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멈춰버린 발걸음.
"아가씨도 좀 씹을 텨?"
그녀가 바라만 보고 있으니 크리칼료프가 물었다.
"헬레나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보다 나뭇잎을 씹는 이유가 있습니까?"
"양치질 대용이지 뭐."
"양치질?"
헬레나는 그들의 옆으로 다가가 그들이 씹던 맹그로브 잎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잎에 하얀 알갱이 같은 것들이 묻어나는 모습에 혹시나 싶어 알갱이를 떼어내 맛보자 짠맛이 입안에 퍼졌다.
"소금?"
"맹그로브 나무는 뿌리로 물을 빨아들이고 남은 염분을 잎으로 배출하니 가능한 거지."
소금물로 이빨을 닦아 소독하는 행위는 꽤나 흔한 일이었다. 드넓은 황야의 모래에는 소금이 많이 섞여 있기에 그것을 물에 섞어 흙과 분리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맹그로브 잎에서 따로 소금이 분비된다면 그런 번거로운 작업도 필요 없으리라.
"이곳에는 신기한 생물이 많군요. 식물이 소금물에서 자라는 것만으로도 신기한데. 소금까지 이렇게 구할 수 있다니."
헬레나는 그것으로 납득하고 맹그로브 잎을 입에 물었다. 맹그로브의 씁쓰레하면서도 짠맛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만 같았던 비릿한 냄새를 지워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제 꼬치를 샀던 가게에서 꼬치를 맹그로브 잎에 싸서 굽던 가게의 방식을 떠올렸다. 잎의 향을 입혀서 잡내를 없애려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맹그로브 잎을 씹다 뱉어낼 무렵 나우시카가 말을 걸어왔다.
"헬레나 언니는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했죠?"
"그렇습니다만."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헬레나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러자 나우시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타다닷 그녀에게 달려왔다.
"역시! 아저씨가 어제 오자마자 한탕 했다며 자랑하면서 란투아의 금화를 보여줬었는데! 언니 거 맞죠?!"
"예."
그새 그런 걸로 자랑이나 했냐는 생각이 들어 그녀가 크리칼료프를 보면 그는 맹그로브 숲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와! 여기 살면서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란투아는 처음이에요!"
그야 처음일 수밖에 없으리라. 란투아가 원래 파르즈와 같은 구역에 속했던 나라라는 것조차 아는 이들이 몇 없었는데.
"거기는 보통 어떻게 생활해요? 아니면 어떤 생물이 살아요?"
재잘거리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하는 나우시카가 헬레나는 곤혹스러웠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는 그녀를 더욱 부담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딱히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특히 자신 보다 어린아이들이라면 그녀는 더욱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나우시카는 여인이라 부르기에 충분해 보였지만 아직 풋풋함이 많이 남아있었다. 헬레나가 무심코 쏘는 듯한 말이 나가지 않도록 고르고 있으면 또 다른 질문을 하는 통에 차마 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후암. 헬레나?"
막 잠에서 깨어났는지 눈을 비비는 벨카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뒷마당으로 나온 것이다.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소리가 들려서."
아무래도 그들의 목소리가 제법 컸던 모양이다. 때문에 나우시카의 호기심은 곧바로 벨카에게 옮겨져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너는 이름이 뭐야? 너도 란투아에서 온 거지!"
"?"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나우시카의 모습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던 소녀는 곧 차분하게 답했다.
"나는 벨카야."
"내 이름은 알지? 나우시카야! 그런데 너랑 헬레나 언니만 혹시 특별한 화장품을 쓰고 있는 건 아니지? 막 란투아만의 화장품이라던가!"
"나랑 나우시카에게 그런 건 조금 이르지 않을까?"
"콜록! 안 쓰는 건 알겠으니까. 요프 아저씨랑 똑같은 말은 하지 마! 쬐끄만한 게!"
어제 만난 후로 못 했던 말들을 쏟아내기라도 하듯 계속 이어지는 나우시카의 말에 벨카가 답해주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맹그로브 숲만 보고 있던 크리칼료프가 헬레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앞으로 어찌할 겨? 어제 그 녀석은 때려눕히고 오긴 했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소녀들에게 닿지 않도록 작게 줄어 있었다.
"우선 어셔 님의 병세가 낫는 것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도 웬만하면 말도 하지 않겠는데. 어쩌다 하필 그 새끼한테 물린 겨?"
