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운명.
사내에게 턱을 붙잡혀 강제로 그를 올려다보게 된 벨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난데없이 나타난 괴한에게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도 소녀의 금빛은 그가 뒤집어쓴 로브 아래를 직시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어?"
"무엇이?"
문득 흘러나온 벨카의 말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으나.
"당신이 그 사람의 이름을 뒤집어쓴 건."
"흐, 하하, 역시 눈치를 챘나. 그래, 덜떨어진 약초꾼을 연기하는 것도 지루한 참이었지."
그는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로브 아래의 칠흑을 가득 머금은 것처럼 광택 하나 나지 않는 검은 머리카락부터가 그가 알비스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알비스는 금발이었으니까. 그리고 드러나는 얼굴 또한 알비스의 것이 아니었다. 둥그스름해서 순한 인상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던 알비스와는 달리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사내는 그 눈동자마저 피처럼 붉었다.
"이 거죽을 뒤집어쓴 지 고작 한 달도 안 됐는데. 이 마을에는 성가신 것들이 많아서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고 있었다.
"언제쯤 다 처리하고 떠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름을 빼앗긴 사람은?"
벨카는 그렇게 물었지만 저 금빛에 스며든 책망이 이미 그가 알비스를 어떻게 했는지 눈치를 챈 듯했다.
"처리하는데 꽤 고생하긴 했지. 그냥 묻어버리면 편하긴 하지만. 지금 같은 때에 그랬다가는 땅 위에 드러날 테고. 태우면 태우는 대로 눈에 띄지."
그는 그녀의 생각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건 마법사인 그에게 거리낄만한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귀찮지만 하나하나 잘라서 약초들과 함께 정성스럽게 보관해 줬지."
오히려 자랑이라도 하듯이 제가 한 일을 늘어놓았다. 그가 오랜만에 즐겼던 일이기에 그 일을 말하는 것이 더욱 즐거웠지만 점점 더 창백해지는 소녀의 얼굴을 보고 그만두기로 했다.
"아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아프지 않게 해줬으니까."
이토록 여리고 사랑스러운 소녀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좋으련만. 물론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알고 있었다.
"특별한 마녀는 생명을 대가로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지?"
그와 동시에 그를 바라보는 소녀의 금빛에 경악과 더불어 그와는 상반되는 싸늘한 감정이 스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 보고 있지 않았다면 발견하는 것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희미하지만 섬뜩한 감정. 그것이 마녀의 역린이라는 것을 아는 그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말을 이었다.
"워워, 진정하라고. 나는 그런 위험한 거래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마녀와의 거래에 대해 어설프게 알고 있는 자들은 거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눈이 멀어 가볍게 거래를 하고 말지만 그는 마녀와의 거래가 그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한 행위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녀의 미움을 사는 자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없지."
그건 그가 마법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사라는 건 그저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저주받은 자들이기에.
"원래는 그런 녀석들을 모두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왜 다들 부나방처럼 구는지 알겠어."
마법사인 그가 봐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것이 위험한 거래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충동적으로 저지르고 싶을 만큼. 그가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으로 그녀의 뺨을 훑자 벨카가 몸을 떨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손을 맞은 곳은 그리 아프지 않았지만 확실한 거부에 그는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이미 그녀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또 이렇게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지루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이제 좀 생산적인 이야기를 해보자고."
그러면서 그는 헬레나가 쓰러지며 땅에 흩어져 버린 종이들 속에서 그림 한 장을 찾아 그녀에게 보였다. 그 종이에 그려진 그림은 벨카가 약초꾼 행세를 하던 그에게 물었던 약초이기도 했다.
"너는 이걸 찾고 있었지?"
원래 약초꾼이었던 알비스도 알고 있었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이 식물을, 약초를 알고 있었다. 그야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가 란투아에 오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 파르즈였으니까.
"호랑가시목뿌리나무. 아마라트라는 과분한 이름으로 불릴 줄은 몰랐지만 이 식물이 가진 효과는 알고 있지."
그는 벨카를 내버려 두고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던 어셔의 침대에 다가갔다.
"읏! 어셔에게 무슨 짓을...!"
"별거 아니야. 그저 확인하려는 거니까."
벨카는 예민하게 반응하며 옆에 쓰러진 의자를 붙잡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억지로 일어나려 했지만 그는 정말로 어셔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손가락 두개로 어셔가 입은 옷을 살짝 집어 들어 피부를 확인했을 뿐이다. 그곳에는 하나만 있었다면 자세히 보아야만 눈에 띄었을 테지만 수없이 많아서 그대로도 눈에 띄는 반점들이 있었다.
"역시 이 약초를 찾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흑목병에 걸렸군."
"흑목, 병?"
의자를 붙잡고 겨우 몸을 일으킨 소녀가 그 말을 듣고 바라보았다.
"그래, 흑목병. 파르즈에서는 가끔씩 볼 수 있는 성가신 질병이지."
그러면서 그는 어셔의 옷을 놓아버리고 옷을 잡았던 집게손가락을 로브에 문질러 닦았다.
"주된 증상은 고열과 피부를 뒤덮는 검은 반점. 가장 큰 특징은..."
그는 자신과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어셔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치료제를 사용하지 않으면 확실하게 죽는다는 사실이지."
이 녀석이 바로 벨카의 마음을 사로잡은 녀석이라는걸. 소녀의 절박함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는 고작해야 이런 볼품없고 하찮은 소년이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그가 밀렸다는 사실이 화가 났지만 참아냈다. 화를 내는 건 그가 그녀를 온전히 손에 넣은 뒤에 풀어내도 늦지 않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병의 원래 모습을 생각하면 이렇게 깔끔하게 죽는 편이 차라리 나을 텐데 말이야."
