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운명.
도나르는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밀린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주가 공석이었던 터라 일이 많기는 했지만 영주가 된 지 한 달이 되어가는 지금 그럭저럭 끝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도나르, 네가 영주라니."
"진짜 상상도 못했는데."
하지만 오늘이 유독 바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이전에 재판의 일로 본의 아니게 영주로서 마을 주민들과 안면을 트게 되면서 만난 옛 동료들을 성에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늘 조용했던 성은 떠들썩하게 활기를 띠었다.
"야 이것들아. 내가 뭐 어때서?"
그것이 단순히 놀리는 것이라는 건 알지만 도나르는 스스로도 자신이 영주 일이 썩 맞지는 않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래도 상관 보고서까지 짬처리 당할 일은 없어서 나쁘진 않더라."
"...갑자기 엄청나게 부러워지는데?"
"그래서 고향 친구끼리 집들이 파티하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왜 불렀냐? 굳이 우리들을 콕 집어서."
도나르가 그럴 의도였다면 굳이 기사로서 일하다 지금은 불구가 되어 은퇴한 그들만 따로 불러들였을 리가 없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스스럼없는 관계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도나르는 그들을 이끌어 온 리더였으니까.
"별 건 아니고. 너희들 후임 양성할 생각 있냐?"
"엥? 우리가?"
도나르가 그들에게 계약서를 내밀자 그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건네받았다.
"세상에 철전 40전이라고? 야, 이거 우리 도와준다고 무리하는 거 아니지?"
"나도 무슨 생각인지 이해하긴 하는데 여기선 기사로만 일해도 기본 월마다 130전은 받는다고."
참고로 잠시나마 기사단장으로 있었던 도나르의 월급은 더 높았다. 도나르도 아직까지 적응이 안 되는데 막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을까. 아무튼 저 월급은 합리적인 계산을 통해 나온 값이었다. 이 광산마을이 제법 잘 사는 곳이기도 했고 지금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퍄랴르가 숨기거나 모아둔 재산을 몰수하면서 재정이 넉넉하기도 했으니.
"안 하면 손해지 이건."
"콜!"
"뭐해? 빨리 계약서랑 펜 좀 줘 봐."
도나르는 그들이 계약서의 내용을 읽고 사인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물었다.
"이 마을 경비대는 어때? 쓸만하냐?"
"그럭저럭. 그나마 건장한 녀석들을 모아놔서 힘은 넘치는데 짬 좀 찬 징집병보다 못해."
"그래도 쓸만한 녀석들 있으면 골라서 양성해 봐. 그럴듯한 기사로 키우면 성과급도 있으니까."
그러기가 무섭게 누구를 키우겠다느니 떠들썩한 녀석들에게 각자에게 주어질 방의 열쇠를 주었다. 말을 들어보니 지금까지 경비대랑 같이 활동하면서 퍄랴르에서 그들과 비슷한 급여밖에 받지 못했다는 모양이니.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기사였던 그들이 몬스터를 상대하지 못할 건 없는데. 그렇게 떠들썩한 시간이 지나가고 그들은 각자의 방을 보겠다며 흩어졌을 때 혼자 남은 우르가 보였다.
"우르? 넌 방 보러 안 가냐?"
"그냥 네가 정말 우리 때문에 무리 한 건 아닌가 싶어서."
"거 무리한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럼 됐고."
그가 손을 휘휘 젖자 그제야 우르는 피식 웃었다.
"기사들은 됐다 치고 성의 허드렛일은 어떻게 하게?"
"공문을 내야지 어떻게 하겠냐."
하녀의 대부분은 기사처럼 전문적인 능력을 필요로 하진 않으니 비교적 쉽게 구해지긴 할 것이다.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인력을 보충하는 게 좋을 텐데. 그가 고민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럼 초록 난쟁이들을 고용하는 건 어때? 걔네 아직도 그 성당에 있다고."
우르의 말이 솔깃하긴 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과의 문제나 고용문제도 해결하기 수월할 테니까. 걸리는 점이 있더라도 신상필벌만 확실히 하면 문제가 없을 테고.
