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멈춰버린 발걸음.
"...그런 걸 부탁한 기억은 없는걸."
소녀는 침묵 끝에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아니, 그렇게 진지하게 말해줄 필요는 없다만."
그는 무안한 듯 중얼거리다 세 명이나 쓰러져 있는 골목을 보고 혀를 찼다. 한 명은 그가 쓰러트리긴 했지만 말이다.
"헬레나."
소녀가 헬레나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피자 그 또한 그녀에게 다가갔다. 헬레나의 목에는 손자국처럼 커다란 멍이 나있었다.
"목뼈는 문제 없고 자국이 오래 남을 거 같긴 한데 약만 잘 바르면 별지장은 없겠지. 그보다 네 옷부터 어떻게 해 보라고."
"하지만 옷이 없어."
하피가 그녀의 옷을 힘으로 뜯어버린 탓에 벨카는 속옷만 간신히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어떤 무식한 놈인지는 몰라도 힘자랑은 거창하게 했네."
그는 땅바닥을 굴러다니던 블라우스 조각을 확인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어떤 녀석들이 문제고 누굴 챙겨야 하냐?"
"헬레나를 챙겨줘. 들려야 할 곳이 있어."
"병에 걸린 녀석은 다른 곳에 있나 보구먼."
"응."
그는 헬레나를 업으려다 다시 소녀를 보고 쓰러진 이들을 돌아보았다.
"이 녀석의 옷이 적당하겠군."
그는 쓰러져있는 주드의 로브를 벗겨서 벨카에게 주었다.
"좀 찝찝해도 잠시만 입고 있어. 그대로 나가는 것보다는 나을 거 아니냐."
그녀가 로브를 껴입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그대로 헬레나를 업으며 벨카를 안아들었다.
"나는 내버려 두어도..."
"잘도 그러겠다. 마녀의 몸으로 마법을 없애는 건 생각 이상으로 고통스러울 텐데?"
소녀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들렸다. 골목 밖으로 나서자 잠시 시선이 몰려들었지만 벨카는 자신보다 큰 로브로 얼굴까지 가린 상태였기에 그 이상으로 시선을 끄는 일 없이 거리를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약을 찾는다고?"
그가 조용히 하는 말에 벨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가 주드에게 요리해 준다는 명목으로 드바야카를 사갔을 때. 계산을 위해 그에게 내밀었던 돈주머니를 떠올렸다. 그냥 돈만 주어도 됐을 텐데 돈주머니를 그대로 주는 소녀의 행동이 이상했으니까. 돈주머니의 안에는 드바야카의 값에 맞는 은화만이 아니라 작은 쪽지도 함께 들어있었다. 접혀 있는 상태라 바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안 그래도 신경이 쓰이던 이들이라 그들이 떠나고 곧바로 쪽지의 내용을 읽었다.
"흠, 잘도 찾았구만."
그 쪽지에는 흑목병의 약을 찾고 있으며 따로 만나고 싶다는 글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드바야카는 수로에서는 잡히지 않는 것 같으니까."
"그래서 내가 도시 밖을 오간다는 걸 눈치챘군."
식용이든 약용으로든 쓰이는 테브라니나 드바야카와 달리 수로를 헤엄치는 녀석들이 도저히 먹을 게 못 된다는 사실은 현지인이 아니면 알아채기도 힘들 텐데 잘도 알고 그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어째서야?"
"뭐가 말이냐?"
"약속 장소는 그곳이 아니었는걸."
"그렇긴 하지."
다만 쪽지에 있던 약속 장소는 그 골목보다 더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벨카는 어째서 그가 그 골목으로 어떻게 찾아왔는지 의아했다.
"네가 너무 절박해 보였거든. 사랑에 빠진 애송이 하나 속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겠지만."
사랑하는 이와의 연애에 한창인 사람이 필사적으로 기색을 죽이고 무언가를 찾을 리가 없으니까. 낡은 천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에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저 여관이냐?"
"응."
"하필이면 제법 비싼 여관이구먼. 환자랑 짐을 가지고 빠져나올 수는 있겠지만 마차까지 챙기는 건 당장은 힘들 거다."
"괜찮아. 어셔를 살리는 게 우선이니까."
그는 여관의 옆으로 돌아 여관의 담을 가늠하고 그대로 땅을 박차고 담을 디뎌 넘어갔다. 여인을 업고 소녀를 들고 있는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 날렵한 행동이었지만 그는 쉬지 않고 여관의 벽면으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붙었다.
"우선 마차로 가줘."
벨카가 가리킨 곳에는 마차가 하나뿐이라 복잡하게 찾을 필요도 없었다.
-쿠륵!
힐디스비니가 그를 경계하긴 했지만 벨카와 헬레나가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들어선 마차의 안.
