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멈춰버린 발걸음.
드디어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셔라는 마뜩잖은 녀석을 소녀에게서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주드는 그를 향한 철저한 거부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내가 미웠나?"
"아니."
벨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의외의 대답에 놀라 그녀와 눈을 마주친 순간.
"당신 같은 자는 이전에도 있었어. 그저 지금이 당신에게서 벗어나 어셔를 치료할 수 있는 기회였을 뿐이야."
약간이나마 피어오른 희망은 그대로 스러져버렸다. 그를 바라보는 금빛엔 그 어떠한 감정조차 내비치지 않았기에. 벨카에게 주드는 안중에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녀에게 그는 그저 자신에게 음심을 품었던 수많은 인간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그에게 거부감을 보이는 게 대단한 걸지도 모른다.
"하, 하하하. 그래, 넌 그런 존재였지. 아가피아라는 건."
"아가피아...?"
헬레나가 의아하게 중얼거렸지만 그 말은 그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냥 나의 착각이었을 뿐이었어. 착각이었던 거야."
소녀는 애초부터 인간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존재였다. 단지 그는 그는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그런 방식으로 손에 넣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진작에 알고 있었는데 인간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떨어트릴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고 만 것이다. 그는 그럼에도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렇게 소중했어? 그렇게 사랑했어? 그 어셔란 녀석이 그렇게나 중요했냐고?!"
그건 벨카의 진심 어린 배려였으니까. 그 누구도 아닌 어셔를 위한 다정한 배려. 그 배려가 주변에도 베풀어졌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주드에게만큼은 배려가 아닌 수단이었다. 그에게만큼은 이토록 잔인한 존재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 녀석이 대체 뭐길래!!!"
"아가씨. 물러서십시오."
헬레나는 주드의 기세가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벨카를 더욱 뒤로 물렸다.
"...정말 같은 인간이 맞는지도 의심스럽군요."
그녀는 단검의 날을 살폈다. 광택을 지워 빛이 나지 않아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날에는 마비독이 발라져 있었다. 마음 같아선 맹독을 발라두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구할 수 없어 대신 발라두었었는데 이제 보니 독이 통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독이라도 발라져 있었나 보지?"
헬레나가 얼굴을 굳히자 그는 큭큭 웃는다.
"너 정도의 여자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마법사가 된 이후로는 그런 거에 죽을 수도 없는 몸이 되었거든."
이건 마녀가 아무리 마법사의 마법을 캔슬 시킬 수 있어도 유효한 것이기에 어떤 독이라 해도 주드에게 영향을 줄 수는 없었다. 그가 그녀들에게 천천히 다가오자 헬레나는 주머니 속에서 작은 도자기를 꺼내들었다.
"이 이상 다가오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평범한 도자기는 아니었다. 그건 란투아에서 초록 난쟁이들을 쫓아내는데 썼던 폭탄과 같은 물건이었으니까. 그녀는 하필 챙길 수 있었던 물건이 이것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웠다. 연금술은 기술을 전투에 조금 활용할 수 있을 뿐 생각 이상으로 싸움에 적합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나? 연금술을 가르친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러나 주드는 헬레나의 경고가 무색하게도 곧바로 코앞까지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른다. 그녀가 단검을 내질러 위협해보지만 그가 물러나면서 결국 서로에게 헛손질만 한 상황. 연금술과 마법이 몰라볼 만큼 차이가 있었지만 연관성을 생각하면 주드가 모르는 게 이상했다. 그녀가 이곳에서 폭탄을 터트릴 수 없을 거라는걸. 그녀 혼자 있었다면 몰라도 이곳엔 벨카도 있었다. 작은 파편 하나라도 튀면 위험했다.
"큭!"
그나마 주드가 딱히 싸우는 법을 배운 것 같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었다. 다시 파고들어 주먹을 휘두르는 그에게 그녀가 도자기를 쥔 팔을 굽혀 팔꿈치로 명치를 찌르듯 치자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다리로 그의 다리 사이를 치려 하면 그는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크게 물러났다.
