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운명.
"그런데 딱히 할만한 게 없네."
류드밀라가 두고 왔던 파이를 챙겨온 뒤. 그녀들은 무엇을 하고 놀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한 놀잇감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비만 오지 않았다면 놀잇거리가 많았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메디아도 고개를 저으며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았다. 그러나 매년 찾아오는 우기를 오지 말라고 내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녀들이 할 수 있는 놀이는 성 안에서 하는 것뿐이지만 그마저도 대부분 질리도록 해본 것들이었다.
"결국 책을 읽는 거뿐이잖아...?"
"우우, 이러면 함께 있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류드밀라와 메디아는 책을 읽는 건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책을 읽으면 조용히 집중하는 편이라 주변을 잊곤 하는 자신들을 잘 알고 있었다. 벨카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들이 과연 이대로 괜찮은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녀들이 그러는 사이 조용히 책장으로 다가간 벨카가 툭 튀어나와 있던 책 하나를 집어 든 건.
"이건?"
"아! 그건 내가 읽으려고 했던 건데."
책의 제목은 '여름의 울새'였다. 그 책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녀가 말했다.
"책, 읽어 줘?"
"저는 좋아요!"
"나쁘지 않을 것 같네."
벨카가 책을 들고 자리를 잡으면 류드밀라와 메디아는 그녀의 양옆으로 모여 앉았다. 이야기는 원래 가을에 찾아왔어야 할 울새가 시기를 잘못 찾아 여름에 찾아와 다친 것을 한 아이가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아이에겐 연고랄 것이 없어서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죽어가는 새를 외면할 수 없어서 치료하고 키워주었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흔한 동화였다.
하지만 소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좋아서 그녀들은 어느새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아이와 울새는 어느새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가는 곳이라면 울새는 항상 따라다녔고 아이도 그런 울새를 정말 좋았습니다. 그러다 찾아온 가을날. 울새와 같은 새들이 그 울새를 발견하고 물었어요.
"너는 어째서 그 아이와 함께 있는 거니?"
"우리는 친구니까."
"하지만 우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해.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얼어 죽고 말 거야."
하지만 아이는 울새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울새는 아이에게 있어서 유일한 친구였으니까요. 울새도 그런 아이를 위해 남기로 했습니다. 아이는 무척이나 기뻤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정말로 다른 친구들을 따라 떠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너의 친구는 나뿐인걸."
아이는 그런 울새를 위해 겨울을 준비했습니다. 허름한 집의 틈을 막고 많은 짚을 덮어 따뜻하게 했습니다. 겨울은 무척이나 춥고 혹독했지만 울새와 함께 있기에 따스하고 포근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항상 울새의 곁에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겨울에도 먹을 것은 필요했으니까요. 그러다 아이는 울새가 음식을 먹지도 않고 자기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할아버지! 울새가! 울새가 아파요!"
아이는 울새를 데리고 급하게 옆집 할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아직도 울새가 남아있다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울새가 아프다고요!"
"중요하지 않기는! 이 겨울에 남아있으니 아픈 게 아니냐."
할아버지는 울새를 두꺼운 천으로 덮으며 말했습니다.
"내년 가을에는 꼭 울새를 돌려보내거라."
"하지만 울새는 제 친구예요!"
"그렇지 않으면 울새가 죽게 될 게다."
겨울이 가고 찾아온 봄. 다행히 울새는 기운을 차렸지만 아이는 우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났던 여름날이 되었을 때. 아이는 결심했습니다.
"이번 가을에는 떠나야 해."
"그러면 너는 혼자가 될 거야."
"그래도 네가 죽는 건 싫어."
이어서 찾아든 가을날. 울새가 아이에게 씨앗을 물어왔습니다.
"이건 뭐야?"
"행복이라고 하는 거래. 그게 있다면 나는 너를 찾아올 수 있을 거야."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반드시."
헬레나는 벨카를 데리러 왔다가 서로에게 기대어 이야기를 하고 듣는 소녀들의 모습을 보고 과거 자신과 사샤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 말해야 하는데 차마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었을 때였다. 그녀의 뒤로 타박타박 걸음 하나하나 정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 것은.
"란투아를 떠난다는 게 사실인가?"
헬레나는 그 차분하다 못해 냉정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거무튀튀한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감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창문을 툭툭 두드리는 빗소리처럼.
