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운명.
본래 드넓은 들판을 자랑했던 란투아의 평야는 오랫동안 내린 비로 인해 갈빛의 바다가 되어 있었다. 들판의 흔적은 흙탕물에 떠오른 노랗게 물든 식물들이 물살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뿐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물살이 거칠지 않아 나룻배는 순조롭게 갈빛의 바다를 나아가고 있었다. 뱃사공에게는 익숙하다 못해 신물이 나는 광경. 그 가운데 익숙하지 못한 손님들이 있었다.
노를 저으며 나룻배를 움직이던 뱃사공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힐긋힐긋 자신의 배를 탄 손님들을 훔쳐보았다. 그는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오며 많은 사람들을 태워보았지만 이번처럼 독특한 이들은 또 처음이었다. 자칫하면 난쟁이로 착각할 만큼 여린 소녀와 하녀복을 입은 여인까지. 평소라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손님에게 말을 걸어 이런저런 대화라도 하며 시간을 때웠을 것이다.
대화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날씨가 좋지 않은 이상에야 손님들도 지루한 시간을 대화로 흘려보내는 건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상대에게 말을 걸어볼 껀덕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괜히 숨을 쉬기 위해 내놓은 코를 매만졌다. 그에게 일을 맡긴 영주는 그가 초록 난쟁이라고 해서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딸과 하녀까지 그러리란 보장도 없었으니까. 그럴 경우엔 대화를 엿듣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어째 그녀들은 입도 뻥긋하는 일이 없었다. 소녀는 어디를 바라보는 알 수 없는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볼 뿐이고 여인은 소녀가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을 든 채 눈을 감고 다소곳하게 소녀의 곁을 지키고만 있으니. 말을 거는 것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이런 때 배를 빌려 타시다니 급한 일이라도 있나봅니더?"
그래도 저런 미인들에게 말조차 걸어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억울해진 그는 귀동냥으로 들어왔던 것처럼 말을 가다듬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가 말을 걸어서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로서 저런 미인들이라면 한 번쯤 대화 정도는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초록 난쟁이라고 저들의 하얀 피부가 예쁘지 않은 건 또 아니었으니까. 그의 말에 헬레나가 눈을 떴다.
"그쪽이 알 필요는 없을 텐데요."
"그, 그렇심꺼."
아니나 다를까 그녀에게서 돌아온 까칠한 반응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눈매가 좀 날카롭다 뿐이지 그녀의 목소리에 적의나 혐오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타인을 바라보듯 무심한 목소리에 오히려 안심했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습니꺼? 이래 봬도 알고 있는 이야기도 많습니더!"
그는 어떻게든 관심을 끌어보고자 말했다. 미인들과 말을 섞는 건 둘째치고 조용히 노만 젓고 있다 보니 너무 심심했기 때문이다.
"그다지 흥미가 가지는 않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손님이 사교성이 좋으면 좋지만 그건 그의 희망사항일 뿐이고 이 정도면 오히려 괜찮은 첫 손님이었다.
"저들은 동업자입니까?"
그는 이어서 들려온 헬레나의 말에 의아해하며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기겁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수십은 되어 보이는 초록 난쟁이들이 제각각 나룻배를 타고 그들이 가야 할 길을 막고 있었으니까. 하체만 넝마로 간신히 가려 놓고 당당히 초록 피부를 드러낸 그들은 창과 짱돌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는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그와 같은 초록 난쟁이들은 들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거처를 옮기는 생활을 하다가 들판에 물이 차는 우기가 되면 물이 다 차기 전에 물려받은 배를 타고 손님을 태워주며 돈을 받았다. 이때만큼은 회색 난쟁이나 인간들도 그럭저럭 상대해 주기에 생업으로 삼은 이들이 많았지만 그중에는 저들처럼 노략질을 하는 이들도 있었던 것이다.
"도적놈들임더! 일단 뱃머리를 돌리겠심더!"
그는 급하게 돌아가려 했지만 헬레나는 뒤를 힐긋 보며 말했다.
"아니요. 이미 포위된 상태입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주변을 보니 확실히 나룻배를 탄 놈들이 자신들의 배를 굵은 밧줄로 이어서 그들을 가둬둔 모양새였다. 길목을 막고 있던 이들 말고도 쫓아오고 있던 이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틈으로 빠져나가려 해도 저 밧줄에 걸리리라. 그의 불찰이었다. 평소라면 진작에 낌새를 눈치채고 멀리 돌아갔을 텐데 손님들의 미모에 너무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가 침음을 흘리며 어쩔 줄 모르고 있었을 때였다.
