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떠나가는 길.
사르륵, 헬레나의 손끝에서 다홍빛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어지며 얕게 스치는 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울렸다. 그녀는 지금 벨카의 머리카락을 빗어주고 있었다. 본영지에 다녀온 뒤 이틀이란 시간은 그 끝자락을 붙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란투아를 떠날 준비를 하며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남아있는 일들을 마무리해야만 했으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헬레나는 벨카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거울 속의 그녀를 살피며 물었다. 양쪽으로 묶어낸 붉은 머리카락이 창가로 비쳐든 햇빛을 받아 아른거렸다.
"응."
평소와 다를 것도 없는 모습이건만 벨카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헬레나가 다르게 꾸며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도 소녀가 원하는 것은 항상 같았다. 그리고 메디아에게 준 가면 대신 헬레나가 주었던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녀들은 방을 나섰다. 이미 그녀들의 짐은 모두 챙겨 마차에 가져다 둔 후였다. 텅 비어있었던 성의 복도에는 하녀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일을 하고 있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대부분이 초록 난쟁이다. 헬레나가 떠나면 성을 관리할 이가 없다시피 하기에 도나르가 그들을 고용한 것이다. 벨카와 헬레나는 분주한 그들의 사이를 지나쳤다. 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평온한 하루가 그녀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도착한 성문에는 그녀들이 타고 갈 마차와 힐디스비니 한 마리와 함께 도나르와 시프가 서 있었다.
"...정말 떠나는구나."
시프가 씁쓰레하게 중얼거리자 벨카가 그녀에게 다가가 폭 안겼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품에 안긴 소녀의 모습에 왈칵 쏟아져 나올 듯한 눈물을 참았다. 이토록 여린 소녀를 지켜줄 수도 없이 구름 지대 너머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 서글펐다. 곧 시프의 품에서 빠져나온 벨카는 이어서 도나르의 앞에 섰다.
도나르는 그런 소녀의 머리에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대었다가 자신이 건틀릿을 끼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빼들고 맨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어쩐지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속으로는 온갖 걱정거리를 쏟아내고 있는데. 벨카는 그의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맑은 금빛으로 그를 마주할 뿐이었다. 이내 조용히 뒤돌아서는 소녀.
"잠깐만."
말없이 이별을 고하는 듯한 그 모습에 도나르는 준비해 두었던 것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걸 가져가라."
"이건?"
그건 그가 고향에서 포상을 이유로 받았던 물건이었다. 아마 이걸 주었다는 걸 알면 동료들이 놀라겠지만.
"만일 파시페니아에 들릴 일이 있다면 그게 도움이 될 거다."
"...응."
정작 그는 아이들에게 이 이상으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제 슬슬 서둘러주지 않겠나? 꽤 지루하군."
어느새 나타난 마법사, 주드가 마차에 기대어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나르는 어두컴컴한 칠흑 같은 그의 모습에 불안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전하게 구름 지대를 건너기 위해선 마법사의 도움은 필수였으니까. 그래도 차마 그에게 아이들을 부탁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기에.
"헬레나."
"예."
"아이들을 부탁한다."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름 지대를 넘어가는 일인 만큼 마땅한 마부를 찾지 못했기에 힐디스비니는 헬레나가 몰기로 했다. 현재 란투아의 평야는 배를 타고 다녀야 할 만큼 물바다가 된지 오래였지만 힐디스비니는 구름 지대의 늪지대도 건널 수 있는 생물이다. 그녀가 힐디스비니까지 몰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그들을 붙잡을 핑곗거리 하나 주지 않는 것이 야속하기도 했다.
-쿠르륵!
힐디스비니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그들은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이해할 수가 없군."
마차의 안에서 주드는 여전히 잠든 듯 앓고 있는 어셔를 돌보는 벨카를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로브는 마차 안에 들어서면서 진작에 벗어둔 후였다.
"...."
그러나 그녀가 그에게 답하는 일은 없었다. 눈조차 그에게 돌리지 않는 모습에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시하는 건가? 이거 섭섭한데. 나름 좋은 조건으로 너를 에스코트하고 있는데 말이지."
쓸데없는 혹이 제법 많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마차의 구석을 보았다. 그곳에는 캐트시가 몸을 말고 떨고 있었다. 아마 파르즈로 가는 김에 고향으로 데려다주려는 모양이었다.
"너는 모든 걸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이런 하찮은 것들에게 자비로울 수 있지?"