"오늘 하루 그 소리만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르겠군요."
나름 의사 역할을 했었기 때문일까? 그녀가 떠난다고 하자 아쉬워하는 이들을 떠올렸다. 마지막까지 최악이었던 남자도 함께 떠올랐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굳이 답해드리자면 예, 그렇습니다."
"여전하군."
감정하나 들어가지 않은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사샤의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었노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이제 들으니 그 목소리가 어찌나 쓸쓸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헬레나가 잠깐 심호흡을 하고 뒤돌아보자 회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확실하게 아이올로스와 마주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으로서 마주한 그는 거울 속의 그녀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 힘든 건 당신도 마찬가지였구나.
"역시 저는 당신이 싫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은 사샤를 아프게 한 자의 아들이니까."
"...그런가."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는다. 스스로에게 그렇게나 철저하고 냉엄했던 남자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그런 당신이 사샤와 맺어졌으니. 더욱 싫어했습니다."
헬레나가 사샤를 구하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을, 마음을, 행동을 그가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으니까. 사샤에 대한 마음을 고백할 겨를도 없이 그가 사샤의 남편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알겠습니다. 그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이었는지."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단지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그녀의 가장 사랑스러운 친구를 구해낼 수 없었던 자신을.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저 남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렸을 뿐이었다. 그저 제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가로채였다고 느껴버린 유치한 열병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레 스며나오는 미소를 막지 않았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아이올로스를 향해 헬레나는 말했다.
"분하고 분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투정을 부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헬레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샤가 행복했다는 것 그거 하나면 충분했는데.
"당신은 존경할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헬레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재잘거리는 소녀들을 향해 다가갔다. 마침 이야기도 끝났으니까.
"아가씨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녀의 말에 소녀들이 휘둥그레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들에 헬레나는 미소 짓다가도 뒤늦게 따라오는 씁쓸함을 삼켰다.
"벌써 가는 거야? 얼마 놀지도 못했는데?"
류드밀라가 벨카의 손을 잡고 우울하게 물었다. 그녀들은 배를 타고 돌아가기 위해 영지의 벽까지 나와있었는데 이곳까지 동행한 것이었다. 아이올로스도 한 걸음 떨어져 그녀들을 지켜보고 있는 상태였다.
"류다, 벨카가 곤란해하잖아요."
메디아가 류드밀라를 타이르지만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아닌 척 벨카의 소매를 붙잡고 있었으니까. 벨카를 데리러 온 헬레나가 서로에게 남은 미련을 놓지 못하는 소녀들의 모습을 차마 떼어놓지 못하고 있었을 때였다. 메디아가 결심한 듯 가면을 꺼내든 것은. 이마 부근에 십자 모양이 그려진 수수한 듯 화려한 가면이었다.
"벨카, 가면 두고 가셨었죠?"
메디아가 건네는 가면을 잠시 받아들었던 벨카는 살며시 가면을 천천히 쓸었다. 애틋한 손길로 몇 번이고 가면을 쓸어낸 소녀는 그 가면을 다시 메디아에게 내밀었다.
"받아줘."
"네? 하지만 이건 벨카에게 소중한 게."
"메아랑 류다라면 괜찮아."
결국 메디아는 가면을 받아 가슴에 품었다.
"...간직하고 있을 테니까. 꼭 돌아오셔야 해요?"
벨카의 손을 놓은 류드밀라가 얼굴을 들지 못하는 사이 헬레나는 메디아에게 다가갔다.
"메디아 아가씨. 저는 당신께 사과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네? 그게 무슨."
"사샤의 친구라면서. 그녀의 딸인 당신을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었으니까요."
그제야 그녀를 떠올린듯한 메디아의 모습에 헬레나는 쓰게 웃었다. 메디아에겐 아주 어렸을 적의 일이니 기억이 나지 않을 만도 했다.
"죄송합니다. 지금도 저는..."
"벨카를 따라가기로 한 거죠?"
"...네."
"저는 괜찮으니까. 벨카를 지켜주세요."
"예."
헬레나는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결국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뱃사공에게 출발 신호를 보냈다.
"결국 가버렸네요."
"무사히 돌아오면 좋겠다."
메디아와 류드밀라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무조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는걸.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그렇게 그녀들은 여름을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