그래, 이 병의 원래 모습은 이렇게 깔끔하고 편안하게 죽음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파르즈에서 살았던 그이기에 그는 이 병의 본모습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셔의 침대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지금까지 무시하고 있던 것에게 다가갔다. 그것은 몸을 둥글게 말고 구석에 숨어 잠을 자는 척 그를 못 본 척하려 애를 쓰고 있었지만 덜덜 떨리는 몸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설마 치료제를 맞지 못했는데도 그 오랜 시간 동안 변이 되지 않고 살아남았을 줄이야. 아무리 어려도 고귀하신 핏줄이라는 건가?"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다는 이유만으로도 얼어붙는 캐트시의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흑목병의 원래 주인은 캐트시지. 궁금하지 않아? 이 병의 진짜 모습을."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야."
그제야 들려오는 소녀의 말에 그는 웃었다. 그가 이렇게 웃음이 많지는 않았는데 자꾸만 흘러나왔다.
"치료제, 필요하지 않아? 마녀인 너라면 마법사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 텐데."
치료제를 직접 만드는 건 그도 불가능했지만 마법사의 마법은 지옥과도 같은 구름 지대의 아래를 손쉽게 통과할 수 있을 힘이 있었다. 마녀의 마법처럼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이 아닌 말 그대로의 힘이었으니까. 그는 캐트시에게서 뒤돌아 다시 벨카의 앞에 섰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라면 너를 파르즈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
침묵의 끝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대가는?"
그래,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캐트시가 이때까지 흑목병에 변이 되지 않고 살아남아 병을 어셔에게 옮긴 것을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너."
바로 벨카였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치맛자락을 꾹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강요할 생각은 없어. 나는 단지 제안하는 거야."
그는 정말로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나도 당분간은 덜떨어진 약초꾼 행세를 계속할 테니 생각이 있으면 오라고?"
저 하찮은 소년을 어떻게 할지는 그녀의 마음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약간의 여유를 두고 벨카가 선택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야만 그녀를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 그는 소녀의 귓가에서 얼굴을 떼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자신의 볼을 간질이는 감촉과 콧속으로 파고드는 달큼한 향기에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선불 정도는 받아도 괜찮을 것이라고 그는 그대로 소녀와 얼굴과 마주하며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닿는 말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정말로 좋았다. 그는 혀를 뻗어 그녀의 여린 살 아래로 그녀의 입안까지 파고들었다.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그가 흘깃 옆을 바라보자 이윽고 그 저항마저 안타까이 사라지고 말았다. 소녀는 마치 달달한 사탕과도 같아서 그의 입안 가득 달콤함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 소녀의 부드러운 설육을 탐하고 탐했다.
"츄읍, 츱."
고요한 방 안에서 혀와 타액이 뒤섞이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또 다른 눈이 있었다. 고양이는 자신보다 커다란 사내에게 허리를 붙잡혀 힘없이 고개를 들고 입안을 침범당하는 소녀를 보고 아무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저건 자신의 암컷인데.'
분노가 치솟아올라 당장 자신의 암컷을 탐하는 자를 죽이라 말하지만 그 사내를 본 고양이는 꼬리를 내리고 분노를 잊고 그저 공포에 떠는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보다 작은 소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을 탐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덩치 큰 사내는 자신을 이 낯선 땅으로 끌고 온 자였으니까. 벌써 오래된 이야기였지만 그는 지금도 고양이의 뼛속 깊이 남아있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고양이는 애끓는 속을 삭히면서도 그를 노려서 암컷을 되찾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몇 번이나 저 자를 죽이고 대신 소녀를 탐하고자 하는 충동이 자꾸만 들어서 고양이는 몸만 몇 번을 들썩거렸는지 모른다. 화를 강제로 억눌리면서도 고양이의 눈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츠읍, 파하."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녀의 입안을 탐하느라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던 그는 아슬아슬할 즈음에야 그녀에게서 입을 떼어냈다. 그러자 혀와 혀가, 입안이 뒤섞이며 더욱 진득해진 타액이 축 늘어지며 그와 벨카를 잇고 있었지만 그와 마주한 소녀의 금빛은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모습마저 빠져들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가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풀자 소녀는 바닥으로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그는 곧 아침이 밝아올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익숙한 어둠이 그를 내리누른다.
"그럼 기다리고 있지."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방 안에 남은 것은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고양이와 쓰러진 헬레나, 엉망으로 흩어진 종이들 가운데 주저앉은 소녀뿐이었다.
"으윽... 아가씨!?"
헬레나는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의 불편한 느낌에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어젯밤에 마법사가 방에 쳐들어와 그녀를 기절시켰음을 떠올리고 피가 가시는 것을 느끼며 급하게 일어났을 때.
"담요?"
그녀는 자신의 몸을 덮고 있었던 담요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띈 것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방이었다. 그녀가 놓쳤던 자료도 정리되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캐트시 소년도 늘 있는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걱정한 벨카는 어셔의 옆에 앉아 그의 몸을 닦아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먹구름 탓에 창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그래도 비쳐드는 남색 빛이 아침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평온한 아침. 그러나 헬레나는 이 위화감을 뿌리칠 수 없어서 급하게 일으키느라 어지러운 것을 참고 걸어 벨카의 곁에 다가갔을 때. 그녀는 소녀가 어셔의 몸을 닦아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헬레나는 차마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못하고 조용히 소녀를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어셔는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무엇 하나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다.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안을 지독하게 울렸다.
비가 멎질 않았다.