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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화 〉멈춰버린 발걸음. (177/220)



〈 177화 〉멈춰버린 발걸음.

결국 그는 크리칼료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더 많은 금화를 내놓아야 했다. 덕분에 이득을 볼 수 있었기에 헬레나는 도움을 받은 보답으로 그녀의 몫을 환전할 때 보수와는 별개로 란투아의 금화를 하나 환전하지 않고 팁 삼아 주었는데.

"우효! 금화 하나를  개로 교환할 수 있다니. 쩌는구먼!"
"...어쨌든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래저래 수상한 남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기에 헬레나는 감사를 전했다.

"됐네 됐수!  안내 좀  주고 이런 금화까지 받으면 남는 장사지!"


그리곤 앞장서서 흥겹게 걸어가는 크리칼료프의 모습에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행동을 이대로 더 지켜보았다간 의문을 해결할 의욕조차 사라질 것만 같아서 애써 의구심을 끌어모아 입을 열었다.

"저희에게 이렇게 도움을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엉? 갑자기 뭔 소리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는 그에게 헬레나는   없는, 비틀린 감정마저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흑목병을 치료할  있게 도와주신 건 감사합니다. 그 남자로부터 저희를 구해주신 것도 당신이겠죠."


무례한 말일 수도 있다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묻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저희의 편의를 봐주시는 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방금 환전소의 일도 그랬다. 그대로 두었다면 환전소의 남자가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을지언정 실제로 그녀들에겐 손해랄 것도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남의 일이라면 신경 쓸 것도 없는 일이었는데도.

"거참 아가씨도 복잡하게 사는구먼."

크리칼료프는 그녀에게서 받은 금화를 보이며 말했다.

"란투아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
"구름 지대를 건너기 쉽지 않다는  누구나 안다고."

그렇기 때문에 공통으로 쓰이는 철전을 제외한 란투아의 화폐가 이곳에서 비싸게 쳐주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이득을 볼 수 있는데도 시도하는 녀석들이 얼마나 있어?"
"어째서 그런 이야기가..."
"아무도 없지. 아무리 돈에 눈이 멀어도 목숨 아까운 건 알거든."

그러나 그는 헬레나의 말을 듣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말처럼 쉬운 일이었다면 누구나 구름 지대를 오가며 돈을 불리려 했을 것이라며.

"그런데도 구름 지대를 건너왔다는 건. 그만큼 절박했다는 거겠지.  그래?"
"...."
"그걸 감수하고서 구름 지대를 건너온 사람들의 노력을 야박하게 무시할 수는 없잖아."

헬레나는 그의 말에 무어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마법사의 힘이 아니었다면, 주드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구름 지대를 건너지 못했을 수많은 이들 중 하나였을 뿐인데. 그의 말 하나하나에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숨통을 조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말인데. 한몫 두둑이 챙긴 김에 저것 좀 사줄  있겠수?"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지는 크리칼료프의 말에 그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태연하게 꼬치를 구워 팔고 있는 노점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여덟 개는 가면서 먹고  개는 포장으로다가."


심지어 요구 사항까지 자세한 그의 말에 헬레나는 그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한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철전 2전과 동화 6전으로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는 값이었기에 부담 없이 살 수 있었지만 그녀의 허탈감과 부끄러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음, 역시 직화 소금구이가 최고로구먼!"

손가락 사이마다 꼬치를 쥐고선 그대로 감상평까지 늘어놓는 그를 보고 있으니 그녀는 혼자 심각했던 자신만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얼굴도 두터운 천으로 가리고 있으면서 대체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지만 꼬치들을 빠른 속도로 먹어치우는 그를 계속 따라가니 그녀들은  주변에 비해 꽤나 큰 건물 앞에 섰다.

"냉큼 들어오시오."


크리칼료프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헬레나는 천천히 따라 들어가며 소매를 확인했다.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으아, 피곤해."

