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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화 〉멈춰버린 발걸음. (176/220)



〈 176화 〉멈춰버린 발걸음.

"그런데 란투아에서 왔다고 했었나? 이상하군. 캐트시는 분명 파르즈에만 사는 종족일 텐데."

제레미아가 물었지만 헬레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말하고자 하면 그간의 일들이 악몽처럼 떠올라서 차마 입을 열  없었다. 그때 입을 연 것은 그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크리칼료프였다.


"이번에 태자가 귀환했잖냐."
"그랬지. 그런데 그게 지금 무슨 상관... 설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던진 그의 말에 제레미아는 뒤늦게 알아차렸는지 그들을 보았다.


"태자가 란투아에 있었나?"
"시기상으로 보면  맞지. 캐트시들이 직접 나서서 태자를 찾아 헤맸는데도 오랫동안 찾지 못했었잖아."
"구름 지대 너머에 있어서 찾을 수 없었던 건가."

제레미아는 턱을 쓰다듬으며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너희가 왕족을 데려왔다는 건데. 흑목병에 걸리다니. 원한을 살만한 짓이라도 저지른 건가?"

그건 헬레나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어셔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로서 그의 상태를 보았던 것뿐이니까.


"그런 건 나중에 물어봐.  사람도 기절했다 깨어난지 얼마 안 됐어. 그리고..."

크리칼료프가 말을 끊고 벨카를 눈짓하자 제레미아는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통하기라도 한  침묵하던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런 거였나."
"뭐, 그런 거다. 그리고 제법 어렸을 때 납치당했잖아. 조절하는 법도 몰랐겠지."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다시 찾아와."

헬레나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끝난 대화였지만 지금은 그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럼 어셔는..."

벨카가 걱정스러운 듯 어셔를 보았지만 제레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환자는 맡겨 두고 가라. 오랫동안 앓아서 몸이 많이 상한 상태에다가 적어도 하루 동안은 지켜볼 필요가 있어."


벨카는 발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지만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헬레나 또한 소녀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눈부신 빛이 눈을 찌른다. 오늘 하루만 해도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늘은 여전히 화창하게 태양을 내리쬐고 있었고 하얀 사막은 그런 햇빛을 받아 빛을 반짝였다. 방금 어셔를 치료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헬레나."

그녀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자 벨카가 옷깃을 잡아당기며 부른다.


"쉴 곳부터 찾아보자."
"...그래야겠죠."


헬레나는 소녀의 말에 동의했다. 아직 주드에게 졸린 목이 빠질 듯이 아팠고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당장이라도 지친 몸을 뉘고 싶었으니까.

"쉴 곳을 찾는다면 내가 좋은 곳을 아는데 데려다주랴?"

그녀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느지막이 따라나온 크리칼료프가 말했다. 혹시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하다가도.

"그전에 여기까지 데리고 온 보수만 좀 줘봐. 좋은 일 해주고 돈 받는 것도 그렇긴 한데. 오늘은 장사도 접은 탓에 안 받으면 야단맞는다고."


소심하게 그녀들을 데리고 온 보수를 요구하는 모습에 김이 새어버렸다.

"응, 당연한 일인 걸."
"이전의 거스름돈도 있었으니. 금화 2전에 은화 4전이다."

벨카가 마차에서 돈을 가져와 내밀자 그는 받아들어 보더니.

"엉? 너희 아직도 환전을 안 한 거냐? 드바야카를 사갔을 때도 그랬지만 금화랑 은화가 다른데."
"워낙 정신이 없던 터라."


그의 말에 헬레나는 자신들이 환전을 깜빡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계속 주드에게 붙잡혀 있었으니. 철전은 무게만 재면 그만이라 환전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들고 다니는데 불편한 것이 사실이라 무게를 줄이기 위해 들고 왔던 금화와 은화는 환전할 필요가 있었다.


"가는 길에 환전소가 있으니까. 거기서 환전해서 달라고."
"마차는..."
"그냥 놔 둬. 어차피 변방이고 누가 간 크게 힐디스비니가 지키는 마차를 건드리려 하겠냐?"

그렇게 그녀들은 간소한 짐과 돈만 챙겨 크리칼료프를 따라 동행하기로 했다. 다만 그전에 헬레나는 벨카가 낯익은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그 로브는."
"응,  자의 거야."
"우선 옷부터 제대로 된 것으로 갈아입혀드리겠습니다."

잠시 마차 안에서 벨카의 옷을 갈아입혀준 그녀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로브를 곧장 태워버렸다.