"아저씨? 에이트리 아저씨 아임꺼?"
난쟁이들 사이에서 그를 아는 듯 친근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 건. 그 또한 그가 자신이 아는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자 그에겐 익숙한 초록 난쟁이가 보였다.
"그레르! 이 고얀 놈! 니 아비가 물라 준 배로 노략질이나 하러 다니라 캤나!"
그가 펄펄 날뛰며 소리치자 그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답했다.
"하이고. 아저씨나 아버지처럼 일해서는 돈 버는데 한 세월 아임꺼?"
"그게 무슨 배인 줄 아나! 노략질에나 쓰라고 물라 준 배가 아니라 캐도!"
초록 난쟁이들이 타고 다니는 배는 그냥 배가 아니었다. 그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온 소중한 배였던 것이다. 돌이라기보단 철에 가깝고 철이라기엔 돌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배는 무척이나 가벼워서 이렇게 물에도 잘 떠다니며 썩는 일이 없어서 그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런 물건으로 노략질이라니 그럼에도 그레르는 시큰둥했다.
"또 그 조상님이 물라 주신 배라느니 뭐니 할 생각임꺼?"
"고걸 알고 지랄이가! 지랄은!"
"됐고! 아저씨니까 돈이랑 그 아씨들만 내놓으면 몸 성히 보내드릴게."
"무슨!"
그는 그제야 이번에 그의 배를 탄 손님들이 보통 아가씨들이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오랜만에 인간 아씨들의 하얀 피부와 속살이 맛보고 싶어서 말임더."
그레르를 비롯한 도적들의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리며 그녀들을 훑는 모습에 에이트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다 다른 초록 난쟁이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제 보니 아는 얼굴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리으르에 알리르까지!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팡이들이!"
그가 모르는 얼굴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이 이제 막 성년에 든 녀석들이었다.
"아따 시끄릅네. 고마하고 그 아씨들이랑 돈만 내놓으면 성히 보내드린다 캐도."
"이해를 못 하긋네. 인간들이 우리헌티 무얼 해줬슴꺼? 깡그리 뼈를 발라 묵어도 모자른디."
그러면서 창을 어깨에 탁탁 두드리는 모습이 위협적이라 그는 끙 앓았다. 그가 늙은 편은 아니라지만 혈기 넘치는 녀석이 한둘도 아니고 이렇게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였다.
"저들과 아는 사이십니까?"
"예, 예에. 원래는 사공이나 해야 할 놈들이 노략질이나 하고 앉았으니 고개를 못 들겠습니더."
헬레나의 말에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그러면 저들을 전부 수장시켜도 문제는 없겠군요."
"예?"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린 순간 볼 수 있었다. 헬레나가 작은 활처럼 생긴 석궁에 화살을 장전하는 모습을.
"저 아씨부터 잡아... 끄아아앏!"
그것을 눈치챈 그레르가 소리치려 했지만 헬레나가 석궁을 쏴 그의 다리를 맞추는 것이 먼저였다. 무릎 관절을 정확히 꿰뚫은 화살에 비명을 지르다 물속으로 빠져버린 모습을 보며 침묵이 흐르는 사이 헬레나는 차분히 다음 화살을 장전했다.
"꺼얽!"
"뭐카나! 빨리 때려 잡아뿌라!"
한 명이 더 물에 빠진 뒤에야 그들이 뒤늦게 반응하고 돌 따위를 던지거나 창으로 찌르려 다가오지만 헬레나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그들을 향해 던지는 것이 먼저였다. 그와 동시에 펑! 하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들이 탄 배들이 때아닌 파도에 사정 없이 흔들리는 가운데 그녀가 무언가를 던졌던 곳에 있던 초록 난쟁이들과 그들의 배들은 조각나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때문에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사이였다.
"물러나지 않는다면 모조리 저렇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들은 포위를 풀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쳐버렸다.
"이제 출발하시죠."
"옙!"
