수도 없으니까."

때문에 소녀를 곁에 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최대한 그의 방심을 유도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크리칼료프가 아니었다면 그녀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뻔했지만.

"벨카! 당장 나와! 그 녀석의 치료쯤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고. 해주면 되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이곳에 아가씨는..."

말이 통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헬레나가 인상을 찌푸렸을 때.

"거참 떽떽 때나 쓰고 네가 어린애냐? 고만  짖어!"
"커억!"


그녀의 곁에 서서 주드의 행동을 지켜보던 크리칼료프는 성가시다는 듯 앞으로 나서며 그에게 다가가 주먹을 날렸다. 숨을 토해내며 바닥을 구르는 주드를 내려다보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좋아한답시고 강제로 옭아매면 뭐. 정말로 좋아하게 될 줄 알았냐?  깨. 어디서 이상한 것만 보고 살았나."
"끄으, 그럴 리가 없어. 몬스터의 미약이라면."


주드는 바닥을 구르면서도 자신을 때린 그가 아닌 헬레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미약의 내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벨카에겐 내성이 없었다. 또한 많은 기록에서 많은 마녀들이 그렇게 인간들에게 굴복해왔다는 것을 알기에.

"오메, 아무리 몬스터의 미약을 사용했다지만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세상이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미쳐 있었구먼."

그의 말을 들은 크리칼료프는 기겁했다.


"마녀도 굴복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대체 왜..."
"미약만 썼겠냐? 폐인을 만드는 방법이었겠지!"

주드는 그제야 그를 바라보았다.

"뭐냐. 너는 대체 뭐길래."
"정신 차렸으면 네 꼴을 좀 봐. 마법이 없으면   할 수 있냐?"

크리칼료프는 쓰러진 주드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헬레나가 물었던 것과 같은 물음이었다. 그러자 빠득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주드에게서 들려온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내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니 온갖 잡것들이 다 짖어대는군.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갈 뿐인 꼭두각시들이...!"
"그려 그려, 꼭두각시라고 치자고. 그래서 넌 뭐냐고?"

주드는 바닥에서 일어나려 하며 주변을 살폈다. 벨카를 찾아야 했다. 마법을 캔슬하는 그녀만 붙잡을  있다면. 그러다 문득 그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어디에도 소녀가 없었다. 벨카가 근처에서 그의 마법을 없애고 있다면 약간이라도 괴로워하는 숨소리가 들려와야 할 텐데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벨카, 벨카는 어디에 있지?"
"하이고. 누가 들으면 우리가 나쁜 놈인 줄 알겄네.  번을 말혀? 여기 없다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마법사의 마법을 없앨 수 있는  마녀뿐... 이 아니었다. 같은 마법사 또한 같은 마법사의 마법을 없앨 수 있었다.  경우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겠지만. 이전처럼 벨카가 있었던 상황이라면 그녀가 마법을 사용할  없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근처에는 어디에서도 소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실은.


"네놈 설마."


그 또한 마법사라는 것이었다.


"이제야 눈치챈 거냐?"
"어째서 마법사가 또 존재할  있는 거냐?!"


주드의 말에 헬레나가 놀라 크리칼료프를 보았지만 그에게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왜? 세상에 마법사가  명만 있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잖아.  그래?"

크리칼료프의 말대로 세상에 마법사가 한 명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시대를 살아간 마법사들은 기록을 찾다 보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으니까.

"아니! 네놈이 마법사일 리가 없어! 네놈은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주드는 그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마법사가  명만 있으라는 규칙은 없었지만 동시대에 있을 수 있는 이들의 제한은 있었다. 특별한 마녀가 셋 존재하듯 마법사 또한 셋만이 동시에 존재할  있었던 것이다. 마법사는 서로가 서로에게 껄끄러운 존재였기 때문에 근처에 있다면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누가 차지했는가 또한. 이전에 누군가 잠시 두 번째로 마법사가 되긴 했지만 어쩐 일인지 순식간에 다시 사라져서 다시 공석이 되었는데.

이후로 누군가 또 마법사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정보가 들어오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또 다른 마법사의 존재라니 믿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내가 네 번째라는 거겠지"
"뭐?"
"어우. 사실대로 말한 거뿐인데 겁나 오글거리네."

그의 말에 주드가 말문이 막히건 말건 크리칼료프는 소름이 돋은 것처럼  양팔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래봤자 낡은 천을 쓰는 꼴이었지만.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는 거지? 금기를 어긴다는 건."
"딱히 또 다른 마법사의 존재가 금기는 아니었잖아?"