"집안일은 할 줄 아냐?"
"내 밥을 걔네들이 해 줘."
"나쁘진 않을 것 같네."
그렇게 일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을 즘이었다.
"그, 애는 괜찮냐? 양딸이라며?"
우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쩌다 보니 그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그 계기가 썩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까. 우르가 말하는 건 얼마 전 벨카에게 일어났던 일이 분명했다. 아마 그들이 나가기 전까지 유난히 떠들썩하게 군것도 그 때문이리라.
"아아, 뭐. 놀란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약초꾼이 구해줬다니까."
그런 일도 있었으니 친근한 사이라곤 해도 성에 부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제 이 마을의 영주였다. 이대로 성을 비워둘 수는 없었다. 다행히 지금은 우기라 몬스터들이 쳐들어 오지 않았지만 우기가 끝나면 다시 몬스터들이 쳐들어 올 것이다. 도나르는 그전에 이 성을 원활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집에 다른 이들을 들이겠다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시프와 의논한 끝에 필요한 일이라 판단했으니까.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나르의 허락과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헬레나였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그녀의 모습에 도나르는 놀라고 있었다.
"헬레나, 무슨 일이야?"
평소 그녀는 무척이나 철저한 성격이었다. 언제나 입고 다니는 하녀복이라던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을 정도였는데 오늘따라 정돈되지 않은 차림새는 흙탕물까지 뒤집어써서 엉망이라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러자 헬레나는 무어라 말하려다 그의 앞에 있는 우르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우르가 그것을 눈치채고 밖으로 나간 뒤에야 헬레나는 입을 열었다.
"어셔 님을 치료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야?"
그 말에 도나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건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는 헬레나의 표정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건 아무리 봐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 방법은?"
"이곳을 떠나 파르즈로 가야만 어셔 님의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잠깐의 희망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젠장. 구름 지대를 건너야 한다고?"
헬레나는 머리를 부여잡는 도나르의 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예. 하지만 구름 지대를 건널 방법이 생겼습니다. 들어오십시오."
도나르가 그에 대해 묻기 전에 그녀는 누군가를 불러들였다.
"하, 이것 참. 이렇게 끌려오게 될 줄이야."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어젯밤 그녀를 쓰러트렸던 마법사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헬레나가 도나르를 만나러 오기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침이 밝고 어셔를 돌보기 위해 시프가 왔을 때 헬레나는 소녀를 데리고 방을 나왔다. 시프는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었지만 헬레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며 나중에 설명하겠다는 말만을 남기고 자신의 방으로 벨카를 데리고 갔다.
결코 좋은 일이 있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아 묻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법사가 방까지 침입한 일이었다. 어젯밤, 그녀가 쓰러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야 했으니까. 헬레나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는 벨카를 지켜보았다. 무엇보다 지금 소녀를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혼자 두었다가는 모르는 사이에 바스러져 버릴까 봐. 그녀가 침을 삼키고 물으려던 찰나였다.
"아마라트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
"네?"
벨카에게 선수를 빼앗겨 헬레나는 잠시 알아듣지 못했지만 곧 그녀의 말을 되새기고 깨달았다.
"그건 설마."
"응. 그가 말했어. 파르즈에 데려다주겠다고."
확실히 마법사의 힘이라면 단신으로 구름 지대를 건너는 것 따위 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그 약초를."
"파르즈에서 캐트시를 데리고 왔다고 했어."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하며 캐트시 같은 수인이 파르즈가 아닌 란투아에 노예로서 떠돌고 있었는지. 그가 이 병과 치료할 수 있는 약초를 아는 이유까지도. 하지만 그게 정말 단순한 호의로 이루어질만한 일인가? 마법사가 정말 대단한 힘을 가진 이라곤 해도 어쨌든 인간이었다. 욕심 같은 게 없을 리가. 무엇보다 어제 잠시 보았던 마법사가 위험한 자라는 걸 그녀는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끼고 있었기에 물었다.
"정말 그것뿐이었습니까?"
"...."