그는 벨카를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와 같은 존재가 한낱 인간에 불과한 이들을 가족이라 여기고 소년을 살리기 위해 제 몸마저 불사르며 그 와중에도 스스로가 고귀하다 착각하는 괴물을 거두어주었다는 것이.
"하찮지 않아."
드디어 벨카가 입을 열었다. 어셔를 하찮다고 한 것이 문제였을까? 소녀의 금빛에는 잔잔한 분노가 엿보였다. 그 모습에 주드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벨카가 어떤 마음으로 그러는지 상관없었다. 그에겐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으니까. 정말 금기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가지고 싶은 소녀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보람을 느낄 수도 없을뿐더러 그녀에게 미움을 받게 되므로 그리 달가운 선택지는 아니었다.
"흠, 지금 누가 너의 주인인지 잘 모르는 것 같군."
그가 벨카의 곁에 다가가 앉아 어깨를 쓰다듬자 보기 좋게 굳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서 소녀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품에 안기도록 끌어당겼다.
"읏!"
벨카는 저항하지도 못하고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그의 다리 위에 앉혀진 소녀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허벅지의 감촉과 함께 달큼한 향이 그대로 콧속으로 들어왔다. 가녀린 몸은 무척이나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껏 부수고 망가트리고 싶게 만들었다. 이대로 욕망에 빠져들어 마음껏 소녀를 범하고 싶었지만 정말 이대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럼 내가 너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야겠지?"
초조함은 독이었다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독. 그는 그런 독에게 자신을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괜히 그가 사흘 동안 그녀들을 찾아가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주드는 미리 준비해 들고 왔던 물건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검은 가죽과 작은 은장식이 가미된 초커였다.
"자, 이걸 스스로 목에 차는 거다."
벨카는 멍하니 그 초커를 바라보다 이내 손을 뻗어 그의 손에 있는 초커를 잡아들었다. 망설이는 듯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제 목에 두르고 채운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뗀 소녀의 목에는 초커가 채워져 있었다. 그는 초커가 소녀의 목에 딱 맞는 모습에 만족하며 느른하게 소녀의 여린 목을 쓸었다.
"괜찮군.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나?"
그러나 벨카는 그의 말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소녀의 목에 채워진 초커를 잡아 그녀의 고개를 자신에게 돌렸다.
"으윽!"
"그러면 안 되지. 사랑하는 주인님에겐 정성스럽게 키스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나?"
그의 말에 벨카의 입술이 떨렸다. 망설이는 금빛이 보였지만 그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급한 건 그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슬슬 지루해진 주드가 인내심이 바닥날 무렵. 이윽고 소녀는 눈을 감았다. 이내 그를 향해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과 함께 그의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자신의 혀로 소녀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가 마음껏 탐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러자 곧 그가 기다려왔던 감촉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입술보다도 부드럽고 너무나도 작게 느껴지는 촉촉한 그 감촉은 분명 혀였다. 주드는 소녀의 혀가 자신의 입술을 파고 들어오는 것에 환희하며 눈을 감고 그 감촉을 즐겼다. 애초에 이빨을 닫아두지 않았었기에 그녀의 혀가 그의 입안을 건드리며 맛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츠릅 츠읏."
그리 적극적이진 않아 느리고 입안을 훑는 데 오래 걸렸지만 그렇기에 소녀가 자신의 입안을 오가는 감각을 확실하게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다 볼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그가 눈을 뜨자 발견할 수 있었던 건 소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한줄기 눈물이었다. 그의 기분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정말 이것만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그에겐 초커 말고도 준비해 놓은 것이 더 있었다. 주드는 이내 그것을 들고 자신에게 키스하고 있던 소녀의 목에 꽂아버렸다.
"으그읏!"
"아가씨?! 무슨 일입니까?!"
벨카의 비명이 마부석까지 들렸는지 헬레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네가 안을 신경 쓸 여유는 없을 텐데?"
"아가씨에게 무슨 짓을!"
"별것도 아니야. 당연한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 마차나 몰아. 너는 다음이다."
헬레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 쓰이는 듯했지만 그의 낮은 목소리가 주는 경고에 이를 꽉 깨물고 마차를 계속 몰았다. 주드는 만족하며 다시 벨카를 보았다.
"으윽."