그건 사실이었다. 금기 중에 세 번째를 넘어선 또 다른 마법사가 있어선 안 된다는 사항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성기사가 어떻게 미약하게나마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닐 텐데?"
"...그렇군. 네놈은."


그때였다. 골목길 너머에서 발소리들이 들려온 건.


"멈춰라! 무슨 일이지!?"

그리고 골목으로 들어온 건 두 명의 캐트시였다.


"아무래도 이 양반이 다친 것 같아서 상태를 좀 보고 있었수."


크리칼료프의 태연한 말에 헬레나는 과연 주드가 넘어갈까 싶었지만.

"저게 사실입니까?"
"예. 이분들이 제가 다친 걸 봐주시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받아주는 그의 행동에 헬레나는 어떻게  일인지 알  없었다. 그들을 곤란하게 만들기 좋은 상황일 텐데 어째서. 캐트시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납득했는지 경계를 풀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이분은 저희들이 가까운 의료소까지 모실 테니 가시던 길을 가셔도 좋습니다."


그들은 어쩔  없이 주드를 부축하는 캐트시들을 뒤로하고 골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골목을 벗어나면 크리칼료프가 혀를 찼다.

"쯧, 더럽게 치밀한 놈이로구만."
"그자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렇게 봐야지. 이 기회에 죽여 놓으려 했거든. 위험한 놈이야 저거."

그의 말은 헬레나도 납득할 수 있었다. 주드는 그대로 두기엔 너무 위험한 자였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골목에  사람 더 있었어."

그 말에 크리칼료프가 그를 죽이지 못한 이유를 알  있었다. 그녀가 힐긋 자신들이 나온 골목을 살피면 그제야 쓰레기 더미 뒤에 낡은 모포에 몸을 최대한 감추고 있는 어린아이 하나가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위치에선 쓰레기 더미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랑 만나기 전에  꼬라지로 이 주변을 좀 돌아다녔던 모양이다. 그러니 저렇게 경비병들이 빨리 오지."


예기치 못하게 마주쳤다고 생각했던 그 상황은 사실 주드에 의해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헬레나는 떨리는 몸을 애써 추스르면서도 골목을 보았다. 그곳에는 주드가 부축을 받는 상태로 그들을 형형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풀릴 뻔한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고 크리칼료프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치워라."
""예.""


크리칼료프와 헬레나가 떠나가고 주드의 말을 들은 경비병들은 명령을 받은 것처럼 그의 말에 따라 손을 뗐다. 그는 경비병들이 만졌던 자신의 몸을 털어내며 이를 갈았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퍽퍽 발로 땅을 내려찍었다. 퍽퍽 골목길을 울리는 소리에 쓰레기 더미 뒤의 아이가 떨고 있다는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 동안 분을 감추지 못하던 주드는 겨우 진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이, 네 녀석."
"히끅!"


천천히 땅을 기어 도망치려던 아이는 딸꾹질 소리를 냈다. 그가 천천히 다가가자 공포로 얼어붙어선 움직이지도 못하고 떨고만 있는 아이를 보며 혀를 찼다.

"더럽군."


주드는 품에서 동화  전을 꺼내어 아이에게 던졌다. 아이는 그가 때릴 거라 생각했는지 몸을 한껏 웅크렸지만 자신의 몸에 부딪히고 나뒹구는 동화들의 모습에 어리둥절하며 그를 보았다. 그런 아이의 눈앞엔 어느새 주드의 손가락이 있었다. 손끝에서 이어지는 빛과 동시에.

"모두 잊어라."

그게 아이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아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의 주변에 널브러진 동화들의 모습에 의아해했지만 곧 신나게 동화들을 주워 골목을 벗어났다. 주드는 골목 벽에 기대어 서서 그런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의 그는 혼자였다. 경비들은 쓸모를 다했기에 돌려보낸 후였다. 그런 자신의 꼴이 비참하고 우스워 다른 말이 나오질 않았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물로 뒤집어쓴 피를 씻어내고 그대로 말리고 나니 언제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냐는 듯 멀쩡한 몸이 되었다.

"허무하군."

마법이란  유용했다. 이런 사소한 일부터 나라 하나를 없애버리는 것까지 자유자재인 누구나 원하는 그런 힘인데. 그에겐 이런 허울 좋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마저 벗어난 골목에는 쓰레기 더미만 나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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