크리칼료프의 말에 헬레나는 역시 그에게 무언가 있음을 느꼈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는 없었지만 사내는 자꾸만 형언할 수 없는 위화감을 주었다. 그들의 대화가 멈춘 사이 나우시카의 목소리가 끼어들듯 들려온다.
"아, 맞다! 너도 맹그로브 잎으로 양치질해 봤어?"
"여기선 양치질을 그런 식으로 하는 거야?"
"아니! 그냥 요프 아저씨가 편하대서!"
벨카는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순순히 맹그로브 잎을 물었지만 헬레나는 크리칼료프를 휙 돌아보았다.
"오우, 밥 먹을 시간이구먼! 나우시카! 밥 줘!"
"아저씨가 알아서 차려 먹어!"
"정말루?"
"으이그, 그냥 내가 할게."
나우시카가 무언가 안 좋은 것을 떠올렸는지 새하얀 안색으로 여관 안으로 돌아가고 헬레나는 머리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얼렁뚱땅 한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손님도 그녀들 밖에 없는 상황에 굳이 떨어져서 앉는 것도 어색하긴 했지만 헬레나는 의아하게 물었다.
"분명 밥값은 따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히히! 너무 비싼 음식만 아니라면 서비스 정도는 가능하다고요? 대신 이야기를 많이 해줘야겠지만?"
정말 그런 걸로 괜찮을까 싶어 크리칼료프를 보면 그는 괜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뭐, 어때. 어차피 손님도 없고 타지 사람 이야기 듣는 게 취미인 녀석이라. 그리고 이거 내가 쏘는 거다."
"돈 낸 적 없으면서!"
"이 가게 차려준 게 누구더라?"
"죄송합니다앗!"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참 허물이 없었다. 마치 가족처럼. 호칭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크리칼료프는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해도 인간처럼 보였고 나우시카는 하피였다. 헬레나는 굳이 깊게 파고들지는 않기로 했다. 그들에겐 그들만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자! 특제 바클라잔 파이 나왔습니다!"
"고기는 안 들어갔냐?"
"오늘은 뺐어!"
사실 헬레나는 그녀가 주방에 들어가기 전에 벨카가 육류를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려고 했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건 벨카에게 들었어요! 오는 사람마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거든요!"
생각보다 능숙하고 똑 부러지는 소녀였다.
"에잉, 아침부터 일하러 가는데 좀 든든한 건 안 되냐?"
"그래서 아저씨 몫으로 하나 더 만들어줬잖아."
확실히 그녀들이 파이 하나를 나눠 먹는데 반해 크리칼료프의 몫은 한 조각하고도 파이 하나가 더 있었다.
"끙, 야채는 에너지 효율이 안 좋단 말이다."
"또 이상한 소리. 야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러는 거야?"
그들의 투닥거리는 모습을 배경 삼아 헬레나가 파이 한 조각을 찍어보았다. 파이의 내용물은 겹겹이 쌓인 바클라잔을 중심으로 붉은 소스가 들어있는 형태였다. 그대로 한 입 먹으니 살짝 매콤한 향이 가미되어 있는 새콤달콤한 맛과 함께 달짝지근한 바클라잔과 빵 조각이 씹혔다. 특히 허브처럼 쓰인 맹그로브 잎은 생각 이상으로 잘 어울렸다. 아무래도 바클라잔은 가지였고 붉은 소스는 토마토소스인듯했는데. 헬레나는 조용히 감탄했다.
"훌륭하군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오랜만입니다."
주드와 있었을 때도 진미라 불릴만한 음식을 먹을 수는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그 맛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자와 함께 있다면 아무리 값비싼 진미라도 퇴색되기 마련이었으니까. 오히려 게워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흐흥! 아저씨도 들었지? 내 솜씨가 이 정도라고! 그러니까 불만 없이 먹어!"
"그냥 내가 주방 쓰면 안 되냐? 역시 효율이 안 좋은데."
"그, 그만둬! 아무리 고기가 좋다지만 그런 것도 고기라고 말하고 먹을 수 있는 아저씨가 이상한 거라고!"
다시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우시카의 시선은 곧 아무 말 없이 파이를 오물거리던 벨카에게 향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우리 아기 토끼의 평가는?"
"아기 토끼라니..."
"토끼라고?"
나우시카를 제외한 모두가 의아하게 보고 있으니 그녀는 뭐가 문제냐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왜? 생긴 것도 그렇고 식성도 그렇고 무해한 게 딱 아기 토끼잖아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벨카를 보고 긴가민가 하는 그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우시카는 이미 결정한 듯 밀어붙였다.
"그래서 맛은 어때?"
"응, 맛있어."