진한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텅 빈 홀 안에서 책상 위에 엎어져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핏 보면 평범한 인간으로 보였지만 엎드려 있는 그녀의 등에서 파닥거리는 커다란 회갈빛의 날개가 하피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크리칼료프는 그녀를 향해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배부른 투정이구만 이 근처에서 너만큼 돈을 버는 식당  여관 주인이 어디 있냐?"
"하지만 피곤한 건 피곤한... 또 언제 왔어!?"
"난 분명 정문으로 들어왔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꼬치가 포장된 나뭇잎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 청풍에서 사 온 거다."
"좋아하는 거긴 한데. 소금구이 맞지?"
"그려 그려."

그제야 그녀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포장된 꼬치를 하나 꺼내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음~ 이 맛이야! 맹그로브 향까지. 확실해!"

헬레나가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해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으니 꼬치를 우물우물 씹던 하피 소녀가 그제야 그녀들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저씨, 언제 나 몰래 바깥 살림이라도 차린 거야?"
"에라! 요 녀석이!"
"악! 왜 때려!"
"손님이다! 손님! 그리고 누굴 유부남으로 만들어!"
"그럼 말로 하면 되잖아! 말로 하면!"

한동안 투닥거리던 크리칼료프가 하피 소녀의 머리를 꾹꾹 누르듯 쓰다듬으며 소개했다.


"아무튼 여기 주인인 나우시카다. 그리고 니가 먹는  꼬치도 사준 분들이니까. 감사 인사도 확실히 하고."
"내가 알아서 소개할 테니까! 이것  놔!"

간신히 그의 쓰다듬에서 벗어난 나우시카는 큼큼 헛기침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들에게 말했다.

"어서 오세요! 혹시 식사하러 오신 건가요? 아니면 묶을 곳을 찾으러?"
"당분간 머무를 곳이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만."
"그럼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두 분 맞죠?"
"넓은 방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작은 동물처럼 순한 눈망울을 반짝반짝 빛내며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이 헬레나에겐  부담스러웠다.


"네~ 그럼 안내해드릴게요."
"그려. 어여 안내해드려라. 나도  쉬어야지."


크리칼료프는 나우시카에게 그녀들을 넘기곤 책상 하나에 털썩 퍼질러 앉았다. 헬레나가 그의 모습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나우시카가 손짓한다.

"손님!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를 따라서 2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지나 도착한 방.

"이 방은 어떠세요?"

그녀가 보여준 방은 이전에 주드와 함께 머무른 여관의 방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깔끔하게 잘 정리된 모습이 헬레나의 기준에서도 좋은 방이었다.


"1박에 얼마 정도입니까?"
"1박에 철전 1전이에요! 근처에 비하면 비싸지만 훨씬 깔끔하다고요?"

웬만큼 비싼 여관이 아니라면 이렇게 관리를 하는 곳이 드물었기에 묻자 자신감 넘치게 답하는 그녀. 혹시나 했었지만 크리칼료프는 정말 좋은 여관으로 안내해  것뿐이었던 듯했다. 헬레나가 간신히 안심하며 사흘  값을 내밀자.

"예~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꼬치 잘 먹을게요!"
"...예."

딱히 그녀가 원해서 산 것이 아니라 떨떠름했지만 간신히 답했다. 그렇게 그녀들을 방으로 안내한 나우시카가 문을 열고 나가려다 깜빡했다는 듯 휙 하고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맞다! 식사는 따로 제공이니까. 식당에 내려와서 드시거나 다른 곳에서 드시면 돼요! 추천 메뉴는 구사크 통구이니까! 한 번은 꼭 드셔 보세요!"

그리고 한쪽 눈을 찡긋거리곤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이내 방을 나갔다.


"피곤해?"


활기찬 모습이 보기 싫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진이 빠지는 것 같아 헬레나가 한숨을 내쉬면 벨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아무래도 피로가 쌓인 것 같습니다."

원하지도 않는 자의 정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몰래 밤을 새워가며 어셔의 상태를 살펴야 했기에 그녀는 주드와 함께 지내면서 단  번도 깊은 잠에 빠질 수 없었다. 설령 잠이 든다고 해도 그 남자와 자신이 살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소름 끼쳐서 곧바로 깨버리기 일쑤였다.

"아가씨는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건 헬레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가 깨어나 있을 때마다 깨어있는 벨카와 눈을 마주쳤으니까. 서로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응, 하지만 잠이 오질 않아서."
"그렇군요."