벨카는 침묵했다. 헬레나를 등진 채 그저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면서. 하지만 그 때문에 무언가 더 있다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침묵. 메마른 정적의 끝에서 소녀의 입이 겨우 열리고.
"그는 나를 원한다고 했어."
헬레나는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설마설마하던 생각이 지독한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말해줘. 정말로 방법은 그것뿐인 거지?"
소녀의 목소리는 덤덤하게 떨리는 일도 끊기는 일도 없었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해?"
하지만 정작 왜 그녀의 말을 듣는 헬레나의 목이 달군 쇠구슬을 삼킨 것처럼 뜨겁고 괴로운가? 그 답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상냥한 사람은 때때로 그 상냥함 때문에 잔인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때가 오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녀는 감히 소녀를 도와주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한다는 것만으로 그것은 기만이 되어버리기에 목을 지져버릴 듯 솟구쳐 오르는 그 말을 꾹 눌러야만 했다.
하지만 소녀는 그조차도 눈치채어버린 것일까? 벨카는 헬레나에게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인다. 때문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덕분에 말문이 트였다. 자신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제가 함께 하겠습니다."
잔뜩 갈라지고 트인 목소리였지만 그 뜻이 벨카에게 전해진 것일까? 그녀를 토닥이던 작은 손이 멈추었다.
"어째서?"
소녀의 물음은 헬레나가 언제고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과도 같았다. 근 한 달간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서 기어코 얻어낸 해답.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벨카가 사샤와 너무 닮았기 때문에 자신이 착각하는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추억을 닮았다는 이유로 소녀에게 반해버린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계속해서 억누르고 외면해왔던 마음이 결국 터져 나와버렸다.
"...미안해. 나는 너에게 아무런 보답도 할 수 없어. 나에겐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마음에 돌아올 대답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럼에도.
"저는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녀를 감싸 안은 소녀의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울음을 터뜨릴 듯 안쓰럽고 여린 울림이.
"당신에겐 아무런 이득도 없어. 힘들고 아프고 괴롭기만 할 거야. 그런데 어째서?"
"그 이유를 당신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래, 소녀는, 벨카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괴로운 이유야말로.
"사랑하니까요. 그 사랑에게서 자그마한 기대를 품을 수는 있겠지요."
그녀의 모습이 언제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보기보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가면을 쓰고 다니며 단 것을 좋아하면서도 제 몫보다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나누었다. 작은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 조금쯤은 어리광을 부릴 수 있을 텐데. 의젓하게 밤을 새워가며 어셔의 몸을 닦아주고 돌보던 소녀를 기억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일 뿐입니다. 그보다는 그 사람의 옆에 서서 그 사람을 보고 안으며 그 사람에게 인생의 일부가 되고 싶은 마음을. 저희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사랑."
벨카가 그녀의 말을 따다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러니 감히 당신에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신과 함께하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벨카는 뒤로 물러나며 헬레나와 마주했다. 그제야 보게 된 소녀의 얼굴은.
"응, 나, 어셔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어."
쏟아질 듯 쏟아지지 않는 이슬을 금잔화 속에 가득 머금고 웃고 있었다. 헬레나는 이후로 곧장 약초상을 찾아갔다.
"무, 무슨!"
쾅 하고 거칠게 열어젖혀진 문에 약초꾼이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지만 헬레나는 그 눈빛 속에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단검을 빼내들어 그의 목에 겨누었다.
"어쭙잖은 연기는 집어치우십시오. 당신의 정체를 알고 왔으니까."
"큭, 뭐야. 벨카에게서 알아낸 건가? 생각보다 입이 가벼운 아가씨였나 봐?"
"그분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의 비웃는 목소리에 헬레나는 인상을 구기며 단검을 더욱 들이대지만 그는 우습다는 듯.
"그래서 뭐? 어제의 복수라도 하겠다고? 아니면 나를 죽이겠다고? 불가능할 텐데."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말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그였다.
"닥치고 어제의 그 어두침침한 모습으로 따라오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드릴 테니."
분명 헬레나 말은 소녀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걸 뜻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의 눈에 들어찬 독기에 그는 얼떨결에 끌려오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