"좋아! 다수결로 아저씨의 의견은 기각! 모자라면 더 만들어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아기 토끼?"
그러고선 주방으로 향하는 나우시카를 바라보는 소녀의 중얼거림이 뒤늦게 울렸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돌아온 뒤에도 벨카에게 또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소녀는 그에 답해주느라 의문을 해결할 기회는 없었다.
"란투아에는 난쟁이들도 많이 산다며?"
식사가 끝나고도 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 듯했지만.
"미안해. 지금은 가야 할 곳이 있어서."
그녀들은 어셔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야 했다. 제레미아라는 자가 잘 돌봐줄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럼에도 벨카가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게 보였으니까. 일단 짐은 두고 가도 상관없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돈은 챙겨둔 상태였다.
"힝, 그럼 나중에 이야기 더 해줘."
나우시카는 그녀들이 잠시 나간다는 말에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곧 여관 앞에서 크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저씨, 잘 다녀와! 오는 길에 맛있는 거 사 오는 거 잊지 말고!"
"오냐!"
"왜 따라오시는 겁니까?"
크리칼료프가 그녀들의 옆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모습에 헬레나가 묻자 그는 등에 맨 지게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긴 뭐여. 일하러 가는 거지."
"파르즈의 내성은 반대편입니다만."
"물고기부터 잡아가야 하잖아. 겸사겸사 호위해 주겠다는 거 아니여."
분명 순수한 호의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왜 이렇게 수상쩍은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항상 낡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있어서 맨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답답하고 불편하지도 않은지 그녀들과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낡은 천들을 둘둘만 모습으로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음식을 먹을 때조차도. 그리고 그건 헬레나가 보기에 무척 수상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습관이었다.
"...혹시 당신은 기사입니까?"
"허?"
처음으로 크리칼료프는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야 그랬다. 철저할 정도로 몸을 보호할 무언가로 감싸고 있는 모습. 그런 상태로도 큰 불편함 없이 일상생활을 하는 것은 단순한 용병이나 싸움꾼이 아니라 언제든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된 군인의, 그것도 기사의 것이었으니까.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이미 제레미아의 움막이 있는 한구석까지 와 있는 것을 눈치채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한때는 그랬지."
"한때라면?"
"이젠 나도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몰라서 자세히는 못 말해주겠다."
그러면서 그는 말없이 제레미아의 움막으로 걸어갔다. 수상쩍다고만 생각했던 그가 보이는 등에 헬레나는 그 이상 무어라 할 수 없었다. 기사라면 한 사람만으로도 전투 병기에 가까운 정예병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자가 뭣하러 모습을 감추고 장사꾼 노릇이나 하고 있는지 알아볼 용기가 그녀에겐 없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그 꼬마 아가씨랑 같이 그 꼬마를 간병하려던 게 아니었나?"
하지만 헬레나는 벨카를 어셔가 있는 곳에 데려다준 뒤 크리칼료프와 동행하고 있었다. 그의 등에는 나뭇가지를 엮어만든 커다란 통발이 여러 개 있었는데 한 마리를 제외하곤 전부 드바야카였다.
"아직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으니까요."
"난 누구랑 사귈 마음이 없는데."
"그에 대해선 걱정 마시길 당신에겐 그런 쪽으로 조금의 관심도 없습니다."
그와 헬레나는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조지, 오늘 햇살은 어때?"
"살이 구워지는 느낌이다. 자식아."
검문소에 도달했을 때 이전에 만난 경비병을 만나서 잠시 대화를 멈춰야 했지만.
"그 하녀는 어제의?"
"어찌어찌 동행하게 돼서 말이다."
"으음, 문제가 되면 곤란한데."
"이봐 왜 그러시나 오늘 딱 한 마리 걸렸는데 볼 텨?"
"이건...!"
헬레나가 지나가지 못할 뻔하긴 했지만 크리칼료프가 드바야카 사이에서 유일하게 잡힌 테브라니가 담긴 통발을 그에게 슬쩍 건네주는 것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식으로 검문을 넘깁니까?"
"캐트시는 테브라니에 환장하니까. 그리고 믿을만한 친구고."
그들은 검문소를 통과하고 말없이 도시를 걸어나갔다.
"그런데 그 녀석이 혈안일 텐데 정말 이곳까지 와도 괜찮겠냐?"
"예, 이미 각오한 일입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물었고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마침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인물과 마주쳤다.
"당신이 저 자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앞에는 피를 뒤집어쓴 듯한 몰골로 벽을 짚고 있는 주드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