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운명.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도 이미 일어난 현상은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류드밀라는 책에 쓰인 그 구절을 멍하니 훑었다. 그건 연금술을 부활시켰다고 전해지는 마법사 요한 파우스트의 말이었다. 그가 정말 저런 말을 했었는지는 모른다. 그는 사백 년 전에 살았던 자였고 아무리 마법사라고 해도 그 정도로 오래 살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그녀와 관계된 사람이 하필이면 같은 병에 걸리게 된 것 또한 규칙이 아닐까 생각했다.
"류다. 자요?"
계속 책을 읽느라 너무 조용했던 탓인지 메디아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다행이네요. 요즘 계속 책을 읽다 자는 일이 늘었잖아요. 밥도 제대로 드시지 않으면서."
최근 그녀들의 일상은 이랬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각각 읽을만한 책을 찾아 눕거나 앉은 채 읽으며 시간을 때우다 잠이 오면 잠드는 일상의 반복. 아무리 우기라지만 작년에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복도에서나마 놀거나 방을 찾아가 노는 일이 많았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 조용한 생활이었다.
"메아도 나랑 똑같으면서."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요."
때문에 아이올로스와 히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녀들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들이 이렇게 된 건 벨카와 어셔가 영지를 떠난 후부터였으니까. 이유는 그녀들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녀들의 우울함은 더욱 심했다. 마음 같아선 그들이 간 영지에 놀러 가고 싶었지만 아이올로스와 히스가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나마 편지로나마 연락은 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리 좋은 소식은 없었다. 그렇게 그녀들이 책을 읽는 것도 잊고 빗소리만 듣고 있었을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건.
"아가씨.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라구요?"
손님이라니 이런 때에 말인가? 잠시 시선을 마주친 그녀들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나서자 그곳에는 아냐가 서있었다. 메디아는 그녀를 보고 잠깐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손님은요?"
"응접실에 계십니다."
응접실에 있다면 적어도 내성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메디아와 류드밀라가 그녀를 따라 응접실에 도착했을 때 그녀들은 그 손님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꽃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가녀린 몸과 온화한 빛을 머금은 금빛까지. 자칫하면 메디아의 어머니와 헷갈릴 수도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녀들은 그녀가 누군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벨카!""
그녀들은 놀라면서도 무척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달려들듯 다가가 안겼다. 그러자 힘겨워하면서도 어떻게든 힘을 주어 그녀들을 받아주는 소녀의 모습에 메디아와 류드밀라는 아차 하며 물러났다.
"미, 미안해요."
"으아, 미안. 너무 오랜만이라."
"괜찮아."
하지만 그녀들의 사과에 벨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물러난 그녀들을 그대로 꼭 껴안는 것이 아닌가? 메디아와 류드밀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야말로 보고 싶었는걸."
잘못하면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그대로 묻혀버릴 만큼 희미하고 여린 소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그녀들은 한동안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오랜만에 안긴 소녀의 품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그러다 이번엔 벨카가 뒤로 물러나더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메아, 류다. 밥, 먹었어?"
""아.""
그녀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입맛이 없다는 이유로 제대로 밥을 먹은 일이 얼마 없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러니 벨카가 알아챌 수밖에. 그녀들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지만 소녀의 금빛이 뒤쫓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결국 얼마 후 메디아와 류드밀라는 주방의 테이블에 앉아 벨카가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이런 거."
"그러게요."
벨카가 성에 있을 땐 가끔씩 음식이나 간식거리를 만들어서 같이 나눠먹곤 했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가 조리된 음식을 테이블로 가져왔다. 그녀가 만들어낸 건 역시나 애플파이였다. 그리고 익숙하게 여섯 등분으로 나누어 따로 올린 접시를 바로 옆에 놓으려던 소녀는 멈칫거리다 접시를 옮겨 메디아의 앞에 놓았다. 잘못하면 놓쳐버렸을 만큼 작은 모습이었지만 지켜보고 있으면 모를 리가 없었다.
메디아는 그 모습을 모른 척 넘기며 접시를 받았다. 그야 그 자리는 항상 어셔가 앉던 자리였으니까. 항상 함께였던 소년의 빈자리가 더욱 허전했다.
"오, 오랜만이라 그런가 더 맛있는 거 같네!"
파이를 나누어 받은 류드밀라가 분위기를 바꾸어보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너무 티가 나서 더 어색했다.
"류다. 티가 너무 난다구요!"
"으으! 그럼 메아가 어떻게 해보든가!"
"저도 모른다구요. 그런 거!"
메디아가 너무도 어색한 류드밀라의 행동에 속삭이며 타박해 보지만 정작 그녀에게도 이 분위기를 풀어볼 만한 대책은 없었다.
"후후."
하지만 그때 들려오는 소녀의 웃음소리에 놀란 그녀들이 벨카를 바라보자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응, 나 류다와 메아가 정말로 좋아."
"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셔도."
"으에, 난 몰라."
때문에 괜히 그녀들만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 몰랐다. 오랜만에 먹은 애플파이는 무척이나 달콤했다. 그렇게 허전했던 배를 채우고 함께 차를 마셨다. 조금은 어색하지만 불편하지만은 않은 침묵 속에서 가방 먼저 입을 연 건 메디아였다.
"어셔는 좀 괜찮나요?"
어셔의 이야기에 류드밀라가 몸을 떠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래도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힐끔힐끔 벨카를 보았다. 그나마 좋은 소식을 기대했건만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는 어셔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초가 없대."
"그럴 수가."
류드밀라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치료할 수 없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으니까. 하필이면 그녀의 친구가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병에.
"...그래서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했어."
"뭐?!"
"뭐라구요!?"