"워매. 어지간히 원한이 깊은가 보구먼."
"시답잖은 소리는 그만두고 안내하시죠."
"예이. 냉큼 따라오시오."

정말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었던 것일까? 주변에는 그녀들이 파르즈로 올 때 보았던 것과 같은 맹그로브 숲이 우거져 있었다. 따로 마련된 벽조차도 보이질 않아서 헬레나는 불안하게 움집을 돌아보았다.


"정말 이런 곳에 맡겨도 상관없는 겁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물이 닿는 곳만 아니라면 생각보다 안전한 편이니까."

그의 말에 주변을 살펴보면 확실히 제레미아가 있던 움집은 물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맹그로브 나무들과 절묘하게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힐디스비니가 몬스터가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지만. 헬레나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크리칼료프가 말을 잇는다.

"파르즈의 근처에서 자라는 맹그로브 나무는 몬스터가 싫어하는 성분을 만들어 내니까 별로 문제는 안 돼."

파르즈의 벽이 터무니없이 부실한 건 그런 이유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경비병들이 몬스터들이 쳐들어왔다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를 전부 방지할 수 있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축제 전에 몬스터들을 처리하기 위해 토벌령을 내릴 필요도 없었을 터였다.

"파시틸라 무리들을 봤나 보구만. 그 녀석들은 좀 예외지."

수생 몬스터라서 맹그로브 나무가 공기 중에 내뿜는 성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도 있지만 내성이 있다는 모양이다. 덕분에 파르즈의 주변에 서식하는 거의 유일한 몬스터였지만 대신 그 수가 어마어마해서 수로에 숨어든다면 난리가 난다는 모양이었다. 물의 도시라 불릴 만큼 물이 많은 파르즈라 오히려 그것만으로도 감당이 힘들다고.


"그 녀석들만 제외한다면 따로 몬스터들을  기억은 없지 않냐?"

그러고 보면 파르즈로 올 때까지 시도 때도 없이 만났던 아머드 크리켓을 비롯해 온갖 몬스터들을 이곳에 온 뒤로 본 적이 없었다. 땅을 기어 다니는 몬스터는 그렇다 쳐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몬스터들도 보이질 않는군요."


지금까지 하늘을 통해 도시로 날아드는 몬스터조차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란투아에서 쳐들어왔던 몬스터들은 대부분 비행이 가능했기에 생소한 느낌마저 들었다.


"맹그로브 나무가 방벽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지. 대신 동물들이 더 흉악하다는 게  흠이다만."
"동물들이 말입니까...?"

헬레나가 그의 말에 의문을 느끼는 것도 잠시.


"그런 건 나중에 알아서 알아보고 지금은 얼른 환전소나 가자고."

그의 뒤를 따라 마을에 들어서자 이곳저곳에서 시선들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벨카는 이미 가면을 쓰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들의 외모 때문에 시선을 받는 일은 많았지만 이번 시선은 그보다는 어딘가 호기심에 가까운 느낌이다.

"보는 눈이 많은 것 같습니다만."

 시선이 낯설면서도 지나치게 관심을 받는  같아 헬레나가 물으니 그는 어쩔  없다며 말했다. 파르즈는 먼 옛날 본래 사막의 모래바람과 몬스터들을 피하기 위해 그나마 적합한 곳에서 땅을 파내고 벽을 깎아내어 캐트시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도시라고 한다. 특히  지역은 소금물일지언정 물도 풍부하고 몬스터들을 막아주는 맹그로브 숲과 여러 나라의 교역에 유리한 위치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도시로 발전해 나갔다고.

"여긴 저 안에 비하면 살짝 늦게 지어진 도시라서.  이유가 뭔지   같냐?"


그녀는 크리칼료프가 이곳에 오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추방자입니까?"
"그렇지. 이곳 사람들의 대부분은 추방자들의 후손이라는 말도 있다고."

본래 캐트시들이 자리 잡은 곳이었던 이곳을 탐내는 이들은 많았다. 대체로 인간들이 그랬다. 캐트시들은 그런 그들을 자신들이 다루는 병을 이용해 그들을 추방하며 보금자리를 지켜왔다. 그 외에도 정치적인 이유로 추방되는 일도 많았다. 그래도 치료제가 되는 약초가 파르즈에서 자라고 있었기에 죽음은 면할 수 있었지만 안으로 돌아갈 자격을 잃고 떠나거나 이곳에서 자리 잡아  다른 도시가 만들어졌다는 듯했다.