소녀는 목에 꽂힌 날카로운 감각에 고통스러워했지만 그 목소리가 바뀌는 것도 곧이었다. 그는 그녀의 목에 꽂아둔 주사기를 잡고 그대로 피스톤을 눌러 내용물을 주사하고 주사기를 뺐다. 그러자 새어 나오는 붉은 피가 참으로 먹음직스러워 보여 그는 그대로 소녀의 목을 물었다. 비릿하면서도 알싸한 맛이 났지만 달콤한 맛도 함께였다. 얼마나 그녀의 목을 물고 혀로 핥으며 그 맛을 즐기고 있었을까?
"...당신은, 나를 잡아먹을 거야?"
소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그녀의 목에 파묻었던 고개를 드니 물기 어린 금빛이 보여 웃음이 나왔다.
"그건 이제부터 알 수 있겠지."
이제 슬슬 약효가 나타날 때였다.
"아, 으? 읏...! 이건..."
아니나 다를까 생경한 감각에 놀란 듯 바르르 몸을 떠는 벨카. 그가 소녀의 몸에 주입한 건 최음제였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썩 효용성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마녀의 경우는 좀 다르지. 안 그래?"
마녀의 몸은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오리지널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몸은 더 민감해진다."
그건 굳이 진리를 알지 못해도 고위층의 인간이라면 꽤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인간이 마녀를 굴복시키기 위한 연구가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는 증거였다. 그들은 자세한 원리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소녀의 금빛에 혼란이 맺히고 하얀 피부가 붉게 달궈지듯 달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이러고도 굴복하지 않을지 보자고."
그는 이제 소녀가 먹기 좋게 익어가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약초꾼이 행방불명이라고?"
소녀를 배웅한 도나르는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왔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한숨만 내쉬고 있을 때 들려온 건 때아닌 행방불명에 대한 소식이었다. 만남은 짧았지만 그가 벨카를 구해준 일이 있어 포상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께부터 보이지 않았다는데."
"수색은?"
"벌써 시켜놨지. 발데르가 감독하고 견습기사 위주로 편성해서 찾고 있어."
"오, 역시."
"이래 봬도 짬밥이 얼마냐?"
도나르는 일부러 가볍게 이야기하고 우르가 받았지만 생각보다 즐겁지는 않았다.
"그런데 언제 그렇게 예쁜 딸이 생겼냐? 시프랑 이러쿵저러쿵해서 생겼다기엔 나이가 좀 많은데?"
"양딸이라고 했잖냐."
우르는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도나르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였다.
"치료차 보내는 거라며? 잘 되겠지."
"...그렇겠지."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건 위로뿐이었다. 그러던 중 쿵쿵쿵하고 누군가 거세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도나르가 의아해하며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자 들어온 건 견습기사들과 함께 수색 중이라던 발데르였다. 어찌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는 그의 모습에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기에 우르가 물었다.
"뭐야? 약초꾼이 죽기라도 했어?"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시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본 이들이었다. 그것 가지고 이렇게 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발데르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됐고. 직접 봐."
대체 어떻기에 의문이 들었지만 그들은 발데르를 따라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약초상이잖아?"
"집안에서 발견된 거냐?"
하지만 그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비가 쏟아진다지만 시체 냄새는 무척이나 지독해서 쉽게 지워질만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코앞에 있는데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니 의아해하며 약초상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인 견습 기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몇몇은 밖으로 달려가 토를 하고 있었다.
"시체는 어디 있는데?"
무엇보다 의아한 건 집안 어디를 보아도 시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전히 냄새도 없다. 견습 기사 중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있던 사람 하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창고였다. 도나르와 우르가 함께 그 창고로 들어섰을 때.
"미친."
그들은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창고 안에 가득한, 약초를 보관해야 할 상자 속에 가득한 소금들 위에 얇게 저며진 피륙이 있었으니까. 뿐만이 아니라 내장으로 보이는 것들까지 얇게 저며져 단면을 보이며 소금에 절여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것은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다섯 개의 머리였다.
"뭐야 이게."
"우욱, 세 놈은 동네 양아치라는데."
그들을 따라들어온 발데르가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면서도 말했다.
"...저거 퍄랴르 아니야?"
"뭐?"
심지어 그들의 눈에 익숙한 난쟁이의 머리도 있었다.
"당장 지하 감옥 수색해. 얼른!"
"어, 어!"
적어도 그는 퍄랴르를 내보내거나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면 약초꾼은..."
그중 하나의 머리는 이미 다른 것들과 같이 소금에 절여졌지만 오래된 듯 미라와 같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