이어지는 벨카의 말에 그녀들이 화들짝 놀라 소녀를 바라보면 여느 때처럼 그녀들을 마주하는 금빛을 볼 수 있었다. 표정이랄 것이 거의 없는 소녀였지만 금빛 속에 스며든 따스하고 다정한 빛에 류드밀라는 입을 꾹 다물었고 메디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물었다.
"떠난다니. 어디로요?"
"병은 파르즈에서 왔다고 했어."
"파르즈라니..."
"파르즈라면, 구름 지대 너머에 있는 곳이잖아!?"
소녀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그녀들은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설마 구름 지대를 넘어가실 생각이신 건가요?!"
직접 건넌 적은 없지만 구름 지대가 어떤 곳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지상에 존재하는 지옥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런데 그런 곳을 건너겠다니.
"안돼. 가지 마! 가면 안 돼!"
류드밀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벨카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때문에 컵이 쏟아져 얼마 남지 않았던 찻물이 테이블을 타고 뚝뚝 흘렀지만 그녀는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벨카보다도 작은 류드밀라였지만 그럼에도 놓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한 손으로나마 꼭 껴안았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응? 가지 마. 우리가 좋다고 했잖아."
류드밀라는 이럴 때마저 소녀를 완전히 붙잡을 수 없는 작은 몸과 하나 남은 손이 불편해 서러웠다.
"가지 마. 우리도 너를 정말, 정말 좋아하는데. 너까지... 너까지 죽게 할 수는 없단 말이야."
건장한 어른들도 여차하면 죽는다는 구름 지대다. 그런 구름 지대를 벨카처럼 여린 소녀가 건널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셔가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어셔도 그녀들에겐 소중한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벨카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메디아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류드밀라와 다르지 않은 듯 벨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 지대를 건널 방법은 있는 거지?"
류드밀라는 결국 애원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물었다. 그저 막연히 구름 지대를 건너겠다는 생각이라면 그녀는 벨카에게 원망을 받는다고 해도 막아설 생각이었다.
"마법사가 파르즈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어."
"마법사라니...!"
"...그런."
그리고 돌아오는 터무니없는 말에 그녀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야 마법사란 길고 긴 란투아의 역사 속에서도 고작 11명 만이 존재한 이들이었으니까. 그마저도 아무리 짧아도 사이에 100년이란 텀이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설마 아무도 모르는 사이 12번째 마법사가 존재하고 있었단 말인가?
"증명, 할 수 있어?"
"응, 헬레나도 알고 있는걸."
헬레나라면 어셔의 병을 보러 왔던 연금술사였다.
"뭐야. 정말. 그러면 말리고 싶어도 말릴 수가 없잖아."
"벨카도 참. 그런 사람은 또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메디아는 허탈하게 웃었다. 건너갈 방법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것이었다면 끝까지 말릴 생각이었는데 마법사 같은 존재와 동행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도 없었다. 류드밀라는 무슨 수를 써도 벨카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에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벨카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그것이 떠나지 않겠다는 말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미안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미안해하지만 말고 같이 있어 달라구요."
메디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들은 결국 벨카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어."
소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류드밀라는 퍼뜩 고개를 들며 그렇게 말했다.
"아직 시간은 남은 거지?"
"응. 적어도 오늘 하루는."
"그럼 우리 오늘은 계속 놀자."
그녀는 곧 벨카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놀자니. 어떻게요?"
메디아도 벨카의 반대쪽 손을 잡으며 물었다.
"뭐라도 좋아. 실뜨기도 좋고. 술래잡기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으니까."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그렇게 소녀들이 떠나간 주방.
"란투아를 떠난다고...?"
비어 있어야 했을 그곳에서 누군가의 허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입구 근처의 구석진 공간에서 빠져나온 건 로기였다.
"로기! 집중해라!"
"윽! 알았다고요!"
그는 오늘도 샬비에게 훈련받으며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요즘 따라 통 집중을 못 하잖냐. 이대로라면 기사는 어림도 없다."
"...네."
훈련이 끝난 뒤 이어지는 그의 타박에도 로기는 기운 없이 답하고 터덜터덜 방으로 향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보기에도 스스로가 형편없는 모습이라는 건 자각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달 전 어셔가 병에 걸려 도나르가 다른 영지로 발령 나면서 벨카까지 함께 이곳을 떠나고 그는 무슨 일이라도 쉽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이미 포기하지 않았냐고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하루하루 멀리서나마 소녀를 지켜보는 일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도 해보았지만 어느 곳에 있던 무심코 따라가 버리는 눈은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하지만 이렇게 볼 수도 없는 상황이 오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하필이면 비는 비대로 쏟아져 이제는 움직이기도 싫어서 소녀가 떠나갔던 성문만을 멍하니 보던 중이었다. 성안으로 들어오는 벨카를 발견했던 건. 처음 로기는 자신이 소녀가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눈을 씻고 봐도 벨카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는 또 소녀를 뒤쫓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다가갈 수는 없어서 몰래 숨어서 바라만 보다가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그는 터벅터벅 걸어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애플파이를 보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세 조각 남은 애플파이가 있었다. 꿀꺽 침을 삼켰다. 이걸 자신이 먹어도 되는 걸까. 그가 접시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아."
뒤에서 들려온 발소리와 목소리에 돌아보면 류드밀라가 서있었다. 벨카와 자주 어울리던 소녀이기에 로기도 기억하고 있었다.
"류다! 뭐해요? 파이 챙겨 온다면서요?"
이내 멀리서 들려오는 메디아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테이블로 총총 다가왔다. 그가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이내 애플파이가 담긴 접시를 들고는 돌아서서.
"안녕."
무미건조한 한마디를 남기고 떠나갔다. 주방에는 아직 소녀의 따스함이 남았는데 때문에 그는 더 춥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허락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