그 광경에 눈만 끔뻑이던 그는 헬레나의 말에 어느 때보다 열심히 노를 저어 빠르게 본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영지로 들어가고 난 뒤 그는 자신이 꿈을 꾼 건 아닐지 고민하다 도나르에게 받았던 주머니가 떠올라 열어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겁나게 무서운 분들이었구먼."
주머니 안에는 그녀들을 반드시 안전하게 데려오라는 도나르의 쪽지가 들어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혹시 여파가 닿았다거나."
본영지에 들어선 헬레나가 먼저 한 일은 벨카의 상태를 보는 것이었다.
"이게 있었으니까."
그녀의 물음에 소녀가 보이는 건 두꺼운 털 가죽을 안감으로 삼아 미늘을 덧대 놓은 망토였다. 혹시 몰라서 헬레나가 벨카에게 덮어준 물건이었지만 그것이 완전히 몸을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소녀에게 상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저의 공방으로 가시죠."
그리고 헬레나가 벨카를 데리고 도착한 것은 원래 그녀가 살았던 집이었다. 원래 비워두는 일이 많았고 아직 이사를 하겠다는 말을 해놓지도 않아서 약재와 도구들에 먼지가 쌓인 모습이 엿보였다. 그중에 그녀가 찾던 바짝 마른 식물이 있었다. 헬레나는 그것을 그대로 소녀에게 내밀었다.
"이 식물의 이파리 하나를 통째로 씹어 드시면 약 한 달간은 임신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챙기지 못한 도구도 있었지만 피임약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약초이지만 이런 걸 먹는 모습을 도나르나 시프에게 들켜선 안 될 일이었으니까. 마른 약초는 쓰기도 하고 씹기도 힘들 텐데 벨카는 헬레나가 준 약초의 이파리를 꼭꼭 씹어 삼켰다. 하지만 소녀가 굳이 그녀를 따라 본영지에 온 건 이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아가씨께서는 작별 인사를 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고 하셨지요."
"응."
헬레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짐작이 갈 것 같았다. 그녀가 아이올로스와 대화를 나누고 나왔을 때 보았던 메디아와 류드밀라의 모습을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용무가 있는 곳에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헬레나는?"
벨카가 투명한 금빛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에 헬레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저에게도 작별 인사를 해야 할 분들이 있으니까요. 끝나고 나면 다시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녀에게도 란투아를 떠나기 전에 청산해야 할 것들이 있었으니까. 헬레나는 먼저 벨카를 내성에 데려다주었다. 다행히 소녀를 잊지 않은 경비들이 들여보내주었고 그녀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뒤돌아 추억을 되짚으며 나아갔다. 이전처럼 흉터와 같았던 추억을 되돌아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래된 물건을 정리하듯 상자에 담아둘 때가 온 것뿐이었다. 그렇게 하나둘 정리하다 가장 먼저 도달한 곳은 역시 드발린의 마법서점이었다.
"계셨군요."
"헬레나로구나."
헬레나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의 추억처럼 늙은 드발린이 반겼다.
"무슨 일이냐? 요즘 들어 소식도 통 들어오질 않더구나."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
그의 눈이 헬레나를 걱정스럽게 응시했다. 그녀는 목에 걸려 넘어오지 않으려는 말을 잘게 부수어 뱉어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주 먼 곳으로 가는 모양이구나."
"예.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내 그녀가 돌아서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어쩌면 최대한 빨리 떠나는 게 좋겠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사실은 말이다. 영주님에게 받았던 책이 사라졌단다."
"아이올로스 님에게 받았던 책이라면."
헬레나는 그가 썼던 책을 떠올렸다. 그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샤를 그리워하며 썼을 책이었다. 그러다 정작 완성했을 땐 마주하는 것조차 괴로워서 드발린에게 주었다던가. 그런데 그 책이 어째서.
"분명 오랜 친구처럼 이상하게 친근한 누군가에게 싸게 팔아버린 기억은 있는데. 그 친구가 누구인지 어떤 얼굴인지 기억이 나질 않아."
"그 책을 팔았단 말입니까?"
"이상하지. 이상해. 나는 누구라 해도 그 책을 팔 생각이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헬레나와 그는 공통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마법사군요."
"그렇겠지. 그러니 조심하거라. 정말로 위험한 자인 듯하니."
하지만 드발린이 모르는 것이 있다면 그녀는 이미 그 마법사를 만났으며 곧 그와 함께 떠난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