-히히힝!
"엥? 웬 말이여."
안쪽에 쌓여있는 건초 더미와 함께 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긴다. 그가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고 벨카는 그런 말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짐을 뒤져 웬 병을 꺼내 가져왔다.
"헬레나를 내려줘."
그가 순순히 업고 있던 헬레나를 마차 안에 있던 침대에 눕히자 병안에 들어있던 초록 가루를 그대로 뿌리는 소녀. 그와 동시에 초록 가루들이 닿은 그녀의 목에 남은 커다란 멍 자국들이 사라지는 모습에 그는 감탄했다.
"무미야라. 오늘 보기 힘들다는 건 다 보는 것 같구만."
"콜록콜록! 아가씨? 그리고... 당신은?"
그와 동시에 정신을 차리는 헬레나. 주드에게 목을 졸린 후유증인지 기침을 하지만 곧 안정을 되찾고 벨카와 그를 보았다.
"상황은 나중에 다 설명할 테니까. 힐디스비니는 몰 줄 아나?"
"큽, 예."
의심을 할 수도 있었지만 헬레나는 별일을 당한 것 같지 않은 벨카의 모습에 약간이나마 경계를 풀었다.
"여관에 낸 돈은?"
"오늘까지 숙박비를 선불로 낸 상태일 겁니다."
주드가 며칠 전에 미리 많은 돈을 내긴 했었지만 생각보다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더 많은 돈을 내는 것을 헬레나는 확인하고 있었으니까.
"마침 잘 됐군. 마차를 버리고 가지는 않아도 되겠어. 빠르게 환자랑 짐만 챙겨 나와. 그만 나갈 거라고 변명하자고."
"알겠습니다."
헬레나는 깨어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몸은 괜찮아?"
"예, 빨리 어셔 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그녀는 벨카의 걱정에 미소로 답하며 재빨리 여관으로 들어가 어셔를 업고 나왔다. 정작 짐은 들고 있지도 않았다.
"너무 급하게 나온 거 아니냐? 짐 정도는 챙겨도 문제없을 텐데."
"애초에 진짜 저희 물건은 여관에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흐미, 철저하구만."
헬레나가 어셔를 챙겨 나오면서 주드와 함께 나간다는 말을 여관에 남긴 후였기에 그들은 마차를 몰고 당당히 나갈 수 있었다.
"마차를 어디로 몰면 되겠습니까?"
"높이는 상관없으니까. 동남쪽으로 가자고 거기서 아래로 가면 돼."
그녀는 그의 말을 따라 마차를 몰면서 물었다.
"파르즈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잘 사는 이들이 사는 게 아니었습니까?"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파르즈가 여기가 전부는 아니라서. 가다 보면 커다란 문이 있는데 거기서 마차를 세워."
그리고 도달한 벽에는 정말 경비들과 함께 커다란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파르즈는 땅 아래로 움푹 팬 지형이라 그 너머에도 땅 속일 텐데.
"검문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고삐만 붙잡고 있어."
헬레나는 그가 검문을 어떻게 해결할지 의문이었다.
"멈춰라. 무슨 일로 외곽으로 나가려는 거지?"
"여, 조지. 오늘도 열심히구만."
"켁! 너냐?"
그녀는 조용히 고삐를 잡은 채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잠시 기절한 탓에 생각하는 것이 조금 힘들었지만 경계를 소홀히 해선 안 되었으니까.
"설마 또 그 일이냐?"
"그렇지. 듣자 하니 미숙한 캐트시가 조절을 못해서 엉뚱한 사람이 감염된 것 같다만."
"쯧, 됐으니까. 지나가. 요금 내는 거 잊지 말고."
"그래그래."
그들의 대화는 거창할 것도 없었다. 캐트시 경비병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그의 모습에 그가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을 뿐이다. 그가 경비병과 대화를 끝내고 그들은 정말 순조롭게 문을 지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겁니까?"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있지."
때문에 그처럼 병에 걸린 이를 치료제가 있는 외곽으로 데리고 가는 일을 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이런 일을 하는 놈을 알아보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해. 그냥 나처럼 낡은 천을 둘둘 말고 있는 녀석을 찾으면 돈을 받고 외곽으로 데려다준다고."
헬레나는 그의 말에 주드가 정말로 어셔를 치료해 줄 생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도 그렇게 생각하곤 있었지만 이렇게 들으니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원래 이곳에서 살았다면 그가 이런 일을 하는 자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그녀들에게 내색 한 번 한 적이 없었으니까. 두꺼운 터널처럼 이어진 문을 지나자 헬레나는 곧 또 다른 도시를 볼 수 있었다.