"성가시군."
주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니 신경질이 났다. 헬레나처럼 단검 하나만이라도 들고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상황이 어렵진 않았을 텐데. 빈틈을 보인다 싶으면 날카롭게 파고드는 단검과 남자의 급소를 노리는 발길질이 매섭다. 헬레나도 그가 성가신 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단검과 체술로 그의 공격을 흘리고 일방적으로 때리고 있었지만 힘의 차이를 메꾸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그녀도 지금까지 주드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제대로 된 기술을 배운 것 같지는 않아도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고 주먹을 날리는 것이 예사롭지는 않았다. 필시 어디선가 싸움을 해봤던 것이리라. 하다못해 독이 통하거나 성지나 파시페니아처럼 총포를 만들 수 있었다면 힘들게 몸싸움을 벌일 필요도 없었을 텐데. 벨카 덕분에 겨우 마법을 봉인할 수 있었지만 상황이 크게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소녀는 마법을 봉인하는 것이 한계였고 헬레나는 신체적인 이점이 주드보다 여러모로 부족했다.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아녀자 하나 제압하지 못하고 쩔쩔매다니 우습습니다."
"뭐라고?"
헬레나의 도발에 주드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모습에 그녀는 약간 통쾌함을 느끼면서도 더욱 경계했다. 최대한 빠르게 싸움을 끝내야만 했다.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마법을 빼면 당신에겐 대체 뭐가 남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그를 최대한 자극해서 이성을 잃게 만들어야 했으니까. 싸움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건 헬레나였기 때문에 주드를 도발하기로 한 것이다.
"...너, 지금 뭐라고 한 거냐?"
헬레나는 자신을 노려보는 주드의 모습에 그것이 그의 역린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당신은 정말 마법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었군요."
그녀는 그것을 이용해 거침없이 자극했고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녀에게 대답하는 일도 없이 달려들었다. 효과는 확실했지만 거침없이 그녀를 때리려 하는 주먹이 매섭게 달려든다 그녀도 단검을 휘둘러 떨쳐내려 하지만.
"윽!"
결국 다른 손에 쥔 도자기 탓에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게 한 손뿐이라는 것이 발목을 잡아 단검을 쥔 손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다시 발로 급소를 차 보려 하지만 그마저도 그에게 붙잡혔다. 손과 발이 하나씩 그에게 잡혀버려서 그보다 힘이 약한 헬레나는 어쩔 도리가 없어졌다.
"어디 한 번 더 떠들어 봐. 이래도 내가 마법 없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나?"
"으읏."
그가 발과 손목을 꽉 쥐는 힘에 헬레나가 고통스러워하자 미소 짓는 주드를 향해 그녀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예, 당신은 정말 마법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군요."
"이런 상황에서도 허세를...!"
그러나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녀가 혹시라도 터질까 봐 사용하지 못했던 도자기로 그의 머리를 힘껏 내려쳐버렸으니까. 주드가 눈을 부릅 뜬 채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그녀를 붙잡은 손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이건 예상치 못했던 것이리라. 그녀가 들고 있던 도자기는 겉모습만 그녀가 사용했던 폭탄들과 같을 뿐 별다른 장치나 재료를 넣지 않은 그냥 도자기라는걸. 자신도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방해되는 것을 굳이 꺼내들고 있었던 건 이걸 위해서였다.
"정말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바라죠."
그를 확실하게 끝내기 위해서 단검으로 찌르려고 했을 때.
"그건 안 될 것 같군."
"큽! 이건!?"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한 그가 그녀의 얼굴에 무언가를 뿌린 건 그건 처음 그가 습격했던 날 그녀가 당했던 가루의 냄새와 같았다.
"네가 가장 방심할 때를 노리고 있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끄으윽!"
그 틈에 헬레나는 주드에게 목을 졸리며 들어올려졌다.
"같은 수를 다시 쓰는 건 너 같은 여자에겐 힘들단 말이지."