헬레나는 간단하게 챙겨온 짐을 침대 아래로 대충 정리해두고 벨카의 옆에 앉아 쓰게 웃었다. 이런 좋지 않은 감정마저 그녀가 알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는데.  모든  자신이 모자란 탓이라는 생각에 헬레나가 조용히 괴로움을 묻으려 했을 때였다.


"고마워."
"아가씨?"


벨카의 말이 들려온 건. 헬레나가 놀라 소녀를 보면 물기를 가득 머금은 금빛이 그녀를 마주쳤다.

"헬레나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그리곤 작은 손길이 그녀의 볼을 쓸어주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깨지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손길에 되려 헬레나가 그녀의 손이 부서질까 두려울 정도로.

"그리고 미안해. 그런 괴로운 일을 겪게 만들어서."


헬레나는 소녀의 말에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저 당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그녀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전에 먼저 울음이 되어 빠져나가버렸으니까.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벨카는 제 무릎에 눕혀주었다. 방문 앞으로 다가왔던 발 소리가 다시 멀어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시간이 흘러갔다.

"여기 있었구나."

어김없이 찾아온 밤. 소녀의 목소리가 여관의 뒷마당에서 조용히 울렸다.

"그 아가씨의 위로는 다 해준 겨?"

그곳에는 크리칼료프가 여관에서 빼내온 듯한 의자에 앉아 별과 달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관의 뒷마당은 적당히 넓으면서도 하얀 건물과 모래가 달빛과 별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서 밤인데도 그리 어둡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여관 또한 변방에 위치한 곳이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맹그로브 나무들의 군집이 보였지만 낮에는 여러 가지 소리에 섞여서 들을 수 없었던 작게 물이 흘러가는 소리와 함께 맹그로브 숲에서 살아가는 이름 모를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잘 모르겠어. 위로가 되었다면 다행이지만."
"그러냐."

약간의 침묵 끝에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벨카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니 알겠어. 역시 당신이  번째였구나."
"흠, 오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거냐?"


영문을 알  없는 소녀의 말에도 그가 알아들은 듯 되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단지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허어?"

그가 놀라 벨카를 돌아보았을 때 이미 그녀는 뒤돌아 여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거 참. 마녀에게 감사 인사를 듣다니. 오래 살고  일이구만."

인간을 원망하다 못해 증오해도 마땅할 소녀에게 감사의 말을 듣는다는 건 꽤나 신선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그도 여관으로 돌아갔다.


"으음, 아가, 씨?"


헬레나가 눈을 떴을  자신의 앞에 잠들어있는 벨카를 마주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렇게  잔 것이 얼마 만일까? 몸을 누르는 잠기운마저 낯설어서 그녀는 오히려 잠에서 쉽게 깨어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면 어제 크리칼료프의 안내를 받아 왔던 여관방의 모습이 새벽빛을 받아 어렴풋하게 윤곽을 보였다. 분명 낯선 공간이었지만 끈적한 공기로 무겁거나 후덥지근하지 않고 몸이 끈적거리거나 배가 더부룩하지도 않았다. 대신 조금 습하고 차가운 새벽의 공기가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이 낯선 공기와 방이 왜 이렇게 그립게 느껴지는지 이유는 확실했다.


"...정말 그에게서 벗어난 거군요."

아직은 두고 볼 일이었지만 지금  느낌을 더 만끽하고 싶어서 헬레나는 추위에 몸을 웅크린 소녀에게 자신이 일어나며 흐트러진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발이 가는 대로 걷다 도달한 뒷마당에서 발견한 건.

"엉? 일어났수?"
"...."

맹그로브 나무의 잎을 생으로 뜯어 먹고 있는 크리칼료프였다. 헬레나가 무어라 할 말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사이 그녀의 옆으로 또 다른 그림자가 불쑥 지나갔다. 그녀는 이곳의 주인인 나우시카였다.


"후아암.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저씨. 나도 좀."
"그려. 여기 따놨다."
"땡큐."


그리곤 그와 함께 나란히 맹그로브 잎을 씹는 모습에 헬레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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