"저 내부만 파르즈가 아니야. 사실상 유배지나 빈민촌 같은 느낌이긴 한데. 여기를 포함해서 파르즈다."
사방이 땅이라 사실상 벽으로 막혀있었던 내부와 달리 그곳은 탁 트여 있었다. 그들이 지나온 문쪽을 보면 그곳에는 란투아의 장벽처럼 길게 늘어선 하얀 절벽이 있었다. 그녀가 지하라고 생각했던 곳에는 또 다른 지상이 있었다. 계속 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정말 마을과 밖의 경계에 세워진 작은 움집이었다.
"이런 곳에 의사가 있다는 겁니까?"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조잡한 천막을 뼈대로 세워둔 작은 움집은 사람이 여섯 정도는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까 싶었다.
"실력은 확실하니까 걱정 말라고. 이교도지만."
"내 입장에선 네가 이교도다!"
그의 말이 움집 안에도 들렸는지 누군가 움집을 헤치고 나오며 소리쳤다. 다만 그러면서 드러난 자의 모습을 보고 딱히 섬기는 종교가 없는 헬레나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야 창백한 피부 위에 뼈를 가죽 실로 엮어 만든 뼈갑 같은 옷과 머리 위에 모자처럼 눈을 반쯤 가리는 동물의 머리 뼈, 손에 든 뼈를 잔뜩 묶어 놓은 지팡이는 누가 봐도 이교도였으니까.
"어쨌든 급한 환자니까 빨리 봐달라고. 제레미아."
"또 흑목병이냐?"
"늘 그렇지 뭐."
"하, 그 자식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병을 퍼뜨리는군."
그는 질린다는 듯 말하면서도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이런 이교도에게 치료를 맡겨도 되는 겁니까?"
헬레나가 차마 들어갈 마음이 들지 않아 그에게 묻자.
"이교도는 맞지만 사교도는 아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그렇군요."
그가 어셔를 업고 그들이 그를 따라 움집으로 들어서면 밖에서 비쳐들어오는 빛으로 생각보다 밝은 내부의 풍경이 보였다. 그곳에는 갖가지 의식용 도구처럼 보이는 것들이 가득했지만 사이사이에 헬레나가 보아도 상당히 전문적인 의료 도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에 헬레나가 안심했을 때.
"크리칼료프. 너, 대체 어떤 분을 모시고 온 거냐?"
어셔를 치료한다던 제레미아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크리칼료프는 그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남자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다만 헬레나가 그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의 시선이 벨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소녀를 해하지는 않을까 경계하니.
"아니, 내가 들을 만한 일은 아니겠지. 환자를 이쪽에 눕혀. 상태를 보고 약을 주사해야 하니."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 정신을 차린듯 바닥에 깔아둔 가죽을 두드리며 환자를 놓으라 말했다. 크리칼료프가 어셔를 눕히자 옷을 들춰보며 상태를 살피는 그.
"조금만 더 늦었으면 위험할 뻔했군."
그의 말을 듣고 헬레나의 옷깃을 잡고 있던 벨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크리칼료프와 접촉하지 못했다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어셔를 잃어야만 했을 테니.
"하지만 뭔가 묘해. 흑목병은 단기간에 감염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텐데 이 상태는 오랫동안 앓은 것 같은데. 특별히 잠복기가 길었나?"
헬레나는 그의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혹시 억제제가 문제가 된 겁니까?"
"억제제라고? 설마 이 녀석이 병에 걸린 건 언제지?"
"두 달이 살짝 넘을 겁니다."
제레미아는 그녀의 말에 감탄하다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억제제를 만들었다는 건 대단하지만 그동안 치료제를 구하는 게 더 빨랐을 텐데?"
"...저희는 란투아에서 왔으니까요."
"뭐?! 구름 지대를 건너왔다는 거냐?!"
그가 흥분해서 소리치자 그들을 데리고 온 크리칼료프가 그를 진정시켰다.
"궁금한 건 나중에 알아보고 빨리 환자부터 치료하라고. 그래도 의사 노릇한다는 놈이 환자를 내버려 두는 건 무슨 심보냐?"
"끙, 그렇군."
그는 그러면서 어디선가 꺼내든 병을 하나 골라 내용물을 주사기에 채워 넣고는 그대로 어셔의 팔에 주사했다. 고작 그뿐이었을 일이었다. 고작 그것뿐이었는데.
"이제 며칠 후면 털고 일어날 거다."
"정말 끝인 겁니까?"
"그래, 흑목병은 병주제에 병보다는 독에 가까운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억제제를 맞았다고 문제는 되지 않을 거다. 치료제만 늦지 않게 맞는다면야."
헬레나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간 속을 가득 채운 허탈감을 내뱉을 것만 같아서. 분명 기뻐해야 마땅한 일일 텐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