그렇기에 주드 또한 헬레나가 이 가루를 그가 들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도록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발버둥 치며 그의 몸을 퍽퍽 차 보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내가 마법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우습군. 방금 전에도 말했었지. 연금술이 무엇을 기원으로 두고 있는지 말이야."
그는 자신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을 진작에 우려하고 준비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그녀에게 뿌린 가루 또한 그중 하나였다.
"정말이지 이만큼 실패작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녀석들이 또 어디에 있을까? 안 그래?"
연금술사, 마법사 요한이 조금이나마 세상에 진리를 설파하고자 노력하며 양성한 자들이지만 안타깝게도 실패한 결과물. 실패의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들의 지식이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뛰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이해한 자들이 연금술사라 불리는 자들이지만 그들의 수준은 정말 기초 중의 기초나 간신히 이해한 수준이었다.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더 큰 위험을 초래시킨 자들. 자신들이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 지도 모르는 채 사도를 자청하며 나아가는 우둔하고 가엾은 자들이 연금술사들이었다.
"연금술이 연금술사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지."
하지만 꽤나 애를 먹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너는 확실히 우수해. 걱정하지 마. 이대로 죽는 것도 아까우니까. 벨카와 함께 가둬두고 평생 귀여워해 줄 테니."
"크으윽!"
"너무 발버둥 치지 마. 더 괴롭히고 싶잖아?"
"끅!"
그는 위험하다 싶은 때까지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에게 반항하며 상처까지 낸 암컷들은 확실하게 제압해서 철저하게 길들일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보다 더. 그는 헬레나가 정신을 잃었을 때에야 그녀의 숨통을 놓아주었다.
"헬레나에게선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궁금하지 않아? 벨카?"
"읏."
마법을 지워버린 대가로 고통에 시달리며 그들의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벨카에게 말을 걸자 입술을 깨무는 그녀.
"헬레나를 놓아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건..."
"네가 희생하면 될 거라 생각하지는 마. 이번에는 이딴 생각 따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테니."
아니, 생각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며칠만 더 내버려 두면 어셔는 알아서 죽을 테니. 결국 소녀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이제 마법을 돌려놔."
그가 아직도 사용되지 않는 마법에 벨카에게 돌려놓으라 말했을 때였다. 철걱하고 그들이 있던 골목에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누군가 또 이 골목에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하피의 경우 여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으니까.
"빨리 돌려놔."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말했지만 마법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마법이 사용되지 않는 것에 주드는 신경질이 났다.
"돌려놓으라고! 헬레나가 죽는 걸 보고 싶어?!"
그가 위협하기 위해 헬레나의 단검을 잡으려 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날아든 커다란 칼이 그가 쥐려던 단검을 쳐내고는 다시 날아왔던 방향으로 돌아간 건. 그리고 주드는 단검을 쳐낸 칼의 모습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두껍고 네모난 형태의 커다란 칼이 다시 돌아간 방향에는 낡은 천을 겹겹이 두른 드바야카를 팔던 상인이 서있었다. 그의 손에는 방금 단검을 쳐날려버린 칼이 들려 있었다. 그 칼자루에 그가 두른 천이 묶여 있는 것을 보면 저 천을 잡아당겨 다시 붙잡은 듯한데.
"네놈은 뭐지?"
그런 짓을 벌이는 게 단순한 상인일 리가 없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별거 아니었겠지만 아직 마법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물음에 상인에게서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낡은 천의 아래에서 헬레나와 벨카, 쓰러져 있는 하피의 상태를 확인하는 듯하더니 다시 그를 향해 칼을 던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법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상인이면 상인답게 물건이나 팔 것이지...!"
날아드는 칼을 피했지만 문득 던져진 칼의 궤적에 낡은 천이 이어져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을 때는 이미 천이 그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크억?!"
그리곤 그대로 잡아당겨져 상인에게 끌려간 동시에 주드는 상인이 그에게 머리를 부딪히는 모습을 끝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간단하게 주드를 제압해버린 그를 벨카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 음, 그래서 드바야카 대가리 파이 시키신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