"그 외에도 갈 곳을 잃은 다른 종족이나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이렇게 또 다른 도시가 만들어진 거다."


그래서일까? 여태까지 그녀들이 지냈던 파르즈의 안쪽과는 어딘가 다른 느낌이었다. 건물들이 전부 하얀 건 똑같았지만 안쪽의 건물들이 흔한 틈 하나 없이 매끈한 모습의 건물들이었다면 이곳의 건물들은 벽돌을 만들어 쌓은 듯 틈과 벽돌의 무늬가 선명했다. 대체적으로 낮은 건물들에는 유리 대신 천막으로 창문을 가리거나 그늘을 만들어  곳도 많았다. 그나마 건물의 색과 그 건물을 뒤덮는 포도 덩굴들이 이곳이 같은 파르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나 같은 놈이랑 다니면 또 어떤 신입이 왔나 하고 구경하는 거지 뭐."
"꽤나 불쾌한 이유군요."
"어쩔 수 없어. 이곳 사람들의 뿌리 깊은 자격지심 같은 거니까."

그러다 그들 도착한 곳은 커다란 건물 앞에 간단한 천막을 치고 그 아래 간단한 테이블과 의자를 둔 남자가 있는 곳이었다. 란투아의 안쪽 영지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지만 대부분의 환전소는 이런 느낌이었다.

"환전을 하러 왔는데."

크리칼료프가 환전소의 남자에게 그렇게 말하며 그녀들에게 양보하듯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다가서는 그녀들을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인 그는 테이블 아래쪽에서 주머니 두 자루를 꺼내들었다.


"환전에는 약간의 수수료가 포함되는데. 괜찮으십니까?"
"예, 상관없으니 액수에 맞게 환전해 주십시오."

헬레나가 금화와 은화를 따로 테이블에 쏟아내자 그는 잠시 금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움찔 이마를 꿈틀거렸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라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은화까지 자세히 살핀 그는 한 번씩 무게를 재고는 아무 말 없이 금화와 은화를 쌓아가며 센다. 얼마 지나지 않아 10개 단위로 탑을 쌓은 그가 이어서 이곳의 금화로 보이는 것을 꺼내어 엇비슷한 숫자를 쌓고 은화를 꺼내려 했을 때였다.

"얼씨구. 어디서 수작질이여?"

크리칼료프가 낡은 천에 둘둘 말린 투박한 손으로 그의 손목을 붙잡지 않았다면 말이다. 바람이 일 정도로 거칠게 부여잡은 탓에 그의 손에서 떨어진 은화가 테이블 위를 굴렀다.

"끄으윽!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왜 지금 은화를 꺼내냐는 말이지."


헬레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다시 한번 직원이 꺼낸 금화와 그녀들의 금화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숫자는 이곳의 금화가 약간  적었지만. 보통 나라 간의 금화나 은화는 환전할  혹시 모를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긴 차익은 환전을 하는 이에게 돌아가겠지만 어쩔  없는 구조였으니까.

"숫자는 엇비슷합니다만 이 정도면 수수료에서 떼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손님분의 말씀대로 뭐가 잘못되었다고 이런 짓을."


그러자 그는 옳다꾸나 맞장구치지만 크리칼료프는 그의 손목을 여전히 붙잡고 놓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그렇겠지. 보통이라면. 이게 란투아의 화폐만 아니었다면 말이야."
"그게 뭐가 대수라고...!"
"대수지. 무려 구름 지대 너머의 화폐인데."


그 말에 헬레나는 간신히 깨달았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될 일이었는데. 보통이라면 위와 같은 규칙이겠지만 구름 지대 너머 교류하기도 힘든 나라의 화폐라면 그 가치가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내가 환전소 일을 하는 녀석 중에 아는 녀석이 있어서 이거랑 같은 은화를 환전한 적이 있단 말이지."

그런 화폐라면 호사가 사이에서도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구입할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익은 철저히 계산하는 녀석인데도 은화 두 개를 금화 하나에 쳐주었다고."

아까  그에게 돈을 주었을 때 거스름돈을 포함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게 이런 뜻이었던가.


"녀석이 금화도 있냐면서 같은 금화라도 몇 배는 쳐 줄 수 있다고 그랬었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금화를  적게 주고 은화를 꺼낼 이유가 없단 말이다."
"큭!"
"다시 한번 계산해 봐. 마음에 안 들면 그냥 그 친구한테 환전해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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